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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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7절). 본문은 바울의 육체에 주어진 가시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가시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본래 '십자가', '가시'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것으로서 가시는 바울의 활동에 막힘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견해에 따라서는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두통, 간질, 안질 등 육체의 질병으로 보기도 하고, 끝없이 뒤따르는 박해, 또는 바울에게 주어지는 일체의 유혹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 내려간 이유와(참조, 갈 4:14, 15) 관련시켜 생각하면 육체적 질병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 중에서도 안질이 유력합니다. 바울의 육체를 괴롭힌 이 가시는 사탄의 사자로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육체를 괴롭힌 주권자는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으며, 사탄은 단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스리시고 징계하시는 데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그러한 육체의 가시를 주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가시를 주신 이유
   개인의 가시나 교회의 가시나 다 어려운 것입니다. 심리상 고통도 견디기 어려운 가시오, 육체상 질고도 참기 어려운 가시며, 외부의 고통도 견디기 어려운 가시입니다. 바울은 이 가시가 그에게서 떠나기를 세 차례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가시는 떠나지 아니하고 대신 그는 하나님께서 가시를 주신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1)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받은 복음과 계시는 기묘하였거니와 삼층천의 환상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따라서 그간 받은 은혜와 신비의 체험은 그를 자고하게 하거나 교만하게 할 충분한 소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교만해지려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도 인간인지라 하나님은 그를 더욱 겸손하게 하기 위하여 육체에 가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정통을 자랑하는 교사에게도, 성공을 자랑하는 전도자에게도 가시는 필요합니다. 교만은 사람의 처음 죄요, 하나님께서 제일 미워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자로 세운 바울을 교만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시기 위하여 육체에 가시를 주신 것은 오히려 은혜요 관심과 사랑의 표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9절)고 했고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함이니라'(10절)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그의 인간적인 면이 육체의 가시에 찔려 약하여진 후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권능이 온전하게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만일 바울의 강한 때에 업적과 능력이 나타났다면 이를 자신의 능력으로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여졌을 것이며, 따라서 그의 그러한 권능도 중단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모진 고난과 역경 속에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그의 가족을 구했으며, 모세는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되어 그의 능으로 민족을 구원할 줄로 알았다가는 오히려 동포의 가시에 찔려 미디안으로 도망해야 했으나 40년을 유랑하며 수많은 가시에 찔려 약해질 대로 약해진 후에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큰 권능으로 민족을 구원하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쓰시고자 하는 자를 최대한으로 겸손하게 하셔서 사역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경우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이 약한 데서 완성되는 비밀을 체험하고 '내가 약할 때에 강하다'고 고백했습니다.

   2. 가시로 인한 은혜의 생활
   교만을 방지하고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육체의 가시를 어찌 우리가 거절하겠습니까마는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육체의 가시를 떠나도록 세 차례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10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가시관에 이마를 찔리고, 못으로 양손과 양발을 찔리셨으며, 창으로 허리를 찔리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고통과 수치, 모욕도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에 비하면 바울의 육체적 가시, 우리의 고통과 환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곤란을 기뻐한다고 했듯이 우리도 그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불교는 자신의 번뇌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기 위하여 고해와 극기로 훈련합니다. 그것은 오직 자기만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상을 구원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고행의 종교가 아니라 중생의 종교인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 완전한 생명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서 가시가 떠나게 아니하고 바울로 그 가시를 이기게 하셨으며, 그 가시로서 은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가시를 소망으로 여기고 전진해야겠습니다. 그때 모든 것이 화하여 건강한 육체, 건강한 생활, 향기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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