진이늘이


성경인물 10 스데반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란 말은 번역하면 면류관이란 뜻이지요. 스데반은 초대 교회가 처음으로 선택한 일곱 명의 일꾼 중 한 사람으로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일곱 명의 집사라고들 말하는데, 일곱 집사 이름을 거명할 때에는 반드시 스데반의 이름이 맨 먼저 기록됩니다. 사실 우리가 인제 집사라는 말을 좀 이해하는 게 좋겠는데요, 집사라는 말은 보통 음식을 먹을 때 시중드는 사람, 즉 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점은 교회 직제가 처음부터 섬기는 직분이었다는데 있습니다. 집사라는 그 말은 봉사자 혹은 일꾼, , 보조자 등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교회가 이 일곱 집사를 선출하게 됨으로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는데요, 초대교회가 집사를 세우게 된 근본적인 목적은 구제의 일과 행정의 일을 맡아서 함으로서 사도들이 그 본연의 그 임무를 잘 수행하게 하자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짐으로 빠진다는 말은 소외됨으로 그런 말이지요. 소외됨으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까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 공궤란 것은 먹고 마시는 걸 자꾸 주선하는 것 이런 거만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 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곧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서 사도들 앞에 세우니까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 이외에 교회 일꾼들이 처음으로 세움을 받았는데, 단연 그 앞에 스데반이 대표자지요. 언제나 그렇듯이 조직이 커지게 되면 역할을 분담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사도들이 집사들을 선택할 때에는 몇 가지 기준이 있었습니다.

첫째 성령이 충만한 사람, 그 다음에 행정에 능력 있는 사람, 지혜가 충만한 사람,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은 사람, 이런 사람들을 택한 거지요. 이러한 사람들을 뽑아서 일곱을 세웠는데 그 중에 스데반과 빌립은 아주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대체로 히브리파와 헬라파로 구별이 되어 있었지요.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본토에서 나서 히브리에 와 아람어를 대개 씁니다. 그리고 헬라화 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고, 헬라파 유대인들은 외지에서 났거나 아니면 외지가 아니고 유대 나라에서 태어났어도 헬라어를 익숙하게 사용하고 비교적 진취적이며 개방적인 사고를, 진보적 사고를 가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에 히브리파 유대인들 중에는 헬라파 유대인들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상당이 있었지요. 거기다가 성도들이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에게 위탁하여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그러한 일들을 실제로 사도들이 한 것이 아니지만 아무래도 헬라파 유대인들보다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 가지고 구제를 하는데 어려운 사람들은 헬라파 사람들이 더 많았던 가 봐요.


그 때마다 헬라파 가난한 사람들을 자꾸 소외시키고 하니까 그 성도들은 매우 그 구제에 빠짐으로 이러한 때에 궁극적으로 원망이 사도들에게 돌아온다 말이죠. 교회는 이러한 일을 감안해서 행정을 잘 해야 합니다. 모든 은혜와 이런 구제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잘 나누어지도록 하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죠. 그 여러 사람들의 원망을 듣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의무들을 설교하는 사람이 중임하지 않게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원망이 돌아갈 만한 그런 일들은 목회자가 맡지 않게 하는 것이 참 좋아요. 그래서 뭐 의심의 소지가 있거나, 어떤 의혹의 소지가 있거나, 복잡하거나 이런 것은 목사에게 맡기지 말고 교회 일꾼들이 다 맡아가지고 욕을 먹어도 우리가 먹고 말아야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욕먹어서는 안 된다. 그럼 하나님 말씀이 권위가 떨어져 버리니까요. 이런 것을 아주 지금도 깊이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부담스러운 직무를 집사님들이 맡아가지고 봉사하게 하고 또 설교하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그냥 무분별한 그런 원망들이 막 돌아가게 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바울과 함께 가말리아 문하에서 같이 공부했다는 그런 전설이 있습니다. 일찍 예수님을 믿었지요. 그래도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이 스데반을 처음부터 아마 많이 만류했을 거예요. 그러나 이미 참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 버린,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믿게 된 스데반이 뭐 바울의 만류 같은걸 뭐 그런 것 때문에 주저할 이유가 없지요. 오히려 스데반이 바울을 권해서 주를 믿으라고 많이 권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바울의 눈에 비친 스데반은 참으로 구제불능의 이단에 빠졌다 아마 그래 보였겠죠. 그러나 스데반이 교회 내에서 성실한 인품과 학문과 지혜를 겸전하여서 여러 사람들의 신망을 받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말썽 많던 구제 사업을 관리할 일곱 집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임명된 것을 볼 때에 성도의 칭찬을 받던 믿음직한 그런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지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실력이나 이런 면에서 볼 때는 열 두 사도들보다도 스데반이란 집사님이 훨씬 더 나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학문 또한 깊었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대로 뭐 그 사도들은 다 갈릴리 벳세다 그런데 사람들이고 스데반은 적어도 가말리아 문하에서 율법을 전수했다면 상당한 식견이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의 강화 스데반 설교가 있지요. 순교 직전에 한 설교, 그 설교를 들으면 그의 학문이 깊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학문뿐만 아니라 성령이 충만하여서 역사적 사실과 지혜로서 말하는 이 말을 당국자들이 감당을 못했어요.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67절부터 15절인데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사람들을 가르쳐 말 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아니 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참 놀라운 얘기죠. 스데반이 무리한 그런 중상을 당하는데도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 그런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에 당국자들이 볼 때에 사도들보다도 이 스데반이 아주 중요한 인물로 지목된 것이지요. 상당한 식견을 가진 스데반이 거기 가담하여서 백성을 선동하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리고 학문뿐만 아니라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서 큰 기사와 표적이 민간에게 막 일어나게 되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데반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겁니다. 결국 스데반을 모함하여서 고소하게 하고, 잡아다가 죽이려고 한 것이지요. 말로써 다시 말하면 이론으로서 당할 수 없을 때 결국은 죽이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지요. 공회 앞에 세워진 스데반의 얼굴을 주목하여 보니까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합니다.


스데반은 목숨을 걸고 마지막 증언을 했습니다. 스데반의 증언은 역사적인 증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요, 그리고 역사의 교훈을 바르게 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알고 있었지요. 스데반의 설교에 귀를 기울여 보면 스데반이 조상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구속에 역사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가장 그 성경을 박식하게 그가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철저하게 의지하는 그런 인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교회의 박해의 서곡이었지만, 이 사건은 오히려 초대교회에, 초대교회가 질적 양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 증거 했던 그 설교는 그 날 그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스데반 순교의 기사를 읽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계속적으로 울려 퍼지는 역사적인 복음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살아서 복음을 전해도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겠지만, 실은 그가 순교하면서 남긴 이 역사 설교야 말로 모든 성경에 기록되어서 모든 시대 모든 성도에게 증거 되고 있는 거지요. 뿐만 아니라 이 때 일어난 핍박으로 인해서 예루살렘에만 운집해 있던 교회가 그 핍박으로 인해서 세상으로 흩어져 나가서 복음이 온 세상에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스데반의 설교를 가장 깊이 감명 깊게 들은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겠지요. 한 번 읽어보시렵니까. 사도행전 81절에서 8절까지인데요.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진멸 할 새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이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스데반과 빌립의 사역이 나오고요, 이 집사들의 실력이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볼 수 있을 겁니다. 스데반은 돌을 들고 흥분하는 무리들 앞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그런 것을 볼 수 있고, 용기 있고 담대한 그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죽는 순간에도 원수들을 위해 기도한 점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하는 장면을 보면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아마도 바울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 같이 지독한 이단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고 있었는데요, 그리고는 바울이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스데반의 그 평안한 얼굴은 무엇일까? 무엇을 말하는가? 정말 스데반의 말이 맞는 것이 아닐까? 이런 동요가 바울의 마음속에 꿈틀거리고 있었을 겁니다.


사도행전을 우리가 읽으면서 스데반이 그 설교한 내용을 보면 사도행전 7장 전체가 스데반의 설교거든요. 7장이 아주 꽤 길지요. 60절까지 쭉 나오는데, 이 내용은 그 아브라함서부터 시작해 가지고 예수님 때까지 쭉 구약역사를 제대로 좀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 할 때에 전혀 무식한 사람들은 뭐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지만, 적어도 사도 바울정도로 지식 있는 사람들은 그 역사 설교를 알아듣지 않습니까? 바울이 들어 볼 때에 부인할 수 없다 말이죠.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말하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런 이단자들은 아예 뿌리까지 뽑아야 된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겠는데, 그래도 바울 속에, 가슴에 그 역사적인 진리가 담긴 복음의 메시지가 딱 내려 꽂혔는데, 바울은 그저 거기 안 넘어가려고 아주 반등하는 그런 자세지요. 반발하는 내적으로 아주 반발하면서도 부인할 수 없는, 또 부인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반발하는 그런 심리가 아마 바울의 심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 스데반 설교 듣고 동요된 그 마음을 안정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핍박을 가해보려고 하는 그런 자세가 바울의 자세였다고 봅니다. 바울이 도저히 반박할 아무 근거나 자료를 찾을 수가 없으니까, 그때 바울은 인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 다 잡아다가 옥에 넘기고 다마스커스까지 가서 사람들 막 잡아오려고 갑니다. 아마 가고 있을 때도 바울의 가슴 속에서는 스데반 설교 내용,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그리고 그 얼굴에 보이는 그 천사 같은 모습과 평안, 그리고 마지막 순각까지 자기를 정말 돌로 치는 사람들 위해서 복을 빌고 기도하는 그런 모습을 바울이 떠올리면서 굉장한 동요가 있었을 거예요.


그러면 그럴수록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더 열심히 교회를 잔멸하려고 했는데, 사실 우리는 보통 다마스커스로 가는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가지고 바울이 변화되었다, 물론 예수님 만나서 변화된 것은 사실이지요, 근데 그 예수님을 만날 때 어떤 그 정오의 빛 같이 아주 강렬한 빛을 만나서 나동그라지는 그 때 그 사건만 가지고 변화된 게 아니고요, 그 시작은 스데반 설교가 그 바울의 가슴속에 불을 질렀다고 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그가 정말 변화된 것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 만나고 아나니아에게 그 다메석에 가서 안수를 받고, 그리고 아라비아 가서 한 3년 동안 자기 신앙에 대해 총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지금까지 배운 율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은 뭘 의미하며 또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율법과 예언자와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정말 내가 만난 그 예수라고 나사렛 예수라고 나타났던 그 분은 정말 어떤 분인가? 정말 그 분이 메시아가 맞는가? 이런 전체적인 정리를 다 하는데 역시 그 도화선, 그 바울의 가슴속에 불을 지른 사람은 스데반 집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큰 인물 중의 하나가 스데반인데, 이 스데반은 그 설교를 했지만 그 때에 바울이 그 설교를 얼마나 잘 들었으면 그 사실을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에게 설명을 했기 때문에 누가가 스데반 설교를 기록했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스데반 설교를 바울이 얼마나 잘 들었으면서 나중에 그것을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누가에게 이야기를 다 해줬고, 누가는 안 들었지만 지금 그 스데반 설교를 쓰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바울의 가슴속에 그대로 새겨진 겁니다. 그대로, 너무 명명백백한 자기가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 아브라함서부터 예수님까지 역사를, 역사 설교를 했고, 이것을 바울 가슴속에 그대로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훗날 바울이 예수를 믿은 후에 스데반 설교를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누가에게 이야기 하니까 누가가 다시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바울이 들려주는 스데반 설교를 그 사도행전 7장에 정말 길게 기록해 놨거든요. 이것이 바울 속에 바울역사 신학의 뿌리가 된 것도 역시 스데반 설교였다고 볼 수 있는 거지요.


그렇다면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스데반은 참 아까운 인물이지만, 스데반을 순교하게해서, 스데반이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증언하는 그 증언을 통해서 바울이라는 한 인물을 얻을 수만 있다면야 해 볼만 한 일이지요. 스데반을 희생시켜서 바울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해 볼만 한일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초대교회 순교자들은 대개 그랬습니다. 증언한다 한 말은 곧 순교한다 말과 똑같았어요. 마르티오하는 말은 순교한다는 말이고 또 증언한다는 말이 똑 같습니다 단어가. 그래서 적어도 그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순교할 정도로 비장한 각오로서, 그리고 목숨을 바쳐서 까지 라도 말하는 그 말은 진실 아니겠는가, 죽으면서 까지도 죽음까지도 그를 꺽지 못했다마는 그 속에서 나는 죽으면서 까지 말하는 그 증언은 진실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뭐 순교하면서 증언할 그런 일이 많지 않습니다만 초대교회는 예수 믿는 것만 가지고도 죽임을 당하게 됐고, 거기다 전도하는 사람, 다른 사람을 예수 믿게 하는 사람은 뭐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 됐지요.


그래서 수많은 순교자가 나타났는데 그 순교자가 나면 두 가지 현상이 벌어집니다. 긴가민가하던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증거 하는 그 증거를 보면서 확신을 갖게 됐고요, 겁쟁이들은 교회를 떠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쭉정이나 겁쟁이들은 교회에 남아있지 못하지요. 왜냐하면 예수 믿으면 죽으니까 여기서 아주 순수한 하나님의 사람들, 정말 목숨을 걸고라도 주님을 믿는 그런 사람들만이 교회에 남게 되는 그런 일이 순교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또 순교의 또 다른 기능은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는 거지요. 너무 심한 핍박이 나니까 결국은 이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후에 사도들 외에는 다 흩어졌다 그렇게 기록합니다. 흩어지면 그 당시에는 가는 곳이 몇 군데가 있는데, 첫째 알렉산드리아 쪽으로 갑니다. 애굽에 있는 알렉산드리아 그러니까 구브로 쪽으로 가고요, 다마스커스로 가고 안디옥으로 가고, 더 심하면 로마까지 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마치 봄에 잔디밭에 불이 붙었는데, 그 솔가지를 꺽어 가지고 그 불을 끄겠다고 불을 불면요 불이 펑펑 더 퍼져나가는 것처럼, 사도행전적인 복음의 역사는 이렇게 퍼져나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누가가 전해준 사도행전 7장을 보면서 다시 우리가 돌이켜 볼 것은 스데반 설교가 얼마나 힘 있게 바울의 가슴속에 내려 꽃혔던가 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고요, 스데반은 비록 순교했지만 꼭 무슨 그 바울 한 사람뿐이 아니겠지요, 그 수많은 사람들 가슴속에 스데반 설교는, 즉 죽음을 무릅쓰고 하는 그 설교는 깊이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그 이후로 야고보 사도가 또 순교합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지요. 요한의 형님 된 야고보가 순교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모든 사도들이 요한 사도 한 사람 말고는 결국은 다 순교하게 됩니다. 즉 순교함으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그 확실한 증언, 죽기까지 무릅쓰면서 증언한 그 증언을 통해서 믿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저 봐라 저 죽으면서도 말한 저 말은 진실 아니겠는가 하면서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된 거지요.


초대교회가 그렇게 빨리 확산된 것은 바로 이렇게 순교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또 순교가 안 되어도, 이 핍박을 통해서 흩어지니까 또 복음이 빨리 온 세계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스데반 순교를 시작해 가지고 예수님 동생 야고보 순교까지, 예수님 동생 야고보도 순교하거든요. 그러니까 스데반이 순교하고, 적어도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사람들의 이름들은 확실한 것은 스데반 순교, 그 다음에 사도 야고보 순교, 그 다음에는 예수님 동생 야고보도 역시 순교하게 됩니다.


이런 순교자들의 증언을 보고도 안 믿는 사람들은 그건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이 세 사람의 순교가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가 그런 걸 보면서도 못 믿거나 안 믿고 옛날 유대교로 돌아간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 때문에 기록된 서신은 히브리서라는 서신이지요. 그리고 주후 70년 그 전에 벌써 예루살렘 교회는 안 되고 맙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 되니까, 교회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그 역사를 끝낼 이유가 없지요. 예루살렘 교회가 안 되니까,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힌 후에 70년까지는 약 37년 정도 지나갔겠지요. 33년에 예수님 십자가 못 박혔다면 37년이 지나서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나라가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스데반이 또 돌에 맞아 순교하고, 야고보가 목 베임을 당해 순교하고, 그 다음에 사도 야고보 말고 예수님 동생 야고보가 돌에 맞아서 역시 순교하는데 그런 순교자의 증언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예루살렘은 결국 멸망 길로 갔습니다.


반면에 우리나라라든지 여러 곳에서 일반적으로 순교자가 있고 나서 그 이후에 그 곳은 기독교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다른 종교가 없어져 버리고, 순교자의 피가 흐른 곳은 대체적으로 복음의 꽃이 피어나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스데반을 통해서 정말 가장 그 복음을 가까이서 바르게 이해했던 젊은 학자가 이렇게 장하게 순교함으로서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하는 사실을 인식 한다면 스데반의 죽음은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죽음, 순교자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해요. 그러나 기독교는 바로 이 순교자의 피 가운데서 자라났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에서 피를 흘리셨고, 또 그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죽으며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하시면서 예수님이 먼저 죽어지는 밀알이 되었고, 스데반, 그리고 야고보, 그리고 인제 예수님 동생 야고보까지 예루살렘에서 순교를 했습니다. 자 그렇지만 그래도 믿지 않았던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것을 예수님 미리 아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눈물도 흘리셨던 거지요.


그 외에 다른 모든 나라에서는 순교자가 피가 흘려지게 되면 그 곳은 정말 교회가 힘 있게 자라나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땀과 눈물이며 순교자의 피가 흐른 곳, 그 곳의 교회는 언제나 승승장구하고 지금까지도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중에서도 보세요. 서머나교회는 그 폴리캅의 피가 흘려진 곳이거든요. 다른 아시아 일곱 교회가 칭찬 받았던 교회도 다 없어졌지마는 폴리캅 감독의 피가 흘려졌던 그 서머나 교회는 지금도 든든히 서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스데반처럼 이 순교한 사람들이 참 많았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이만큼 성장한 것이 지금 현재 우리 모든 어른들의 노력도 있지만 바로 피 흘리기까지 복음을 증거 했던 그 순교자의 피를 통해서 한국교회가 이렇게 서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분들이 피를 흘리면서 전한 복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도 피 흘리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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