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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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직 예화2권 275편 모음

 

1.거짓 선지자와 십자가

제가 듣건대  전에 어떤 거짓 선교사가 자기는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외치면서 자기의 말을 들르라고 부르짖었는데, 그의 이마에는 은으로 만든 둥글 한 것으로 가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왜 그것으로 가리고 다니느냐고 물어 보면, 만일 그것을 떼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빛이 나타나서 그 빛을 보는 사람이 눈이 어두워서 소경이 되는 까닭에 부득이 그 곳에 은으로 만든 것을 붙였다고 말 하드랍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잘 때에 그를 따라가던 사람이 그것을 한번 뜯어보았습니다. 몰래 뜯어보니까 그 이마에는 다른 것이 아니고 문둥이 흔적이 있더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지 못할 때에는 죄가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죄에 속았습니다. 죄의 마력에 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 우리는 죄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추악하고 우리 주님까지 이와 같은 고통을 받게 하였던 그 죄의 정체를 알게되었습니다.
 죄의 다스리는 권세가 역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다시 한 번 바라볼 때에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이 그 고난받으신 것으로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 즉 자기의 살을 찢고 자기의 피를 흘려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볼 때에는, 우리는 죄에는 죽었지마는 의에는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2십자가의 빛

우리가 예배당 뜰에 나가서 서울 사방을 돌아보면 여러 가지 것이 보입니다. 삼각산이 보이고, 여러 가지 고층 건물이 많이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밖에 나가서 그것을 먼저 보지 말고 오늘 같이 해가 잘 비칠 때에 해를 한참 쳐다보세요. 그러다가 다음에 사방을 돌아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해를 본 눈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에서 비치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자기는 십자가에 못 박고 원수 된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하는 그 기도의 음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서 그 다음에 세상 것을 바라보십시오. 세상 것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전에는 향락이 귀해 보였지마는 물질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전에는 지위나 권세 같은 것들이 그렇게 귀해 보였지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참 바라보다가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아서 오직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의 눈에는 오직 십자가만이 밝은 빛으로 그 심령을 채우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 오직 하나님의 의, 오직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와 십자가>에서

3.리빙스톤의 기도

만일 우리의 이 서울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한다고 하면, 이 서울에 대해서도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첫 째는 의로운 성이 될 것이요, 죄가 없어질 것입니다. 깨끗한 서울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참된 화평과 평강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 전체, 우리 온 나라가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나라의 진정한 왕이 되시고 우리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면, 우리 국가 전체의 의와 평강의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종려 주일은 그리스도를 우리 왕으로 영접하는 주일입니다.
제일 먼저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세상을 떠난 리빙스턴이 바로 세상을 떠나기 전 날 아침 아니면, 그 날 아침에 마지막 일기를 남긴 것이 있는데, 거기에 적혀 있는 간단한 기도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 것이 있습니다. “오! 주여, 내 왕이여,” 이런 말로 기도를 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요, 자기의 왕으로 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오늘 이 의의 깊은 종려 주일, 우리 하나 하나가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하고, 우리 나라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해서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다하는 축복이 같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왕>에서

4.영원히 거하는 생활

우리가 영원히 거하는 생활을 하려고 하면 꽃과 같이 떨어지는 이 세상에 근거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히 서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생활의 근거를 두어야 될 것입니다. 일시  일시 변하는 인간의 명상이나 인간의 사상에 두지 말고, 변하지 아니하는 우주의 지표 적 진리가 되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생활의 근거를 두고 살아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이 요한 1서 2장17절을 다시 들으십시오.“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이처럼 이 세상은 지나갑니다. 그 정욕도 지나갑니다. 그렇지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북경 구경을 한번 했습니다. 고궁을 구경하고 별궁도 여러 곳을 가서 구경하는데, 한 곳에 가니까, 그 안내자가 하는 말이 아름다운 궁궐 가운데 어떤 한 방을 가리키면서 그 방이야말로 청조 말기에 가장 사치하고 호화롭고 세도를 부리던 서태후(西太后)가 살던 방이라고 합니다. 그 방에는 아무 것도 없고 낡은 침대와 베개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안내자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렇게 호화롭고 사치하고 그렇게 세도하던 서태후가 마지막에 남기고 간 것은 그 베개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갑니다. 세상에 권세도 지나갑니다. 세상의 영광도 지나갑니다. 
저는 이번에 미국에 가서 30여 년 전에 제가 졸업한 대학을 한번 더 방문하는 혜택을 가졌습니다. 집은 여전합니다. 캠퍼스도 여전합니다. 오히려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집도 여러 채를 더 지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가운데 한가지 섭섭한 것은 30여 년 전에 저를 가르쳐 주던 은사는 볼 수 없고, 다만 이 도회에 아직까지 살아 남아있는 은사는 80노인 밴드벨드 박사라고 하는 한 뿐이었습니다. 여러 은사들은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은 지나가는 세상입니다
  제가 이번에 세 주일 남짓하게 한국을 떠나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잠깐 다녀온 셈입니다. 돌아와서 서울을 돌아오게 될 때에 한 가지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상은 삼각산은 여전합니다. 한강도 여전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정계를 보면 완전히 변했습니다. 옛 정부는 지나갔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지나가는 것입니다.
  정권뿐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와 같이 지나갑니다. 권세도 지나가고, 일대의 문화도 지나가고, 예술도 지나가고, 주의와 사상도 지나가고, 모든 유행도 지나갑니다. 너무 유행만 따르지 맙시다. 어떤 이들은 요즘 데모만능인 줄 생각합니다. 청춘도 지나갑니다. 청춘을 자랑하지 맙시다.
  저는 6·25때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한 뒤 곧 따라갔습니다. 저는 서성리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라고 그래서 서성리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며 설교를 했습니다. 옛날 이야기니까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 줄 압니다. 예배를 다 보고 여러분과 인사를 하는데 알 분도 있고 모르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까맣고 자그마한 어떤 할머니가 저한테 인사를 하면서“저를 알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를 좀 많이 당합니다. 암만 생각해도 생각이 안 납니다. 그래서 미안하지마는 저는 정신이 없어서 미쳐 생각이 안 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하는 말“저를 모르겠어요? 저는 저 남산 모루, 전에 목사님이 남산 모루에 와 계시지 않았습니까? 거기 있을 때 그 교회에 다니던 아무개올시다”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 40년 전에 그 남산 모루에서 알던 그 아무개는 얼굴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얼굴을 한 잘 생긴 여자 가운데 하나로 저는 생각했었습니다. 그랬는데 3, 40년 후에 보니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청춘도 지나갑니다. 세상만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정욕도 지나갑니다. 우리 속에 있는 욕망도 연령을 따라서 지나갑니다. 어릴 적에 있던 욕망이 좀 크면 사라집니다. 청년시대의 욕망이 노년이 되면 지나가고 맙니다. 우리의 정욕도 환경의 변함에 따라서 또한 변합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세상에서 지나가는 욕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5.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

그러나 여러분, 지나가지 아니하는 것을 여기 한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인간 역사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개인의 생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옛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가운데도“창천 유이 생남자( 蒼天有義 生男子) 란 말이 있습니다. 푸른 하늘에 뜻이 있어서 남자를 내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우리를 이 땅에 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뜻을 찾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경륜대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서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고 거하겠다고 여기에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전에 제가 평양에서 학교에 다닐 때에 흔히 대동강변 그 청루벽 아래와 모란봉과 을밑대와 그런 곳에 자주 산보하였습니다. 산보를 할 때에는 가끔 이런 생각이 납니다. 대동강의 물결은 그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또 항상 끊임없이 아래로 흘려갑니다. 그렇지마는 한편에 높이 솟은 모란봉이나 을밑대 청루벽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물결과 같이 흘러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이 만세 반석 위에 생의 근거를 둔 사람은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거하는 생활의 비결은 첫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영원한 주의 말씀에 근거를 두어야 도겠습니다. 셋째는 영원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야 되겠습니다. 

6.하나님의 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 번은 어떤 교우가 자기 목사에게 가서 묻기를“어찌해서 주님께서 가룟 유다 같은 이를 택하셨습니까? 그건 이상하지 않습니까?”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는 곧 대답하지 못하고 조금 생각하더니 서서히 대답하는 말이“나는 그것보다 더 이상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주께서 왜 나 같은 사람을 택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누구나 스스로 자기자신을 솔직히 하나님 앞에서 반성할 때는 오직 자기가 죄 덩어리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실 택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 공통의 경험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부족을 열심히 살펴 볼 때에는 과연 예수 님의 제자들이 한 번 말씀한 바와 같이“누가 능히 구원을 얻으리이까?”하면서 탄식할 수밖에 없는 줄 생각합니다. 좀 더 양심이 예민하면“나는 쓸데없는 사람이야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랴”이렇게 낙심하기도 쉬운 줄 생각합니다. 혹은 자포자기 할 수도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히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줄 압니다. 구원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주님께 있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나는 그리스도라 그리스도 내가 저희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그리면서 계속해서“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 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하셨습니다.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고 그 다음에 다시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 택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손안에 있습니다.“아무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이것은 우리가 분명히 압니다. 

7.하나님의 선한 손

제가 오래 전에 당한 경험을 한 가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항상 주저하지마는 오래 전 이야기이니까 괜찮은 줄 압니다. 제가 신의주에서 교회 일을 볼 때에 무슨 일이라고 다 말할 필요는 없지마는 한 번은 크게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만 낙심이 나서 일할 마음도 없어지고 용기도 없어졌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나 혼자 잇는 방에 들어와서 그저 정신없이 방바닥에 넘어졌습니다. 넘어져 있는데 이상합니다. 지금까지 생각해도 확실히 모르지요. 제가 그 동안 잠깐 잠이 들어서 꿈인지 아닌지 모르지마는 이상한 것을 보았습니다.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제 자신이 어떤 길을 갑니다. 길이 대단히 험합니다. 또 어떻게 피곤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상 더 갈 수 없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오른편 쪽으로 그만 쓰러졌습니다. 그러니까 난데없이 어떤 큰손이 ― 30년 전에 본 일이지마는 어제 본 일 같아요 ― 아마 사람의 손의 10배나 큰손이 오른 쪽에 와서 넘어지는 저를 얼른 붙들어서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너무 피곤해서 왼쪽으로 또 넘어집니다. 또 다른 손이 왼쪽에서 못 넘어지게 붙듭니다. 앞으로 꼬꾸라집니다. 또 두 손이 앞으로 와서 앞으로도 꼬꾸라지지 못하게 합니다. 그냥 계속해서 그 험한 길을 이 손이 붙들어서 가게 합니다.
  그런 저 자신을 보다가 깨어서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읽은 성경이 이상하게도 에스라 7장 9절입니다.“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이것은 에스라의 이야기입니다. 에스라는 멀리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자기 동포와 같이 정월 초하룻날 예루살렘을 향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먼 광야 길입니다. 원수가 많은 험악한 길입니다. 그런 길인데도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넉 달을 걸어서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우리의 천성 행로가 이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를 믿고 주를 따라가는 길도 마치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는 길처럼 황막한 광야 길입니다. 때때로 험한 준령이 우리의 앞을 막습니다. 장강대야(長江大野)가 우리의 앞을 막습니다. 때때로 함정이 잇습니다. 때때로 원수가 복병 하여 우리의 길을 기다립니다. 연약한 우리가 이 길을 갈 수 잇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선한 손이 우리를 도우심으로 승리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손은 선합니다. 아버지의 손은 만 유의 손입니다. 아버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떠나실 때 아버지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손에 여러분의 심령을 부탁하세요, 살 때에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고 세상을 떠날 때에도 아버지의 손에 우리의 영혼을 부탁합시다. 우리 사람은 약합니다. 나를 믿다가는 실패합니다. 언제 넘어질지 모릅니다. 마귀는 우리보다 강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손>에서

8.하나님을 경외하라

미국의 유명한 목사요 또 초대 프린스턴 대학의 학장으로 잠깐 지낸 조나단 에드워드라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한 번은“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잡힌 죄인”이라고 하는 주제로 설교하였습니다. 그 설교하는 말 가운데 마치 죄인이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잡힌 것은 어떤 사람이 아주 흉측한 벌레를 손에 잡고 장차 불에 던지려고 하는 것 같은 운명에 있다고 하는 말을 우리에게 남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죄인을 반드시 벌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육신만 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 영혼까지도 지옥 불에 던져서 형벌 하시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어떻게 세상에서 잠깐 지은 죄 때문에 영혼을 형벌 할 수가 있을까? 그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그러나 이 진리는 보통 성경에 가르친 말씀도 아닙니다. 예수 님 자신이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보면 얼마나 확실한 사실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0절에“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태복음 25장 41절에는“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는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가복음 9장 47-48절에는 주님께서 친히“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빼어 바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 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니라”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두려워해야 됩니다. 참으로 두려워할 자는 하나님 한 분밖에 계시지 아니하십니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9.모세의 신앙
 
그러면 사람은 어찌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잊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못 보시는 줄 압니다. 전파도 보이지는 아니합니다. 공기도 보이지는 아니합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실체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의 영혼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신앙을 기록할 때에 이런 말로 기록했습니다.“그는 보이지 않는 자를 보이는 것같이 하여 살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나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것과 똑같이 그 앞에서 사는 것이 참된 신앙 생활이올시다.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비록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내려다보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언제나 의식하면서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사는 것이 신앙 생활이올시다. “눈을 지으신 자가 어찌 보지 못하겠느냐?”성경이 우리에게 경고하여 주십니다.
  우리와 같이 성경을 분명히 배우지 못했던 옛날 사람의 말 가운데도 암실기심이라도 신목여전(暗室欺心 神目如電)어두운 방안의 속이는 마음일지라도 신의 눈이 번개처럼 밝게 본다고 하는 옛날 사람의 경고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시는 것이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보는 것보다도 더 분명히 보십니다. 저는 여러분의 외모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들어다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을 경외하면서 사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X광선보다도 더 밝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이는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생활을 하는 이에게 대하여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10.제2의 기회 

한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라고 하는 우리 한국의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실수와 실패는 곧 인간의 것이올시다. 그렇지만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제2의 기회를 주십니다.
  운동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선수가 달리다가 넘어진다고 할 지라도 다시 일어나서 경주를 계속하는 사람이 최후의 승리를 얻습니다. 전쟁도 그렇습니다. 첫 번 전쟁에 패전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2차대전의 역사를 지금도 여러분께선 생생히 기억하시지마는 연합군 측에서 처음에는 다 패전하였습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영국 할 것 없이 독일에게 첫 번 전투에서는 전부 패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다시 유럽을 점령하고 히틀러도 온전히 굴복시킨 것입니다.
  태평양전쟁도 역시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일본에게 영국과 미국이 아주 참패를 당했습니다. 진주만이 다 부서지고 말레이시아를 다 빼앗기고 싱가포르를 다 점령당하고 필립 핀도 다 점령당하고 마지막에 맥아더도 쫓겨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최후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뿐만 아닙니다. 사업도 그렇습니다. 사업도 우리가 실패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마지막에 성공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고 나갈 때에 나는 원하지 아니하지만 모르는 가운데 유혹이 들기 쉽고 죄악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시험에 드는 것을 아는 대로 곧 뉘우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은혜를 주시고 두 번째 기회를 주셔서 그런 사람을 통해서도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11.둘째 축복의 기회
 
우리가 실패를 했거나 시험에 들었을 때 기억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낙심하지 아니 할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시험에 들기 전에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조금 지어도 괜찮다면서 더러 시험에 들기를 귄 합니다. 하지마는 정작 시험에 한번 듭니다. 그 다음에는 마귀의 말이 변합니다. “옳지 너 죄지었지? 이젠 소망 없어 누가 다시 너를 신용하겠니? 누가 너를 다시 사람으로 보겠니? 누가 너를 용납하겠니? 아주 정말이야”이렇게 마귀가 시험합니다.
  죄지었을지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둘째 축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탕자가 탕자로서 갖은 죄를 지었습니다. 허랑 방탕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마는 돌아올 때에는 아버지께서 두 손으로 영접해서 환영했습니다. 삭게오 같은 사람이 민족을 배반하고 요즘 말로 부정 축재를 하였고 여러 가지 죄를 지었지마는 온전히 회개할 때에 주님께서는 영접해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렸던 살인 강도가 죽기 전에 회개를 할 때에 주님께서는 그 강도를 낙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시험에 들어 한 번 죄 지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은혜를 주시고 두 번째 축복을 반드시 주시는 것입니다. <제2의 기회>에서 
 
12.성결한 생활
 
전에 어떤 경관이 거지통에 가서 거지들을 전부 조사하는데 제일 먼저 있는 거지를 만나서“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까? 얼른 대답하는 말이“내 이름은 김백억이올시다”순경이 그 말을 듣고“김백억이야, 금백억이 거지통에서 사나?”아마 아버지는 그 아들을 낳은 다음에 너무 기뻐서 이 다음에 돈 많이 모으고 잘 살라며 이름을 백억으로 지은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이 백억이라고 하는 녀석이 마지막에는 거지통에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아름다운, 보배로운, 거룩한, 이름을 주셨으면 이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聖徒)이름을 가지고 속도(俗徒)의 생활을 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러면 성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통해서, 또한 지난날의 2천여 년 동안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특별히 거의 완전한 자리에 올라섰다는 여러 성자들의 생활을 통해서, 이 성도의 모습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대강 짐작해서 깨달을 수가 잇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들의 생활의 첫째 특색은 성결 이올시다. 거룩하고 깨끗한 것이올시다. 시편 24편에“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 고, 곧 손이 깨끗하며 뜻을 허탄(虛誕)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다시 말하면 손이 청결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뜻이 청결하고 입이 청결합니다.
  전에 어떤 성자는 정한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추운 겨울에 얼음 구멍에 그 몸을 던진 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어떤 성자는 자기의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옷을 벗고 가시덤불에  뒹굴어서 자기 몸을 괴롭게 함으로 자기의 마음에 깨끗한 것을 회복한 성자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산 물고기는 짠 바닷물에서 살지마는 그 살은 짠물에 배지 아니합니다. 참 성도는 더러운 속세에서 살지마는 더러운 물이 그 마음에 배어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에베소서 5장 3절에 사도 바울은 이런 말로 에베소 교인들을 권면하였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이것은 성도의 마땅한 말입니다. 성도의 모습의 첫째 특색은 성결함에 있습니다. 그 마음이 성결하고 그 입이 성결하며 그 뜻이 성결하고 그 행실이 성결해서 더러운 세상에 살지마는 그 생활을 깨끗이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13.화평한 생활
 
그리고 이들 성자의 생활을 살펴볼 때에 둘째 특색으로 나타나는 것은 화평(和平)이올시다. 시편 34편에“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귀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 지어다”화평을 구하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도 산상보훈에“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모습의 둘째로 뛰어나게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회평입니다. 그 마음속에 화평이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화평이 잇고, 그 말이나 성품에 화평이 있고, 그 생활이 화평을 구하는 생활, 이것이 특별히 뛰어나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아니하며 어떠하든지 악을 선으로  이기는 이러한 사실입니다. 분한 마음이 나도 그 마음을 참고 원한을 마음 가운데 오래 품지 않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 주는 그 화평의 마음이 곧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14.성 프랜시스와 슈바이처 이야기
 
전에 성 프랜시스가 자기의 제자들과 같이 어떤  산간에 살 때에 어느 날 저녁 프랜시스가 잠깐 나간 사이에 그 산중에 있던 도둑 몇 사람이 들어와서 그 제자들을 보고 먹던 떡이 있으면 좀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제자들이 대단히 노해서“이 도둑놈들아, 너희들이 일해서 먹지 아니하고 도둑질해서 먹다가 마지막에는 우리 선생님의 마른 떡까지 빼서 먹으려고 왔느냐?”하고 제자들은 대단히 책망해서 쫓아버렸습니다. 프랜시스가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이 그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그 보고를 다 듣더니 프랜시스는 오히려 자기 제자들을 책망하면서“도둑이건 도둑이 아니건 배고픈 사람에게 떡을 주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인데 너희들은 왜 떡을 주지 아니했느냐? 떡을 내어 주면서“이제 이 덕을 가지고 산에 가서 그 도둑을 찾아서 이 떡을 먹이고 돌아 오라”그래서 이 제자들은 밤 세도록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도둑을 만나서 그 떡을 다 먹였다고 합니다. 그 도둑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이 제자들과 같이 프랜시스에게 와서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서 그 가운데는 프랜시스의 유명한 제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화평을 사랑하고 죄를 용서해 주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아서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올시다.
  지금 아프리카에 가 있는 슈바이처 박사가 이런 말을 한 번 했습니다. 자기가 본래 자라난 교회에 어떤 잘 믿는 교인이 한 분 계신데 이 분은 자주 귀가 멀어서 설교는 전혀 듣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언제든지 예배당에는 꼭 출석합니다. 한 번은 물어봤다고 합니다.“당신은 설교 한마디도 듣지 못하면서 뭘 하려 예배당에 늘 옵니까?”“우리 믿는 사람들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그 사도신경에 있는 성도의 교통을 믿는데 내가 비록 설교는 듣지 못하지마는 성도들이 모이는데는 같이 가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함께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마땅히 내가 성도로서 할 것이 아닙니까?”성도의 교통을 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15.무아의 봉사
 
그리고 이 성자들의 생활을 살펴 보건대 셋째 특색은 무아의 봉사입니다. 말없는 봉사입니다. 앞에서 프랜시스 이야기를 했지마는 왜 프랜시스를 성자라고 합니까? 그는 자기가 없는 봉사를 합니다. 병자를 도와주고, 김 못 매는 이 있으면 김 매주고, 추수 미처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추수를 해주는 등 자기가 없는 봉사를 했습니다. 하와이에 문둥이들만 사는 섬에 가서 일생을 바친 다미안을 왜 성자라고 합니까? 자기가 없는 봉사를 하였습니다. 20세기에서 우리 기독교도들 가운데 성자라고 이름을 들은 이는 제가 기억하는 대로 아마 서양에는 아프리카에 가서 일생 일하는 슈바이처 박사이고 동양에서는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난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 목사일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다‘내’가 없는 말없는 봉사를 하였습니다. 봉사가 귀하지마는‘나’라고 하는 것이 들어가면 봉사의 가치가 없어집니다. 성경의 말씀과 같이 향기로운 기름에 죽은 파리가 빠진 것과 같습니다. 내가 모른 봉사, 내가 없는 봉사. 이것이 성도의 모습의 특별한 특색인 줄 생각합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아프리카 캐머룬에 가서 순회할 때에 어떤 곳에 가보니까 전부 흑인만 있고 선교사는 지금 두 집밖에 없는데 그 중 한 가족은 안식년으로 미국에 들어가고 그 흑인만 사는 동네에 미국 여자 선교사 혼자서 병원을 차러놓고 의사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들으니까 본래 그 여자의 아버지가 개척 선교사로 그 곳에 와서 의사 활동을 하다가 열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도 이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딸 하나만 남았습니다. 이 딸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미국에 돌아와서 의학 공부를 하고 의사가 되어서 아버지의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그 흑인들만 사는 그 곳에서 홀로 그들에게 봉사하는 광경을 볼 때 제 마음 가운데 과연 여기에 성도의 모습이 있구나 하고 큰 감격을 받았습니다.
 <성도의 모습>에서

16.이전투구와 용두사미
 
함경도서 오신 교우 많이 게신데 좀 미안하지마는 전에 어떤 사람들이 팔도 사람들의 성격을 이야기하다가 함경도 사람들의 성격을 평한 것을 보면 이전투구(泥田鬪狗) 라는 말로 비평했습니다. 무슨 뜻인고 하니“진흙 밭에 개 싸움하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얼른 들을 때에 함경도 사람을 욕하는 말이라고 들을 수 있지마는 절대로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욕하는 말이 아니고 칭찬하는 말인 줄 생각합니다. 진흙 밭에서 개 싸움하는 것을 보면 그저 이 놈들 싸움 붙은 다음에는 멎지 않습니다. 그저 그냥 싸움만 계속합니다. 아마 대부분이 함경도 사람의 성격이 한 가지 무엇을 시작하면 중간에 놓지 아니하고 그냥 끝까지 하는 그 성질이 있는 모양입니다
한편 우리가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말을 그대로 풀면 머리는 용인데 꼬리는 뱀이란 말입니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일을 벌려 놓아 큰 일을 하는 것 같으나 끝은 후지 부지 얼버무린 부진한 형상을 뜻합니다. 시작은 좋게 나왔다가 그 다음에 사그라집니다.

17.석수와 큰 바위
 
여러분, 석수가 큰 바위를 깨뜨리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석수가 큰 바위를 깨뜨려 부수려고 할 떼, 맨 처음 쇠못을 하나 대고 방망이로 첫 번 땅 때리고 나서 보아야 아무 틈나는 것이 없습니다. 두 번 때려도 마찬가지로 아무 틈나는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 같아서는 못하겠다고 그만 둘 것입니다. 그러나 석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때리고 두 번 때리고 세 번 때리고 마지막에 금 날 때까지 때립니다. 마지막에는 큰 바위가 깨뜨려지고 맙니다.

18.모니카의 끈기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15년 동안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기도하고 권면하는 가운데 마지막에 가서 아들이 회개하지 않았습니까? 모니카는 이 은전을 찾은 것입니다.
  이 은전을 찾으니 이 여자가 제일 먼저 무엇을 하겠습니까? 여기 자세히는 없지마는 은전을 갖고 보니 처음에는 빛이 번쩍 번쩍 났었는데 지금은 형편없이 되었습니다. 먼지가 묻고 녹이 쓸고 더러워 졌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손수건 같은 것으로 빡빡 닦아서 아주 반들반들하게 빛냈습니다. 그리고 보니 황제의 화상이 환하게 빛이 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신께서 이와 같이 잃은 보배인 인간의 심령을 찾은 다음에는 제일 먼저 하는 것이 그 심령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닦아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온전히 보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해 주십니다. <잃은 보배를 찾다>에서

19.대리석 십자가에 새겨진 ‘오직 예수’
 
제가 어떤 책을 보니 스위스에 있는 유럽의 제일 높다고 하는 알프스 산 어떤 높은 봉우리에 흰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십자가를 해 세웠다고 합니다. 그 대리석 십자가 위에는‘오직 예수’란 글자를 새겼다고 합니다. 그 대리석 십자가를 어떻게 세우게 되었냐? 일찍이 어떤 분이 자기의 가족을 데리고 스위스에 피서를 갔다고 합니다. 어떤 날 그 분이 자기 사랑하는 딸을 데리고 알프스 어떤 높은 봉우리에 등산을 하였습니다. 높은 산꼭대기를 조심조심해서 올라갔지마는 그만 실수해서 그 사랑하는 딸이 발이 미끄러져서 높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결국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분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한 여름 서늘한 스위스에서 평안히 지내려고 피서 갔다가 이와 같은 참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분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돈이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 분은 지위도 상당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지위도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 때에 그이에게 참된 위로를 주신 분은 예수밖에 없는 것을 그 분이 절실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그 산봉우리 위에 큰 대리석으로 십자가를 세우고 거기다가 새기기를‘오직 예수’우리에게 최후의 소망과 위로를 주실 분은 오직 예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오직 예수만 의지합시다. 돈을 의지하지 맙시다. 세력을 의지하지 맙시다. 오직 예수만 믿고 의지합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봅시다. 베드로처럼 세상 물결을 바라보지 맙시다. 세상의 어떤 것도 바라보지 맙시다. 예수만 바라봅시다. 세상의 다른 것을 따라가지 맙시다. 오직 예수만 따라갑시다. 이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국가도 역시 그런 줄 압니다. <오직 예수>에서

20.피얼스 박사의 증언
 
어떤 목사 수양회를 할 때에 피얼스 박사가 오셔서, 보통 신문에 나타나지 아니하는 사실, 특별히 쿠바에서 된 일을 우리에게 말 해 준 적이 있습니다. 서인도 제도에 중국 사람이 상당히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쿠바에도 중국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과히 만치 않았는데 특히 1948년 이후로 중공군이 중국 본토를 점령하면서부터 중국 본토의 피난민들이 쿠바에 와서 사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는 믿는 사람의 수가 많다고 합니다. 자연히 그럴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쿠바가 중공을 승인합니다. 특별히 중공에서 사람을 데리다가 쿠바를 전폭적으로 적화 계획을 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와서는 미리 다 조사해서 누가 카스트로 정부를 지지하며 반대하는지 조사하는데, 제일 먼저 중국사람부터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국 사람 가운데 이 적색 정부를 지지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모두 색출해서 중국 본토로 보낸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중국 본토에서 피난해 갔던 사람들이, 특별히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쿠바의 신자들이 밤낮 자지 않고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대는 언제 어느 곳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직면하고 이것을 분명히 깨닫고, 깨어서 여기에 대비하면서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깬 사람은 잠꼬대하는 법이 없습니다. 꿈속에서 잠깐 있던 일, 같은 일 때문에 싸움하지 않습니다. 큰 원수가 있는데 작은 원수를 맺지 않습니다. 깬 사람은 기도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내 가정을 위해서, 내 영혼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기도합니까? 혼자만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모여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구역에서 구역끼리 모여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가정에서는 가족끼리 모여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제일 기도하기 좋은 시간은 새벽입니다. 새벽 기도회에 여러분 가운데 몇 분이나 나오십니까? 새벽 기도회에 참여 못하는 것은 늦잠 때문에 못합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깨어서 기도합시다.
 깨여있는 사람은 자기의 책임을 합니다. 자기의 책임은 우선 감당합니다. 만일 우리가 다 깨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남한에 복음을 전파하는 문을 크게 열어 놓았을 때에, 무엇보다도 이 기회를 이용해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전파합시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때를 당하여 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간절히 권면하고 격려합니다. 

21.하나님의 물통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집에 귀한 아들이 하나 있는데 다른 것은 다 좋아요, 그런데 이 사람의 나쁜 버릇은 늦잠 자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일어나라고 해도 안 일어나고 늦잠을 잡니다. 그래서 한 번은 너무 답답해서 그 이웃에게 가서, 좀 불량한 사람이 그 동리에 있는데 그 사람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예, 제가 내일 아침에 깨워들이지요”“그렇게 하겠나”그렇게 하겠습니다.“그럼, 그렇게 해보게”
  그 이튿날 아침에도 해가 중 낮이 되었는데 안 일어납니다. 그 불량한 사람이 왔습니다. “일어났습니까? 아직 안 일어났어“제가 깨어 보지요, 물통 하나 있습니까?”물통을 가지고 우물에 나가더니 찬물을 가득 받아 가지고 들어와서 문을 활짝 열더니 다짜고짜로 찬물을 얼굴에 좍 끼얹었습니다. 그러니까 그토록 곤하게 잠자던 사람이 후다 닥 일어나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여러 번 권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파수꾼을 통해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도 격려하고 안 믿는 사람에게도 경고하며 여러 번 경고합니다. 깨어서 기도하면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아니하면 저는 무서워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통을 들고 와서 전부 물을 끼얹을지 누가 압니까? 그런데 그 물통이 공산당일지 어떻게 압니까? “깨어 있어 기도하라”
<깨어 기도하라>에서

22.신교의 자유가 있기까지
 
오늘 종교 개혁 주일을 당해서 우리 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여기에 대해여 알 만한 몇 가지를 특별히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대로 생각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제1세기에 주님께서 오시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신 후 온 사도들과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당시 로마 제국에 널리 펴지게 된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의 핍박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로마 정권의 핍박이 가혹했지마는, 당시의 믿는 사람들은 담대히 사방에서 복음을 전파해서 주 후 313년에는 기독교도 온전한 신앙의 자유를 로마 제국에서 얻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몇 해가 되지 아니해서 기독교는 당시 그리스도를 믿는 콘스탄틴 황제에게 의해서 국교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 때부터 전 로마 제국이 신봉하는 유일(唯一)의 종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불행이 로마 제국이 분열되어서, 로마 시를 중심으로 하는 서 로마 제국이 이루어졌고, 콘스탄틴노불을 중심으로 하는 동 로마 제국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정치상 발전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아서, 서 로마 제국의 판도 안에 있는 교회들은 점점 콘스탄틴노불에 있는 대주교가 통치하게끔 된 것입니다.
  그 후 몇 세기를 내려오면서 그 두 교회 사이에 큰 교리 상 차이는 없지마는 대체로는 교권의 충돌로 말미암아서 동편에 있는 교회와 점점 멀어지다가 마지막에 1054년에 불행하게도 동 교회와 서 교회가 완전히 분열된 것입니다. 그래서 11세기부터, 지금으로 말하면, 동편 유럽과 중동지대에 있는 교회를 정통교회 혹은 헬라 정통 교회라고 하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고, 로마 시를 중심으로 하는, 다시 말하면 로마 교회의 다스리는 서 로마 제국 판도 안에 있는 교회를 로마 카톨릭 교회라고 부른 게 된 것입니다.

23.카톨릭의 자취
 
본래 카톨릭(Catholic)이라고 하는 말은 라틴말로‘일반적’이라고 하는 뜻입니다.‘세계적’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따금 쓰는 에큐메니칼이라고 하는 말과 뜻이 대동소이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11세기 까지 내려오는 동안은 부분적으로 인도의 말토마 교회라든지, 애굽의 콥틱 교회든지, 혹은 수리아 교회가 분열되었지마는 기독교 전체는 대체로 이 카톨릭교회라고 하는 이름 아래에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11세기에 동서교회가 분열된 까닭으로 그 다음부터는 서편에 있는 교회만을 로마 카톨릭 교회라고 하는 이름으로 역사상 불리우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유럽은 대체로 이 서 교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배아래 있게 되었는데, 여러 암흑 세기를 지나오면서 불행히 이 서 교회가 많이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신덕(信德)이 없는 사람들이 교황이 되고, 주교가 되고, 혹은 신부가 되며, 심지어 교직을 매매하게끔 되었고, 여러 가지로 부패해 내려오다가 16세기초에 와서는 심지어 사람이 죄 사함을 받는데 속죄 표를 사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이론이 성립되게 되었고 그와 같은 일을 교황청에서 감행하게끔 된 것입니다.

24.루터와 종교개혁
 
본래 마틴 루터는 독일 색슨이라고 하는 지방에서 광부의 아들로서 가난하게 났는데, 그러나 그 때에 신앙의 법대로 경건한 가정에서 났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아주 엄격한 신앙지도를 받았고, 소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서 졸업한 후에는, 그 당시에 흔히 하던 대로 자기의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칠 뜻으로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수도사가 된 얼마 후에, 신부로서 안수를 받으면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가 맡은 과목은 시편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였습니다. 이와 같은 성경과목을 가르치면서 연구하는 동안에 점점 깨닫게 된 것은 당시 교회의 교훈과 행사가 성경의 교훈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끔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 신부는 마음 가운데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로마 교황이 성 베드로(St, Peter)라는 큰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모자라는 돈을 모금하는데 속죄 표를 선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이 청년 루터는 더 침묵을 지킬 수가 없게되었습니다. 그래서 95조의 그릇된 점을 지적하면서 속죄 표 파는 것을 반대했고, 그 당시의 소위 참 회개라고 하는 모든 것에 대한 반대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은혜로 죄 사함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인데 속죄 표를 사서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반대를 하게끔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처음에 비텐베르크 작은 교회에서 시작이 되었지마는 이 소식이 온 유럽에 펴지게 되었고 종교개혁의 불길은 요원의 불과 같이 온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교황은 자기의 정치적 세력을 이용해서 물론 능력으로 탄압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신교들도 부득이 핍박을 받다 못해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소위 종교전이 16세기 와 17세기에 많아졌습니다. 스페인 같은 데서는 종교재판소에서 신교 사상을 가진 사람을 전부 일일이 심사해서 학살한 수가 얼마나 많은지 부지기수입니다.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도 1572년 8월 23일, 성 바돌로매 제일(祭日)때는 갑자기 구교도들이 일어나서 7천명에서 1만에 달하는 많은 신교도들의 생명을 파리에서 학살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30년 전쟁이 일어나서 오랫동안 끌다가 마침내는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에 의해서야 비로소 유럽에서 신교도들이 양심대로 주를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여러분에게 하는 것은 양심대로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얼마나 값비싼 희생이 지불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신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는 것을 감사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서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에서

25.구교 국가의 신교 핍박
 
신앙의 자유를 어떻게 보느냐? 물론 이 20세기에서 구교가 신교를 무력으로 탄압하려는 생각은 안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래도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야 되겠는데 현재 20세기에서도 구교가 절대 다수인 나라에서는 신교가 핍박을 받는 교회가 많습니다. 가령 스페인에서도 현재 받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갔던 남아메리카 방문 국 가운데 콜롬비아와 같은 나라가 특별히 그렇습니다. 그곳은 천주교가 절대 다수이니까 위에 대통령으로부터 순경에 이르기까지 천주교가 정권을 다 잡았습니다. 핍박하려면 얼마든지 핍박합니다. 콜롬비아에 가서 제가 그 소식을 직접 들어보니 과거 20년 동안에 이와 같은 천주교 나라에서 신앙 때문에 순교를 당한 사람이 118명이라고 합니다. 예배당 66곳이 파괴당했다고 합니다. 이 구교 압박으로 폐쇄 당한 학교가 무려 2백 학교나 된다고 합니다.
  먼젓번 피얼스 박사도 교역자 수양회 때 와서 말했지마는 그 자리에서 직접 앉아서 다 적어 가지고 왔습니다. 목사 수양회 때 한 3백 명 모였는데 그 가운데서 구교도 핍박으로 인하여 감옥에 갔던 사람은 손을 들으라고 하니까 62명이나 되었습니다. 자기 예배당 파괴당한 교회가 몇 사람되는지 손들어 보라고 하니까 28명이 들었습니다. 직접 총알에 맞고 매맞은 사람은 몇 사람이냐고 하니까  26명이 손들었습니다. 자기 교인 가운데 순교 당한 그런 교회 목사가 몇 사람이냐고 물어 보니까 24명이 손들었습니다. 이것은 20세기 현재의 사실입니다. 우리 신교가 이런 것을 알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26.귀한 유전 보전
 
과거 4백년 동안에 어떤 나라는 신교로 내려 왔고 어떤 나라는 대체로 구교로 내려온 까닭으로, 신교가 일반 국가에 주는 문화의 영향과 구교가 일반 국가에 주는 영향을 역사적으로 연구해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북아메리카에 있는 미국과 캐나다는 대체로 신교들입니다.  남아메리카는 대체로 구교 나라입니다. 남북 아메리카의 문화의 수준을 비교해 보세요. 유럽을 보면 저 북구와 영국은 다 신교입니다. 그 아래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거이 다 구교입니다. 그 두 나라들은 문화가 어떠한지 여러분께서 연구해 보면 분명히 신교와 구교가 일반 국가와 문화에 주는 영향이 어떤지를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자유를 존귀(尊貴)히 여기는 이러한 민주주의 사상과 미주주의 정치는 신교를 중심한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가만히 볼지라도 이 민주주의 제도가 잘 운영되는 나라는 신교가 절대 다수인 나라에 이 제도가 잘 운영됩니다.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에도 민주주의 제도는 가졌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제든지 독재자가 나타나서 항상 어지럽게 됩니다. 구교도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볼 때 한국에 있어서 신교도의 사명이 얼마나 중대하다고 하는 것을 꼭 깨달아 알아야 되겠습니다. 과연 우리 한국이 앞으로 자유가 있는 건전한 민주주의로 발전하려고 한다면 어떠한 종교가 우리 민족의 머리를 지배해야 되겠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북에서 오신 분이 많습니다. 우리가 아는 우리 나라의 제일 긴 강을 압록강이라고 합니다. 압록강은 백두산 산봉(山峰) 천지라고 하는 못에서 발원됩니다. 그 압록강 물이 천지에서 처음 내려 올 때는 물이 맑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신의주에 오래 살았는데 신의주에서 그 강을 보면 더럽기가 한이 없습니다.
  왜 종교 개혁이 일어났어요? 천지와 같이 원지에 돌아가듯 신약의 본원 지에 돌아가서 맑은 순수한 복음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종교 개혁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귀한 유전을 감사히 생각해서 이 유전을 바로 지키도록 우리가 힘써야 되겠습니다.   
<오직 의인의 믿음으로>에서

27.은혜는 물에 새긴다
 
영국에 유명한 트랜취라고 하는 감독이 있는데 그이가 특별히 예수 님의 이적에 대한 주석을 중심해서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이 분이 이적에 대해서 주석을 써 가다가 이런 구절을 썼습니다.“자기가 살펴보는 대로 모든 은혜가운데 감사할 줄 아는 은혜는 아마 제일  드문 은혜입니다”이런 말을 기록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이것은 옛날부터 우리 동양에 내려오는 속담과도 과히 틀리는 말이 아닙니다.“원수는 돌에 새기지마는 은혜는 물에 새긴다”곧 잊어버린다고 하는 말입니다. 언제나 국가의 충신이 마르고 가정에 효자가 드물고 사회봉사자가 적고 세상에 참된 신자가 적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웅변으로 증명하여 주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이는 많지마는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것을 기억하는 이는 적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가 특별히 주의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감사하지 아니한 문둥병 자 아홉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여 그 모든 은택(恩澤)을 잊지 말지어다”자기의 영혼을 스스로 깨우친 것입니다.
  또 한 사실을 주의해 보세요. 문둥병 자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사람이 은혜를 잊어버렸는데 이상스럽게 전부가 유대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 유대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을 비교해 보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유대 사람이요, 또 은혜를 깨달아 알 만한 사람이 어떤 면으로 보든지 유대사람이올시다. 이 유대사람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올시다. 모세의 율법을 배운 사람들이올시다. 여러 선지자들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이올시다. 매 안식일에 회당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올시다.
 그런데 이 유대인 아홉 사람 전부가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이것도 우연이 아니 줄 압니다. 우리가 한 가지 마음 가운데 꼭 깨달아야할 것은 은혜를 많이 받는 자가  더 잘 잊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부자 집 자녀들과 가나한 집의 자녀들을 비교해 보면 어떤 집 자녀들이 부모의 은혜를 더 잘 아는가? 부모의 혜택을 많이 받은 부자 집 자녀들인가? 그렇지 아니하면 보통 집 자녀들인가? 예외가 있지만 보통으로 하는 말입니다.
  옛날 속담에 외아들이 밥투정을 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왜 예수 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시고, 주님이 온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이사야 1장 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소는 그 주인을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내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아마 은혜를 받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으fp 받을 것이라, 이렇게 생각되는 모양입니다.

28.평범 속의 감사
 
요즘 전기 사정이 좋지 못해 불이 끼지는 때가 많습니다. 어떤 친구가 좋은 등을 준비해서 이런 때 여러분에게 준다고 말하면 그 은혜를 감사히 여길 것입니다. 그 은혜를 항상 잊지 않을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받은 햇빛을 주실 때에 아침마다 해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들이는 분이 몇 분이나 됩니까?
  전에 6·25 때 괴뢰군이 여기 들어온 다음에 우리 교우 몇 분의 도움을 받아서 저도 피난을 갔습니다. 한강을 건너서 시흥으로 해서 수원에까지 갔는데 괴뢰군이 들어온 바로 그 날은 아주 맑고 더웠습니다. 많은 피난민들이 수원 거리에서 남으로  남으로 그냥 밀러 내려갑니다. 저도 무리 가운데 섞여서 내려가는데 얼마쯤 내려가다가 보니까 어떤 긴 옷을 입은 성공회 선교사들 두 사람이 큰 물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놓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물 한 잔씩 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매우 더운 날 땀을 흘리면서 가던 피난민들은 감사의 그 물을 받아 마셨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물 한잔 받아서 마신 생각이 잊어지지 않고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 특별한 한국 같은 데는 물의 축복을 받아서 어디 가든지 몇 자만 파면 맑은 생수를 주시는 이 하나님 앞에 물을 마실 때마다 감사를 들이는 분이 몇이나 됩니까? 저도 사실 그런 경험을 한 다음에는 물을 마실 때도 감사의 기도를 올리느라고 힘을 쓰지마는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중에 하나가 중한 병으로 앓는데 호흡하기가 대단히 괴로울 때에, 어떤 친구가 산소를 한 통 보내서 그 호흡하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하면, 아마 여러분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넉넉한 공기를 주어서 항상 숨쉬며 살면서 숨쉴 때마다 기도를 들입니까? 이것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29.요 임금과 격양가
 
큰 은혜일수록 우리가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작은 은혜는 우리가 어떤 때 기억하지만 큰 은혜일수록 오히려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옛날 글을 보면 요 임금이 어떻게 정치를 잘 하였는지 모든 백성들은 아무 근심 없이 평안히 삽니다. 그 때 백성들이 격양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흙을 치는 노래입니다. 그 격양가의 내용이 "경전이식(耕田而食)하고 청정이음(穿井而飮)하니 제은이 어아( 帝恩而於我)하야 하관언(何關焉)고? “우리가 밭을 가라서 먹고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는데 임금의 은혜가 내게 무슨 상관인고?”이게 격양가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그 때 백성들이 요 임금이 너무 정치를 잘 해서 그저 평안해서 잘 사니까 오히려 노래 부르면서 임금의 은혜가 무슨 상관이냐며 그의 은덕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 많은 사람들은 아홉 명의 문둥이와 같이 참 죄에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은혜를 항상 잊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까?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조심하지 아니하면 이 은혜를 잊어버리기가 쉬운 것입니다.
<은혜를 잊지 말라>에서

30. 승리의 불과 하나님의 불
 
두 가지 일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았을 때에 외부로부터 내려오는 이 거룩한 불을 받아서 내 자신을 깨끗케 하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더러운 그대로 있다가 마지막에 소멸하는 불에 멸망을 당하든지 …여러분 어떤 불을 원하십니까? 불은 최후의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승리의 불이 되고 악한 자에게는 소멸의 불이 되고…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20장 9절에 이 같이 고백했습니다.“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하나님께 대하여 말을 안 하겠다고 생각을 하면 자기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어찌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속에는 불이 탑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로 하여금 예레미야를 만들게 한 것은 그 심령 속에 이 거룩한 불이 붙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9장 16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도 심령 깊은 곳에서 이 불이 붙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왜? 그 속에 불이 타 올라왔습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불을 던지려, 땅에 던지려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1.휘트필드와 웨슬레의 기도
 
영국에 유명한 부흥가 휘트필드는 그 평소의 기도가 “오, 주여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불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불길, 하나님의 화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존 웨슬레는 그 당시의 모든 청년들을 향해서 부르짖는 말씀이“네 영혼에 하나님의 불을 붙여라”여러분, 여러분 영혼에 하나님의 불이 붙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빛납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뜨겁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불이 붙고 있습니까? 혹은 우리의 영혼이 캄캄하고 우리의 영혼이 냉랭하고 우리의 영혼이 쓸쓸한 자리에 있습니까? “네 영혼에 하나님의 불을 붙여라” 이 거룩한 불이 우리의 심령에 붙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심령에 이 거룩한 불이 붙지 아니하면, 여러분, 그 속에 무슨 불이 잇는지 압니까? 탐심의 불, 음욕의 불, 질투의 불이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거룩한 불이 붙지 아니하면 죄악의 불이 붙습니다. “네 영혼에 하나님의 불을 붙여라”
 우리의 심령 속에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나라를 사랑하는 이 사랑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공의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의를 찾자, 옳은 대로하자, 옳은 대로 살자는 의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진리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이 미신이 많고 죄악이 많은 세상 가운데서 진리를 나타내서 생명들을 구하는 진리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거룩한 불>에서
 
32.회계의 경고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는 우리에게 완전한 회개를 재촉하시기 위해서 직접 간접으로 징계를 하시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경고를 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질병을 통해서, 어떤 때에는 환난을 통해서, 어떤 때에는 천재의 지변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경고를 주십니다. 예수 님께서도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서 열 여덟 사람이 갑자기 몰사한 사건을 들어서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는 말씀이“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멸망하리라”하였습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중세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신교회 월텐시안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처음 설립한 사람은 파티 왈도라 하는 분이올시다 이 분이 젊었을 때에 어떤 큰 연회에 초청을 받아서 여러 젊은 사람과 같이 마음껏 호화롭게 놉니다. 그런 가운데 갑자기 그 친구 중 하나가 어떠한 병으로 그 자리에 쓰려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광경이 이 청년 왈도에게는 큰 경고가 되었습니다. 온전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경고를 주십니다. 이런 경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계속해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고 책망하십니다. 분명히 우리가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 비록 오래 참으시지마는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 사람들이 죄악을 오래 참으셨지마는 최후에는 홍수의 심판을 내리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크신 긍휼(矜恤)과 자비로써 소돔과 고모라 성의 사람들의 죄악을 오래 참으셨지마는 최종에는 유황의 심판을 내리신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실 때에 그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우리는 온전한 작정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여호와? 바알?>에서
 
33.스미스 목사의 생일기도
 
캐나다 토론토 시에 가면 거기에 피플스 처치(People's Church, 대중의 교회라고 번역합니다) 라고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가 특별히 알려지게 된 것은 이 교회의 교인수가 약 3천명 모이는 교회인데 이 한 교회에서 세계 각지에 선교사들을 약 350명을 보내고 그들의 생활비를 부담하고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 선교사 350명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교회 목사는 오, 제이, 스미스(O, J, Smith)라고 하는 목사인데 이 분이 지금은 연로하셔서 몇 해전에 은퇴하시고 자기 아들이 이 교회의 목사가 되어서 자기 아버지를 계대(繼代)해서 시무하고 있는 그런 교회입니다. 이 스미스 목사는 저도 만나 본 일이 있지마는 참 은혜가 많은 분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그의 저서 한 권을 읽는 가운데서 자기가 어떻게 은혜 받은 이야기를 간단히 쓴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그것은 여러 해 전에 자기가 젊은 교역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할 떼에 어떤 자가 생일 날 , 특별히 생일날의 염원으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의 제목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시여, 그저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면서 “나는 세상의 돈도 요구하지 아니합니다. 무슨 명예를 요구하지 아니합니다. 세상의 향락은 멀리한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내가 한 가지 소원이 꼭 있는데 이 소원은 이 사람이 비록 부족하지마는 아버지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간절한 기도를 들이면서 그는 어떻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먼저 모시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 님의 말씀과 같이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도록 작정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나로 하여금 옛날 에녹과 같이 언제든지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루만 말고 이틀만 말고 일생토록 몇 시간만 말고 매분 매초 언제든지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슬퍼하실 만한 일은 어떻든지 생각이라도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성결하고 옳은 생활로 나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나로 하여금 일부분만 하나님께 바치지 말고 내가 갖고 있는 대로 백 퍼센트, 제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의 생활을 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그 때부터 그런 결심을 하고 그대로 꼭 살도록 애를 썼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 그 목사의 생일에 드린 기도가 지금 보면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잇습니다. 그는 과연 일생토록 실수 없이 경건한 목회를 하고 그를 통해서 그 교회가 많은 은혜를 받아서 열매를 많이 맺은 것이 사실입니다.
 
34.십의 팔조(八條)를 드리는 실업가
 
이번에 피얼스 박사와 같이 여러분이 왔지마는 빌 존스라고 하는 실업가도 한 사람 따라왔습니다. 이 분이 세계에 다니면서 특별히 실업가나 정계에 유명한 분이나 어린이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이 분의 목적이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반도 호텔에서 여러분을 다 청해서 한번 전도를 했습니다. 이 분이 간증하는 말을 간단히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이 분은 본래 믿는 가정에서 자라나서 주일학교에 좀 다녔지마는 사업 계로 나가면서 주를 멀리했습니다. 여러 가지 죄악에 빠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 가지로 가정에 풍파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잘 믿는 가까운 친구의 충고를 받아서 다시 믿음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자기의 아내도 같이 회개를 하고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의 가정은 새로운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의 사업은 전보다 더욱 축복 받아서 더 잘 됩니다. 처음에는 십일조를 바쳤지마는 지금은 10분의 8을 다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 바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 수입이 매달 20만 달러나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에 뜻에 맞는 교회가 되려고 하면 누구든지 자기 재물을 자기 것으로 알지 아니하고 하나님 것으로 알아서 꼭 하나님의 뜻대로 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영락 교회를 보면 때 따라 요구가 심한 곳에 먼저 봉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 과부가 제일 불쌍하니까 제일 먼저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도 경로원도 경영하고 모자원도 경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나 사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이들을 먼저 도와주는 교회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래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하나님 뜻에 맞는 교회>에서

35.큰 기쁨의 좋은 소식

전에 아테네에 살던 사람들은 항상 새 것을 듣기 좋아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다 뉴스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라디오를 듣고 텔레비전을 보고 들으며 신문을 사서 읽습니다. 그런데 이 뉴스 가운데는 큰 뉴스도 있고 작은 것도 있으며, 좋은 뉴스도 있고 좋지 못한 것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또한 어떤 뉴스는 크기는 크지마는 나쁜 뉴스가 있고 또한 어떤 뉴스는 그렇게 크지는 못하지만 좋은 뉴스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떤 뉴스는 한 사람에게는 크고 좋은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것도 될 수가 잇는 것입니다.
  가령 지난 1945년에 일본이 항복하였다고 하는 뉴스는 우리 한국사람에게는 크고 또한 기쁘고 즐거운 뉴스였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에게 있어서는 크기는 하지만 그렇게 좋은 뉴스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우주가 생긴 이후 이 인류가 지구에 살게 된 이후에 지금까지 제일 큰 뉴스 제일 좋은 뉴스가 무엇인지 생각하여 보셨습니까? 전 인류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가 무엇인지 생각하여 보셨습니까? 자세히 들으세요, 첫 크리스마스 새벽에 이 우주의 최대의 가장 기쁜 뉴스가 전하여 졌습니다. 이 뉴스는 온 백성에게 미칠 전 인류를 위하여 준 뉴스입니다.
  여러분, 그 내용을 알기 원하십니까? 들어보세요, 누가 복음 2장 11절에 주의 사자는 계속하여 말합니다.“오늘날 다윗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천지의 대 주재되시는 하나님이 온 세계 인류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독생자를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보내신 이 사실, 이 얼마나 큰 사건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이 우주의 최대 뉴스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작은 뉴스는 항상 듣지마마는 이 최대의 뉴스를 듣지 못한 분은 우리 가운데 없습니까? 다른 뉴스를 아무리 들었다고 하지마는 이 최대의 뉴스를 듣지 못하였으면 그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아니 불상한 사람입니다.  <0큰 기쁨의 좋은 소식>에서

36.만능 생활의 비결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라하면“나야 무슨 힘이 있어야 하지 못해. 못해.”왜 못합니까? 믿지 않는 까닭으로 못 합니다.“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곡식이 누르러서 거이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안 믿는 세계가 우리 믿는 십자가 군병을 부르고 있습니다. 황폐한 한국이 일군을 부르고 잇습니다. 교회가 봉사할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국가가 참으로 나라를 위해서 싸울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패배주의자 되지 마세요. 주안에서 만능의 인물이 됩시다,

37.크롬웰의 일화
 
청교도 시대에 가장 유명한 지도자 크롬웰이 있었습니다. 영국 역사 가운데서 빛나는 거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의 생활 가운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던 맏아들이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큰 슬픔을 당했습니다. 모든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합니다. 크게 낙심했습니다. 그러던 중 성경을 읽다가 빌립보서 4장을 읽기 시작해서“내가 풍부한데 처할 줄도 알고 내가 비천한데 처할 줄도 알고…”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하기를“나도 이런 비결을 배웠으면 얼마나 좋겠나”하면서 그는 계속 그 절을 읽어 내려갑니다.
  13절에 와서“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을 읽게 될 때에는 크롬웰이 갑자기 일어나면서“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는 오늘 날 나의 그리스도가 아니냐 !,”외쳤습니다.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는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위로부터 간단없이 오는 능력을 받을 때에는 모든 것을 할 수 잇습니다.
  무슨 일을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잇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일에서, 그 환경에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 승리하느냐, 그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주를 의지하는 가운데 만능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이 축복을 우리가 다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만능 생활의 비결>에서
                                
 38.불쌍히 여기는 마음
 
우리는 유명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잘 기억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어떤 사람이 험한 산골짜기에서 불한당을 만나서 많은 매를 맞고 모든 소유를 빼앗기고 중상을 입어 인사불성이 되어서 길가에 쓰려졌습니다.
 마침 레위 사람이 지나갔지마는 그는 그를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제사장이 그 뒤를 이어 지나갔지마는 그도 그 넘어진 사람을 보기만 하고 다른 편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마는 하나님의 사랑은 정녕 알지 못하는 사람이요, 상한 삶을 측은히 여기는 미음이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사람은 아마 당시에 신학적으로 비판해서 그 믿음이 꼭 옳은지 알 수 없지마는 이 사람은 단순히 사마리아의 사상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요, 그렇지만 이 사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 그로 하여금 그 자리에 멈추게 하였고 상한 사람을 자세히 살피게 만들었고 자기의 옷을 찢어서 상처를 싸 매주고 자기의 기름을 부어서 상처를 유화(宥和)롭게 하고 자기가 탔던 나귀에 태워서 주막까지 가도록 만든 것입니다. 환난 중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 마음은 봉사의 중요한 조건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청년시대에 배를 좀 탔습니다. 한 번은 뉴올리언즈 시에 우연히 가서 흑노(黑奴)시장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흑노들의 한 가족이 여기저기로 팔려 가는 그 비참한 광경을 목도한 것입니다. 그때에 그는 동정의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받은 그 인상, 그때에 가졌던 그 동정심은 결국 아브라함 링컨으로 하여금 흑노 해방의 구주로 만든 것입니다.
  동정이라고 하는 뜻을 같이 느낀다고 하는 뜻입니다. 남이 배고플 때에 내가 배고픈 것처럼 느끼는 느낌이올시다. 남이 추울 때에 내가 추운 것처럼 느끼는 그 감정, 다른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내가 당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지는 그 마음, 동정심, 이것 없이 봉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추운 겨울에 방공호에 사는 우리 동포들, 거리에 집 없이 배회하는 불구자들, 병자들, 고아들을 어떤 눈으로 봅니까?

39.협동 정신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은 각각 키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고, 이렇게 낸 것이 의의가 있습니다. 다르다고 싸우라고 내 것이 아닙니다. 다른 가운데서 피차의 장점을 살려서 협조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봉사하고 이 사회에 봉사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봉사 생활을 하려고 하면 이 협조 정신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책을 보니 페르시아라는 나라에서는 이상한 새가 있어서 이 새는 날개가 하나씩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혼자서는 날지 못해요. 그런데 이상한 건 수놈의 바른편에는 갈고리 같은 것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암놈은 왼편에 고리 같은 것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 수놈과 암놈이 짝지어 함께 날 때는 썩 잘나라갑니다. 세상에 혼자 하지 못할 일이 많습니다. 아무리 위대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혼자서만은 할 수 없습니다. 독불장군이란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협조해야 봉사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40.백절불굴의 정신
 
어떤 좋은 일을 할지라도 우리가 하여나갈 때는 난관이 반드시 가로막을 때가 있습니다. 요컨대 이와 같은 난관을 만날 때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극복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여기에 봉사 생활의 성공이 잇느냐, 없느냐가 달린 것입니다. 불퇴전(不退轉), 물려가지 아니하고, 백절불굴의, 백 번 찍어도 넘어지지 아니하는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나아가는 이것이 바로 예수 당시에 네 친구들이 중풍 병자를 참으로 도와줄 수 있었던 정신입니다.
  에디슨이 백열등을 처음 발명할 때에 이렇게 해 보아도 안 되고 저렇게 보아도 안되고 마지막에는 열흘 동안을 자기 집에 도무지 돌아가지 아니하고 실험실에서 자고 먹으면서 계속하여 마지막에 성공하고야 말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칼럼버스가 맨 처음에 인도를 향해서 간다고 대서양을 향해 나갔을 때 한 달쯤 후에는 선원 전부가 배반하려고 했습니다.“아무리 가야 보이지도 않는 것을 뭘 하려고 가는가? 돌아가자”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럼버스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그들을 격려해서 나아간 것입니다. 그 결과만이 그로 하여금 새로운 대륙을 발견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하시고 이 금년 새해에는 우리가 구경꾼 노릇만 하지 맙시다. 이 중풍 병 환자를 그리스도에게 모시고 오는데 아무귀퉁이라도 한 몫 메어서 이 귀한 사명을 우리가 다 같이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잊지 맙시다.
  먼저 철저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믿지 않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모든 환난 중에 잇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협조 정신이 필요합니다. 넷째는 끝까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정력, 충성이 필요합니다.       <봉사 생활의 비결>에서

41.어려움에서 승리한 사람들
 
우리가 잘 아는 존 번연의 생활을 회고하면, 영국에서 청교도들을 핍박하게 될 때에 오히려 복음을 전파한다고 하여. 이 존 번연을 오래 집어넣고 억을 하게 12년 동안이나 옥중에서 썩는 몸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존 번연은 거기서 시간을 낭비한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은혜를 받고 우리가 이는 <천로역정>이라고 하는 성경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읽는다고 하는 불멸의 저서를 써서 감옥 가운데서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서 위대한 창조적 생활을 한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우리 교회에서도 잠깐 와서 이야기했지마는, 지금 일본에 와서 선교사로 있는 사람 가운데 드 셰이저(De Shazer)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2차 대전 때에 미국에서 제일 먼저 동경에 와서 폭격한 두리틀 소장이 지휘한 그 폭격기대로 와서 싸운 한 대원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동경에서 폭격하고는 저 중경으로 가다가 중경까지 가지 못하고 남경 부근에서 부득이 낙하산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일본 사람한데 잡혔습니다. 근 4년 동안 중국 여러 감옥, 마지막에는 일본 감옥에 와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감옥 생활은 헛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감옥에 사는 동안 성경을 읽게 되었고 성경을 읽는 가운데 온전히 회개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간증하는 대로 전에 유년 주일 학교에는 좀 다녔지만 장성해서는 전혀 교회에 나가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죄를 많이 짓던 사람입니다. 그 감옥에서 죄를 회개하고 그리고 제2차 대전이 끝나자 포로 교환에서 나와 결심한 것은 내가 본국에 돌아가서 신학을 마치고 다시 일본에 와서 일본 사람에게 그가 처음에는 폭탄을 내려 던졌지마는 이번에는 복음을 전파해서 구제를 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로 꼭 실행했습니다. 해방된 다음 미국에 돌아가서 공부했습니다 그 다음에 일본의 선교사로 나왔습니다. 선교사로 나와 전도하는 동안 제일 먼저 믿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일본 포격기대를 영도해서 진주만을 1942년에 먼저 폭격한 그 폭격기의 대장으로 있던 후지다(藤田) 대위입니다. 그 사람 역시 예수를 믿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안에 있을 때에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우리는 창조적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에는 역경이나 실패가 문제가 아니요, 질병도 문제가 아니요, 요컨대 이와 같은 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위대한 작품을 만들 수 잇는가 문제입니다.

42.전정(剪定)하는 목적
 
얼마 전에 대광 학교에서 미술 전람회를 하는데 가서 한 번 구경을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좋은 작품들이 있어요. 그 가운데 특별히 제 흥미를 끈 것은 어떤 학생들이 만든 공예품이었는데 목수들이 쓰다 내버린 나무 조각을 가지고 작품 하나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어떤 학생은 철공소에서 공인들이 쓰다 내버린 쇠 조각으로 공예품 하나를 그를 듯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와 같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사람 보기에는 변변치 않은 것, 사람 보기에는 쓸모가 없다고 하는 것, 사람 보기에는 그렇게 자랑할 것이 없는 것, 그런 것들을 가지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오직 우리가 주안에 있을 떼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과일 나무 혹은 사과나 복숭아나무를 기르는 사람은 누구나 겨울에는 전부 가지를 전정(剪定)해주지 않습니까? 다 잘라줍니다. 만일 이 나무들이 우리처럼 감각이 있다고 하면 그 전정을 받을 때 대단히 앞을 것입니다. 이 나무가 전정을 받을 때 아프게 그렇게 많은 가지를 잘라내지마는 그 대신 나무가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불평하지 아니 해요. 그 대신 쓸 때 없는 가지로 정력을 보내지 아니하고 모든 정력을 다 열매에 보냅니다. 그래서 사과 알이 커집니다. 그래서 복숭아 알이 커집니다.
  사실 정정하는 목적은 열매를 크고 아름답게 잘 맺기 위해서 해줍니다. 아마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전정을 더러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환난도 보내시고 시험도 주셔서 이와 같이 전정을 해주십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하시는 줄 압니다.
  언제든지 창조적 생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43.모래알 가시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지마는 진주가 어떻게 되는지 아시지요? 진주도 별것이 아닙니다. 진주 속에는 모래알이 있다고 합니다. 겉만 그렇게 아름답지 속에는 모래가 있다고 합니다. 진주 패라고 하는 조개 속에 어떻게 모래알이 들어갑니다. 지금은 인공적으로 넣어준다고 합니다. 그 보드라운 조갯살에 깔깔한 모래알이 들어갔으니까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러니까 이 조개가 그 깔깔한 것을 이기기 위해서 생명의 즙을 내서 그 모래알을 싸주고 또 싸주고 또 싸주고…, 여러 해 싸주면 점점 큽니다. 이것이 진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 모래알과 같이 사도 바울이 말한 육체의 가시와 같이 깔깔하고 아픈 것을 던져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싸고 또 싸서  우리의 영혼이 진주와 같이 아름다운 영혼을 만들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하시는 줄 생각합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다. 주안에서는 모든 것이 창조의 자료입니다. 주안에서는 모든 것이 찬조의 기회입니다. 서양 속담에“필요는 혹은 곤고(困苦)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는 속담이 있습니다. 요새 직업이 없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직업이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직업을 만들도록 힘을 쓸 때가 된 것입니다.
  제가 어떤 책을 보니까 지금 폐렴을 잘 고치는 페니실린도 본래 곰팡이 가운데서 처음에 발견하고 적출 해 냈다고 합니다. 아무리 곰팡이 같은 죄악 세상에서 사는 사람도 주님께 나오면 귀한 약품이 되어서 다른 사람의 병까지 고쳐줄 수 있는 새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상한 갈대를 고쳐서 아름다운 초적(草笛)피리를 만들어서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을 네게 하는 권능이 우리 주님께는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처 입은 몸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우림 주님 앞에 나와서 내 생명을 맡긴다고 하면 주님께서는 그 상한 생명, 그 상한 생활을 변화해서 하늘의 음악을 나타낼 수 있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를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던지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주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우리도 창조의 생활을 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작년은 어떠했든지 이 새 해야말로 창조의 해를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도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의 생활을 하십시다   <창조의 생활의 비결>에서

44.별과 같이 비치는 사람

사실 우리가 큰 신앙의 기쁨은 이 전도를 통해서 업습니다. 낚시질을 할 때 오래 기다리다가 큰 고기를 낚아 내게 되면 얼마나 기쁠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낚시질에 미친다고 합니다. 그렇게 낚시질에 미쳐서는 곤란하겠지만 사실 우리 신앙 생활 가운데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 내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보스턴의 어떤 건물에 들어가면 담 벽에“이 방에서 본래 디, 엘, 무디(D, L, Moody) 가 회개하였다”하는 그런 글을 붙인 방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킴볼이라고 하는 한 무명 교인이 전도를 할 때에 어떤 구두 방 앞을 지나가다가 그 구두 방 안에 어떤 젊은 양화 직공에게 전도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아무래도 전도하여야겠다는 이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가서 그에게 전도했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 분이 그 후에 디 엘 무디라고 하는 수천 수만 명을 구원해낸 위대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실 내가 전도한 사람이 세례를 받고 내가 전도한 사람이 혹 집사가 되고 내가 전도한 사람이 혹 장로가 되는 기쁨에서 더 큰 기쁨은 없을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서도 여러 가지 기쁨이 있겠지만 제일 큰 기쁨은 내가 전도해서 예수를 믿은 사람이 구원을 얻어서 천당에서 만나게 될 때의 기쁜 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 하늘 나라에 가서 생명의 면류관을 다 받겠지마는 면류관에서 비치는 그 별의 수가, 진주의 수가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합니다
전도를 게을리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를 게을리 하는 것은 신자의 태도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금년에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됩시다. 다니엘 12장 3절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말씀했습니다. 지위가 귀하지마는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닙니다. 돈이 있어야 살지마는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한 사람이 별과 같이 비칠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별과 같이 비치는 사람이 됩시다.    
<사람을 낚는 어부>에서

45. 청년의 할 일

이 동산에서 사상 전선을 고요히 살펴보십니까? 4·19 혁명으로 우리 국민의 자유가 전에 보다 더 많아진 것은 실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죄도 자유의 기회를 더 얻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깡패도 자유를 더 얻었습니다. 사창들도 자유를 더 얻었습니다. 그리고 공산당들도 자유를 더 얻었습니다.
  얼마 전에 심문을 보니까 소련 수상 후르시초프는 공산당 간부들을 모아 놓고 하는 말 가운데 “우리 공산당은 이제는 전쟁을 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가 전쟁하지 이니 하고도 다른 방법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기 까닭이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른 방법이란 두 말할 것 없이 침투 작전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가만히 살펴보니 공산당들이 달콤한, 소위 중립 통일, 평화 통일의 사탕 바른, 겉은 희고 속은 새빨간 마취약으로 우리 민족을 취하게 하는 중입니다. 아무 딴 생각 없는 사람들도 단지 통일을 갈망하는 가운데서 이와 같은 사상에 도취되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새 대통령 케네디가 그 취임 연설에서 마지막으로 미국 국민들에게 부르짖는 말씀이“이 앞으로 여러분은 나라가 여러분을 위하여 무엇을 하겠는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를 물으라”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도 그렇습니다. 우리 국민이 나라에 무엇을 하여 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내가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 가? 내가 나라를 위하여 무슨 공헌을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생각하고 이와 같이 노력해야 우리 나라는 유지되고 건설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멸사봉공의 정신을 넣어 줄자가 누구입니까? 십자가를 따르는 우리 청년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
  학생 사이에 새 생활 운동이 일어나고 국회의원들 사이에 청빈(淸貧)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다 국가를 위해서 경하로운 일입니다. 이러한 때에 빛과 소금으로 자처하는 우리 기독 청년만 어찌하여 잠잠하고 있습니까? 낮술은 그만두고 밤술이나 먹자고 하는 절주(節酒) 운동, 고급 요리 집에 가서 술을 마시지 말고 대포 집에 가서 술을 마시자고 하는 대포운동, 양담배는 빨지 말고 국산 담배를 피우자고 하는 절연 운동도 애국 운동으로 자긍(自矜)하는 이 때에, 왜 철저한 금주 단연(斷煙)의 기치를 높이 들고 사회 혁신의 봉화를 기독 청년들이 일으키지 못합니까?
  “청년들아 일어나라”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를 향하여 부르짖습니다. 이 사회는 십자군의 궐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안 믿는 학생들이 심지어 댄스홀, 바 , 카바레 같은 데를 찾아가서 이래서 되겠는가고 외치는 이러한 때에 죄인을 구원하는 복음을 가진 기독 청년들은 왜 잠잠하고 있습니까? 듣는 대로 종로 뒷거리, 도동, 양동, 이태원 근방의 저녁거리에는 사창, 양 마담들이 우글우글 하고 그 죄악의 함정에 끌려 들어가는 산송장들로 길을 메운다고 하는데 왜 오늘날의 기독 청년들은 그런데 가서 옛날 휘트필드나 윌리암 부스처럼 생명의 복음을 외치지 못합니까?   “청년들아 일어나라 !”오늘 면려(勉勵)주일을 당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외치십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우리 한국 민족 반만년 역사상에 있어서 제일 위대한 시대가 어느 때였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때는 삼국시대요, 삼국시대 중에서도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대입니다. 만주에 가서 사시던 분은 광개토대왕의 기념비가 1천 5백 년이 지난 오늘도 웅장하게 선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 광개토대왕은 18세 나서 왕이 되어 39세에 별세했습니다. 그러나 18세난 제왕이 약 20년 동안에 저 남북 만주(滿洲)를 다 점령하고 남으로 백제까지 내려 와서 진번군을 침범하고 문자 그대로 전 동아를 한 손에 장악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곧 젊은 청년 제왕인 광개토대왕입니다.
  여러분, 광개토대왕시대의 연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연호는 영락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영락 시대라고 합니다. 이 한국 역사상에 있어서 영락 시대야말로 가장 강하던 시대요, 가장 위대하던 시대요, 가장 웅비하던 시대입니다. 여기 앉은 영락교회 청년들은 이 말씀을 뜻 있게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청년들아 일어나라” 이 동산에 할 일이 많습니다. “청년들아 일어나라” 이 동산에 원수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어나는 청년들을 통해서 자기의 경륜을 이 땅에서 이루시고 온 동아와 세계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청년들이여 !”
<청년아 일어나라>에서

46.신앙 생활의 표준

'꿈에라도 죄 안 짓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는 중생(重生)하였다고 하지마는 아직도 중생 한 처음에는 어린 아기입니다. 어린 아기가 장성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매일 매일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다시 살아서 계속해서 장성해서 점점 거룩한 자리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특별히 죄를 멀리하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행실로 죄를 범하는 것은 물론 말로나 생각으로도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혹은 스스로의 의식할 수 있는 의식면만 아니고 속에 깊이 있는 잠재의식 속에까지도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항상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어떻든지 죄를 멀리 하도록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 가서 몇 해 공부하다가 온 천년이 한 번 찾아와서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한 번은 자기가 자동차를 운전해서 어떤 높은 산에 있는 휴양지에 갔다가 그만 너무 피곤했던지 잘못 되어서 자동차가 전복되었습니다. 부상을 당한 이 사람은 그 즉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다른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자기 차에 태워서 어떤 병원에 입원시켜서 사흘 만에야 자기 의식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 병원에서 몇 주일 동안 치료했는데 온전히 나아서 건강을 회복하여 공부를 계속해서 다 마치고 본국에 돌아왔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이 청년은 전에 받지 못하였던 은혜를 흡족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떻든지 자기는 앞으로는 꼭 옳은 신앙생활을 하려고 애쓴다는 그런 말을 하면서 “나는 행실은 말 할 것도 없고 그저 마음으로도 내 생각으로도 죄 안 짓고, 꿈에라도 죄 안 짓게 해 달라고 항상 기도합니다”그만큼 우리가 죄를 멀리하도록 힘써야 되겠습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연약합니다. 이 세상에는 유혹이 많습니다. 때때로 죄를 짓습니다. 내 본이 아니지마는 깨닫지 못할 때 어느새 죄를 범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그런 경우가 되면 우리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옛날 베드로가 자기의 뜻은 아니지마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지마는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자기의 죄를 깨달을 때는 그 자리에서 곧 떠나 밖으로 나가 크게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인수무과(人誰無過)리오, 사람이 누가 허물이 없겠습니까? 허물을 씻고 고치면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라고 죄를 도무지 안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으면 곧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떠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점점 성실한 자리로 향상하도록 힘을 써야 마지막에 온전한 자리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47.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제로의 정신
 
16세기의 제일 유명한 예술가, 건축가요, 화가요, 조각가인 미케란제로를 한 번은 어떤 친구가 찾아가 보니까. 꽃을 꽂기 위해서 자그마한 함을 하나 만드는데 아주 정력을 다해 시간을 많이 들이면서 만들고 있습니다. 구경하던 그 친구가 작은 꽃 함 하나 만들면서 시간을 많이 보낼게 뭐 있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위대한 예술가가 대답하는 말이"그렇지 않다 나사렛의 목수가 만일 이 꽃 함을 만든다고 하면 불완전하게 만들 줄 아는가? 허술하게 만들 줄 아는가? 나도 이 꼴 함을 온전하게 만들겠다" 이 정신이 그로 하여금 그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를 만든 줄 압니다.“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이와 같이 위대한 표준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가 어떠한 자리에서 어떠한 책임을 맡았는지 우리도 언제든지 그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겠다고 하는 이 정신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나사렛의 목수가 작은 함을 만들지라도 불완전하게 만들 것 같습니까? 우리 중 공장에서 일하는 직공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 공장에서 어떤 제품을 만들든지 온전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중 관청에서 일하는 공무원이 있습니까? 공무원으로서 내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는 정신을 가지고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공무원만 아닙니다. 군인은 군대에서 그러해야 되고, 교원은 학교에서 그러해야 되고,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그 자리에서 교회의 직분 된 사람은, 목사는 목사로서, 장로는 장로로서, 집사는 집사로서, 평신도는 평신도로서 내 맡은 책임을 온전히 바로 감당하는 정신을 가지고 우리가 감당해야 되겠습니다.
  지금 부산에 계시는 채필근 목사님이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옛날 그 이가 함경북도 경흥 지방에서 캐나다에서 온 선교사들과 같이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전도하려 다닐 때에, 그 때는 구두가 별로 없고 다 짚신을 신고 다닐 때인데, 신이 떨어져서 짚신을 한 켤래 샀습니다. 본래 짚신이 그렇게 보기 좋은 것은 없지요. 그러나 하루 저녁에 몇 켤래 나 삼은 신인지 헐렁헐렁하고 형편없단 말입니다. 그 것을 한 켤레 사서 이렇게 들고 보는 중에 함께 다니던 선교사가 그 짚신을 가만히 보더니 “그 사람은 짚신을 삼지 않고 자기를 그렇게 삼았소”하더랍니다.

48.독수리 새끼와 병아리 새끼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어떤 깊은 산골에 사는 어떤 농부가 산에 나무하려 갔다가 독수리 알을 하나 얻어서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마침 봄이어서 독수리 알을 병아리 깨우는 닭의 품속에 함께 넣어 놓았습니다. 얼마 후에 병아리와 독수리 새끼가 함께 나왔습니다. 병아리가 크는 틈에서 이 독수리 새끼도 점점 큽니다. 병아리는 날개가 있어도 날아다니지 아니하니까 이 독수리 새끼도 그냥 걸어만 다닙니다. 
  그러다가 어떤 날 낮에 큰어미 독수리가 그 마당 위에 와서 빙빙 돕니다. 병아리들은 무서워서 다 사방으로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독수리 새끼는 이상하게도 무서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 빙빙 도는 독수리를 자꾸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바라보는 가운데 이상한 충동이 올라오면서 자기도 날아볼 생각이 점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날아보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날개가 힘이 있어야지요. 몇 번 푸덕 푸덕하지만 갈 수는 없었습니다. 큰 독수리는 빙빙 한참 돌더니 도로 먼 데로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이 독수리 새끼는 나도 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날개를 너울거리면서 날아가는 것을 자꾸 연습합니다. 매일 매일 조금 더 날고 또 좀더 납니다. 그러다가 열흘쯤 후에 큰어미 독수리가 다시 와서 빙빙 돕니다. 그 다음에는 나도 저렇게 날아보겠다고 날아 올라갑니다. 점점 올라가니까 큰 독수리는 점점 날아서 내려옵니다. 거이 가까이 오는데 그 다음에는 어린 독수리가 힘이 다해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그때에 큰 독수리가 큰 날개를 가지고 내려와서 어린 독수리를 날개에 업고 공중으로 날아 올라갑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의 경험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독수리 새끼가 병아리 가운데 사는 것처럼 이 죄악 세상 가운데 살 지만은 우리는 장차 날아 올라가려고 하는 이 하나님의 큰 경륜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이미 된 것입니다. 우리도 날아 올라가기 위해서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최대의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성결하기 위해서, 사랑하기 위해서, 각 방면으로 덕을 구비하기 위하여 노력합시다. 물론 우리의 노력으로는 되지 아니합니다. 결국 우리의 노력은 실패할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노력을 거듭할 때에 우리의 힘이 부족할 때는 하나님께서 큰 날개로써, 은혜의 날개로써 우리를 업어서 마지막에 신령한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표준>에서

49.푯대를 향하여

우리 나라에서 내려오는 속담 가운데“시작이 절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이 매우 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치는 것은 시작하는 것 보다 더 귀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귀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이루는 것은 더 귀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좋은 일을 시작하는 것이 귀합니다. 그러나 이 시작한 일을 온전히 마치는 것은 더 귀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마치 경주자가 달음박질 마당에서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경주자가 마지막 모든 코스를 다 달음질해서 그 경주를 마쳐야 한다고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마치 경주 자들이 마라돈 코스를 향해서 떠나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라돈 경주를 보면 많은 사람이 시작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끝까지 그 코스를 다 마치는 삶은 많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경주 장에서도 시작하는 사람은 많지마는 끝까지 마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 가 또한 의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보면 달리는 사람에게 주시는 권면이 많습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계속해서 달음질하라고 했습니다. 뒤에 있는 죄, 실패한 것을 기억하지 말고 잊어버리고 뒤에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 앞만 보고 달음질하라고 하는 권면이 있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회개하기 전 자기가 잘못한 죄를 항상 돌아보았던들 그 경주에 큰 장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도 전에 자기가 지은 죄를 그냥 돌아보았다면 앞으로 달리는데 있어서 큰 장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습니다. 뒤에 있는 실패, 뒤에 있는 성공까지도 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마치려는 결심>에서

50 섣달 그믐날 집에 불을 지른 여인
 
지금도 잊지 아니합니다. 서울이나 부산에도 화재가 많지마는 벌서 여러 해 전에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에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신의주 채소 거리에 큰 화재가 일어나서 백여 점포가 하루아침에, 특별히 정월 초하루 명절날 아침에 전부 불타버렸습니다. 조사해 보니까 그 불은 그저 난 것이 아니고 방화였습니다. 어떤 여자가 불질렀습니다.
  그 때부터 10여 년 전에 어떤 촌에서 가난한 청년 부부 두 사람이 농촌에서 소작을 해서는 암만 살래야 늘 밥을 굶게 되니까, 어떻게 도회지로 들어가서 벌이를 해보자고 이사해 왔습니다. 그 채소 거리에 조그마한 방을 얻었습니다. 남자는 지게를 지고 밖에 나가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잇는 일을 다 하고 여자는 그 집에서 조그마한 가게를 만들어 놓고 콩나물과 두부도 팔고 채소와 과일을 파는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안 먹고 안 쓰고 새벽에 일어나고 늦게 자고 그저 아득바득 살기 위해 10여 년 동안을 고생을 하면서 이 여자는 장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점점 장사가 잘 되어서 한 10년쯤 되니까 돈을 상당히 모으게 되었습니다. 이제 좋은 집을 다른데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 남자는 가만 보니까 돈도 좀 있게되니 의복도 잘 입을 생각이 나게 되고 가구도 좀 살 생각이 나게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가만 집에 와보니까 옷도 잘 못 입고 화장도 잘 할 줄 모르고 밤낮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만 아는 이런 여자, 그런 여편네를 볼 생각이 점점 적어진단 말이오. 의복도 깨끗이 입고 화장도 잘 한 이런 여자 얼굴만 자꾸 바라다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딴 여자 하나를 얻었습니다. 자기 아내가 아득바득 번 돈을 가지고 딴 여자를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남편을 책망도 해보고 달래도 보고 별의별 수단을 다해서 남편을 도리 키려고 많은 애를 쓴 줄 압니다. 그러나 이 남편이 돌이키지 아니합니다.
 그 섣달 그믐날 밤에 이 날 밤은 꼭 돌아와 달라고 간절히 눈물로 호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일은 정월 초하루이고 오늘이 섣달 그믐날이니까, 그날 저녁이야 집에 돌아와 지겠지 하고 밤새도록 기다렸다고 합니다. 열시, 자정이 되어도 안 돌아옵니다. 이 여자는 너무 분하고 너무 화가 나서 “이런 세상을 살아서 뭘 해 ! 아예 이놈의 집에다 불이나 놓고 나도 불타 죽겠다”문을 닫아걸고 불을 놓았습니다. 세상은 이런 세상입니다.
흔히 필요할 때에는 찾지마는 필요 없을 때에는 내버리는 세상입니다. 요새 가만 보니까 부모가 자기 아이를 버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불광동에 있는 홀트 영아원에 가보니까 전부 내다버린 어린 아기만 4, 5백 명이 거기 있습니다. 부모가 내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홀트 씨 같은 이가 있어서 어린 아기를 잘 보양해 기릅니다. 거기서 깊이 느낀 것은 부모는 이 아이들을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들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고 홀트 씨의 마음을 감화 감동시켜서 이런 좋은 일을 해서 이 아이들을 기르는 구나 !

51.칼빈주의 신학의 5대 강령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다 장로교인입니다. 칼빈 신학의 유명한 다섯 가지 조목이 있습니다.
    1. 모든 사람은 다 원죄로 말미암아 부패하여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2. 그리하여 더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데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서 구원할 사람을 택하신다
    3. 이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독생자를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대속(代贖)의 제사를 드리게 만드셨다.
    4. 하나님께서 불가항력의 설령을 택한 사람의 마음속에 보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만드셨다( 성령의 감화입니다)
    5. 그런 까닭에 택함을 받은 이 성도는 영원히 보존되며 반드시 하나님께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을 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52.하나님의 약속

로마서 8장을 보십시오.“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끓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 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그러므로 우리도 담대히 말하십시다.“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네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온 세상 다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주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합니다.“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아니 버리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하나님의 약속>에서

53.청년기의 신앙 생활

이 청년 시대의 마음 밭을 다 옥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길가와 같이 굳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무슨 과거의 좋지 못한 습관이나 인습으로 말미암아 굳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편견과 고집의 돌덩이도 별로 없습니다. 세상 재래의 욕심, 모든 허영에 대한 욕심의 가시덤불도 아직 성하지 아니한 때입니다. 양심은 비교적 순결하고 이상은 높습니다. 말하자면 포근포근한 옥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옥토에 진리의 씨가 떨어지면 싹이 잘 나고 그 싹이 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년 시대에 진리의 씨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 청년 시대는 특별히 인간의 영혼이 해탈하는 시대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우리 사람의 육체는 20세가 조금 지나면 그 육체의 장성은 끝이 납니다. 혹 오래 자라는 이는 스물 댓 나기까지 키가 자라지만 보통은 그 전에 키가 자라는 것으로 그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자라기를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영은 계속해서 장성하기를 힘씁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런 시대에는 까닭 모를 번민(煩悶)과 수심(愁心)과 오뇌(懊惱)속에서 소위 폭풍우 시대를 지나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자세히 살펴보면 실상은 인간의 영이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인 것입니다. 그러다가 창조주를 찾아서 인생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될 때에, 자기의 인생과 귀하신 목적을 하나님께 바치게 될 때에 그의 가슴속에는 큰 환희와 만족과 안심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54.종교 심리학자들의 증언
 
종교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신자의 대부분이 이 소년 시대와 청년 시대에 입신하게 된다고 합니다. 즉 신앙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역사를 보아도 요셉은 일찍이 하나님께 몸을 바친 사람이올시다. 사무엘이 역시 그렇습니다. 다윗 역시 그렇습니다. 다니엘이 역시 그렇습니다. 이사야도 모든 선지자들이 대부분 소년 시대와 청년 시대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 그 몸과 마음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역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전 역사를 통해서 다 그러합니다. 유명한 교부 오리겐이든지, 폴리갑이든지, 암부로우스든지, 유명한 성자 성 프랜시스든지 혹은 유명한 종교 개혁가 루터니, 칼빈이니, 혹은 유명한 전도자 무디니, 스펠존이니 이런 모든 사람들이 소년 시대, 청년 시대에 하나님을 찾아 만나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몸과 마음을 바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젊은 시대는 하나님을 만날 만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우리가 찾아야 하겠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러서 그를 만나고 그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일 먼저 기억할 것은 이 청년 시대에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라고 하는 이 사실이올시다.

55.인생의 분수령
 
이 청년시대는 일생의 분기점이 됩니다. 일생의 분수령이 됩니다. 그러므로 꼭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입니다. 일생의 방향을 잡는 때입니다. 방향을 바로 잡으려고 하면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만나야 될 것입니다.
  백두산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분수령이올시다. 백두산 산상에 떨어지는 물방울은 조금만 서편에 떨어지면 압록강수가 되어서 멀리 황해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러나 조금만 동편으로 떨어지면 그 빗방울이 두만강수가 되어서 동편으로 흐르고 흘러서 마지막에는 동해 바다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두 물방울이 처음에는 매우 가까운 지척간에 떨어지지마는 그 방향이 다른 까닭으로 한 시간만 지나면 그 거리가 멀어지고 하루만 지나면 수 백 리 떨어지고 며칠이 지나면 수 천리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빗방울이 분수령에 떨어지게 되는 까닭입니다.
  이렇게 청년 시대는 우리 인간 일생에 분수령이 됩니다. 어떠한 방향으로 가느냐,  그 방향을 정하는 시대입니다. 청년 시대는 인생의 분기점이 됩니다. 어떤 길로 가느냐? 그 길을 정하는 때입니다. 청년 시대에 방향을 잡으면 일생을 옳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년 시대에 방향을 그릇 잡으면 일생을 그르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청년 시대는 일생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의 분기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청년 시대는 일할 시기입니다. 왜 청년 시대에 하나님을 기억해야 될꼬 하니 이 시대야말로 일할 시기인 까닭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혹은 중년기, 노년기에도 큰 일을 시작하기도 하고 수행하기도 하지마는 대부분의 유명한 사람들의 역사를 보면 이런 이들이 청년 시대에 큰 일을 이미 시작했고 또 일생을 통해서 계속하여 온 것입니다.

56. 휘트필드·스펄존·무디
 
18세기 유명한 부흥사 조지 휘트필드라고 하는 사람은 이미 스물 한 살 때에 노방 전도로 유명하게 되어서 각 처 광산으로 다니면서 광부들에게 밖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역시 영국의 유명한 설교사 스펄존이라고 하는 사람은 열 일곱 살 때에 회개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해서 스물 일곱 살 때는 런던에 큰‘메트로플리탄 태버나클(Metropolitan Tabernacle)이라고 하는 예배당을 지어 놓고 그 예배당의 목사로 있은 것입니다. 유명한 미국의 부흥사 디 엘 무디는 스무 살에 YMCA 간사로 있으면서 누구보다도 전도를 열심히 하더니 그 후에 과연 위대한 부흥사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테이버드 리빙스톤 같은 매우 유명한 선교사는 스물 세 살에 혈혈단신으로  흑암(黑暗)의 대륙 아프리카를 향하여 나간 것입니다.

57.칼빈·루터·조지 윌리암스
 
우리 장로교를 처음에 세웠다는 존 칼빈은 스물 일곱 살에 종교 개혁 시대에 가장 유명한 책, 아마 지금까지도 가장 유명한 신학서‘기독교 강요’를 저술해서 출판하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스물 일곱 살에 캐슬 교회의 문 밖에다 종교 개혁 95개조를 걸어 놓고 그때 세력이 하늘을 날아가는 새도 능히 떨어뜨린다고 하는 로마 교황을 대적해서 큰 개혁의 외침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조지 월리암스는 스물 세 살 때에 지금 세계적으로 퍼져서 청년 운동의 선구자가 되어 있는 YMCA를 조직하고 청년 운동을 시작한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것은 교회 일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른 방면의 일도 역시 그렇습니다. 유명한 역사의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생활을 여러분, 읽어보세요 카테지의 유명한 한니발 같은 사람은 스물 여섯 살에 카테이지의 군사령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대제는 스물 세 살에 왕이 되어서 설은 세 살에 죽었는데 그 약 10년간에 전 유럽을 점령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지중해를 건너서 애굽을 점령하고 인도까지 진군을 한 것입니다. 칼럼버스는 스물 여덟 살에 인도에 가려고 하는 모든 준비를 하여 온 유럽을 다니면서 자기를 후원할 자를 찾아다니게 되었습니다. 

58.열 여덟 살에 왕이 된 광개토대왕
 
먼 데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 할 것 없습니다. 우리 한국 역사상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볼 수 있는 고구려 시대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 영락태황(永樂太皇) 이라고도 합니다 - 은 열 여덟 살에 왕이 되어서 서른 아홉 살에 붕(崩) 했는데 20대에 벌서 남북 만주를 다 점령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이 청년 시대에 벌서 큰 일을 시작했습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우리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처음부터 청년 중심 운동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갓 삼십 세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도 30세에 역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 님의 제자 열 둘이 전부 30세 안팎입니다. 사도 바울도 젊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 운동은 근본적으로 청년 세대의 운동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청년 시대에 조물주를 기억하여야 되겠어요? 일 하기 위해서, 청년 시대는 열혈(熱血)시대입니다. 일하기에 제일 좋습니다. 청년 시대는 일편단심의 시대입니다. 무슨 일을 위해서 집중하기 쉬운 것입니다. 재작년에 우리 한국에서 4·19 학생 혁명이 있었고 작년에 5·16군사 혁명이 있었습니다. 물론 청년들이 하는 일이라 혹 무리가 없지 않아 있을 수 있지마는 청년의 운동으로 소망이 많은 줄 생각합니다.
  청년 시대는 일할 만한 시대입니다. 청년 시대에 우리 교회 안에서도 봉사와 전도와 모든 방면에 일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청년 시대는 일 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하는 것을 잊지 아니해야 되겠습니다. 한 가지 계속해서 여러 청년들에게 특별히 말씀하고 싶은 것은 이 청년 시대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내 지나갑니다.

59 인생의 황혼이 오기 전에
 
여러분이 전도서 12장을 보면 기대한 경고가 굉장합니다.“너는 청년 때에 너희 창조자를 기억하라”이렇게 시작하고 2절에 보면“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그러면서 3절에 보세요.“그런 날에는(인생의 황혼이 오게 되면)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손을 가르쳤습니다. 나이 많으면 손이 떱니다)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아마 이것은 척추를 가르친 것 같습니다) 맷돌 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맷돌은 아마 이를 가리킨 것 같습니다) 창들로 내다보는 자들이 어두워질 것이며(창은 눈을 가리킨 것 같습니다)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이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데 길거리 문들이 닫히고 맷돌 소리가 적어지겠다고 하는 거 보니까 귀먹겠다고 하는 소리입니다)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공연히 나이 많으면 새벽에 일어납니다) 음악 하는 여자들은 다 쉬어질 것이며(아마 성대가 다 쇠하여 지겠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 할 것이며(높은 곳을 무서워 못 올라갑니다) 길에서도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이것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배꽃이 피겠다는 말이요, 머리가 하얗게 되겠다는 말입니다)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힘이 없으니까 메뚜기 한 마리가 등에 올라앉아도 대단히 무겁겠단 말이요 !) 원욕(願慾)이 그치리니 이는 이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 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이렇게 되기 전에 조물주를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 <청년 시대와 신앙 생활>에서  

60.노년기의 신앙 생활

우리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부득이 은퇴할 수밖에 없지마는 다른 방법을 찾아서 하나님께서 힘 주시는 대로 창조적 생활을 하여야 됩니다. 특별히 노년 시대에 교회를 돕고 심방을 하든가 전도를 하든가 하는 모교회의 일은 제일 자유롭고 제일 능률 있게 할 만한 봉사입니다.
  작년에 우리교회에 와서 설교한 바 있는 스탠리 존스박사(Dr, Stanley Jones) 는 70이 되었을 때에(그의 나라 법에는 70이면 은퇴합니다) 자기 선교부에 편지를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내가 금년 70이니까 부득이 선교사로는 은퇴합니다. 그러나 내가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로서는 도무지 은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냥 나 혼자 이 앞으로 사방으로 다니면서 전도하겠습니다.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사실 그이가 지금 일흔 댓 되었습니다. 그러나 온 세계에 다니면서 지금까지도 보음을 전파합니다.

61.소크라테스의 노년기
 
사실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같은 이는 나이 많을 때에 새 악기를 배워서 음악을 했다고 합니다. 고대의 유명한 정치가 케토 같은 사람은 여든 다섯에 헬라 말을 배웠다고 합니다. 여기 이탈리아의 문예부흥시대의 유명한 학자 피토락 같은 사람은 일흔 살 때에 라틴어를 처음으로 배웠다고 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김성무 권사 님은 회갑 지나서 신학을 졸업했습니다. 우리교회 김성준 장로님은 환갑 지난 지 4, 5년 되었는데 금년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나이 많을지라도 계속해서 새 것을 배워야 됩니다. 여러 천년들과 접촉해야 됩니다. 청년들의 꿈과 이상에 감화를 받아야 됩니다. 나이 많아도 계속하여 배우세요.

62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
 
제일 중요한 것이 물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 점점 많아지면 육체도 쇠약하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런 말씀으로 권면(勸勉)했습니다.“겉 사람은 부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롭도록 힘쓰라”고. 이렇게 하려고 하면 특별히 여기에 대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시편 71편9절에 보면“나를 늙을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떠나지 마소서”이렇게 우리도 기도하십시다. 의로운 길을 가야만 합니다. 잠언 16장 31절에“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의로운 길로 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너무 염려하지 맙시다.
  이사야 46장 4절에 이런 약속이 있습니다.“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백발이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품어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이 많아진다고 너무 염려하지 맙시다.
 
63 타고르의 말
 
인도의 유명한 시성 타고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나는 점점 나이가 많아 가므로 내가 젓는 노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제는 돛대를 높이 달고 바람을 의지하노라”그래야 됩니다. 나이가 점점 많아감으로 내 육체가 쇠약해서 간다고 한탄하지 말고 내 노력을 너무 의지하지 말고, 믿음의 돛대를 높이 달고 하나님께서 바람을 주시는 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것입니다.
  육신의 눈이 어두워질 때에 신령한 눈이 밝아집니다. 하늘 나라를 보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젊을 때에 게시를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이 많을 때에 밧모 섬에 가서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될 때에 하늘 나라의 영광이 그 눈앞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축복은 누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다 허락된 축복입니다. 기억하세요. 나뭇잎은 떨어질 때에 제일 아름답습니다. 과실은 가을에 다 익을 때에 제일 아름답습니다. 곡식도 거두게 될 때에 제일 아름답습니다. 햇빛도 서산 낙조가 제일 아름답습니다. 노년 시대는 인격과 믿음이 완숙하고 아름다워질 때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고, 진실하고, 원만하고, 이해성이 많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기를 때입니다.         <노년기와 신앙 생활>에서
 
64. 회개와 사죄

주후 2-3 세기에 교회를 소란하게 하던 영지주의자(노스티시즘<Gnosticism>이라고 합니다) 등은 주장하기를,“사람이란 영과 육이 합해서 사람이 되었는데 육은 물질이요, 영은 선하지마는 물질은 악해, 그러니까 내가 죄를 지었지마는 이것은 육신이 지었어! 이것은 육신의 책임이지 내 책임은 아니다”이렇게 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요사이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지은 후에 여러 가지 다른 데로 책임을 돌립니다. 어떤 때는 이것을 유전의 책임이다, 나는 유전이 나빠서 이런 죄를 짓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기 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환경의 책임이라고 합니다.“내 처지가, 그저 내 입장이 내 죄를 짓게 만들었어! 나에게 책임이 있나!”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에다 돌립니다. 국가에다“ 나사는 사회가 나를 꼭 이렇게 만들었다! 사회가 책임이 있고 국가가 책임 있지 나는 죄 없다”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신문지상에서도 굉장히 떠들어 잘 알지만 유대 사람 6백만이나 학살한 아이히만 같은 사람, 이스라엘 법정에 서서도 당당히 주장했습니다.“내가 죽이기는 하였지만 그야 내 책임인가? 나치스의 책임이지. 나야 죄가 있나? 죄 없다”이렇게 사람들은 사특(邪慝)한 지혜를 써서 죄를 짓고도 죄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것으로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이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아담아, 어찌하여 네가 이 금과를 먹었느냐?”곧 대답하는 말이“여호와께서 주신 그 여자가 그것을 나에게 주므로 내가 먹었습니다,”여자를 만나서“어찌하여 네가 그 금과를 주었느냐?”여자에게 책임을 추궁했습니다. 여자는 이에 대답하는 말이“그건 제가 그렇게 했나 요,? 뱀이 나를 꾀어서 그렇게 하였지요”저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죄라고 하는 것은 별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이 진화되기 전에 가졌던 습성이다. 그 것이 무슨 죄가 되나?”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 가운데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65.펠라기오의 잘못
 
주후 4세기 어거스틴 때에 영국 신학자 펠라기오(Pelagius)라고 하는 사람은“사람이 자기가 짓는 죄는 있지마는 원죄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 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자기네가 율법을 잘 지키고 의식을 온전히 지킨 까닭으로 자기들에게 죄가 없는 줄 생각했습니다. 독선주의에 빠져서 남의 죄는 보고 자기의 죄는 보지 못했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그릇된 신비주의자들 가운데, 혹은 사교도(邪敎徒)들 가운데“나는 벌서 온전한 사람이 되었는데 무슨 죄가 있나?”그래서 어떤 사람은“나는 예수다! 나는 새 주다”혹은 자기는 무슨 감람나무라고 하여 죄 없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내가 이북에서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런 그릇된 신비주의에 젖어서“우리는 다 온전히 중생하고 이제는 온전해 졌고 죄 하나도 없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남녀 신도가 다 한방에서 동숙해도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합니다.“누구든지 죄 없다고 하면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속이는 것 뿐이라”고 남이 속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손바닥 같이 분명히 내려다보십니다.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은 마치 매에 쫓긴 꿩이 쫓기다 숲 속에 머리를 박고서 몸통과 깃은 다 내어놓고 저 혼자 숨은 줄 알고 자기는 숨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속이는 것 분입니다.

66.스펄존의 회개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스펄존(Spurgeon) 목사는 일찍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우리가 어떤 때에 나는 참 죄인이다, 나는 참 나쁘다, 나는 악하다,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기억하여라? 당신은 그것 보다 더 악하다고 하는 사실을”사실 우리가 어떤 때에는 나는 죄인이다라고 내 죄를 깨닫고 부끄럽게 알고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을 보실 때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보다 더 악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67.흉악한 벌레 같은 죄인
 
미국의 초대 역사의 유명한 인물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라고 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 초대학장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이의 설교 가운데“흉악한 벌레 같은 죄인”이란 말을 썼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후에 비평을 했습니다.‘아 그 너무 과한 말을 썼다’고
  그러나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빛이 십니다 하나님 앞에는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날 적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사상을 다 알고 있습니다. 손바닥 같이 보고 게십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우리가 앉았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려다보실 때에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생각, 보는 상상, 모든 공상, 모든 망상, 야심, 음욕, 허영심, 공명심, 교만, 시기, 욕심, 이것이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타날 터이니 사람처럼 흉악한 벌레가 어디 있겠어요? 흉악한 벌레 이상으로 흉악한 것이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68.디 엘 무디의 일화
 
미국의 유명한 부흥가 디 엘 무디라고 하는 사람이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가 어떤 곳에서 부흥회를 가졌는데 하루 저녁 설교를 마치고 자기 집에 돌아왔습니다. 어떤 청년이 찾아와서 자기를 보기를 원해요. 어떻게 찾아왔느냐고 물어보니 그 청년은 “저는 어떤 회사에서 회계 일을 보는 사람입니다. 제가 그 재무를 보는 가운데 그만 큰 시험에 들어서 주인의 돈 1,500달러를 훔쳤습니다. 오늘 저녁  말씀을 듣고 제가 꼭 이 죄를 회개하여야 되겠는데 1,500백 달러를 훔쳐서 얼마는 쓰고 지금은 950달라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있으면 제가 다 가지다 드리겠는데 950달러밖에 없으니 이것 가져다 드릴 수가 없고, 그래서 제 생각은 이것을 가지고 좀 몰래 장사를 해서 이를 남겨서 1,500달러가 된 다음에 이것을 완전히 주인에게 갚으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이렇게 의논을 합니다.
  그 때 무디 선생 하는 말이“그저 그 생각도 할 수 있기는 하지마는 내 생각에는 그 도적질한 돈으로 장사를 해야 그 장사가 잘 안 될 것 같애 ! 그러니까 그 남은 것이라도 갚을 수 잇는 대로 우선 갚아 들이세요. 그러면 아마 그 주인이 용서해 줄 것입니다.”그러니까 그의 하는 말이“아, 저는 부끄러워서 감이 갈 수 없으니 무디 선생님, 저와 같이 가주십시오”
 그래서 이튿날 그이와 같이 회사 주인을 찾았다고 합니다. 가서 무디 선생은 먼저 들어가서 그 사정 이야기를 다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 듣더니 그 주인이“아, 나는 그이가 그런 일을 한 것은 전연 몰랐었다”고.“그러나 이번에 그이가 회개하는 말을 들을 때에 참 내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며“뭐 그 950달러 있으면 그냥 가져오면 내가 다 용서해 주겠다”그 다음에 그 청년을 청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셋이 같이 앉아 기도를 하고 온전히 주인은 그 청년을 용서 해주고 그 다음부터 그 청년은 옳은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69.회개와 보상
 
참 회개에는 할 수만 있으면 보상이 따릅니다. 제 교역 생활에 있어서도 이북에 있을 때에 또는 이남에 있을 때에 여러 청년들이 와서 자기가 이와 같이 남의 것, 남의 물건 안 가질 것을 가졌다고 저에게 와서 자복(自服)을 하면서 도로 돌려준 경우가 많습니다. 안 가질 돈을 썼더라도 그 돈을 도로 찾아준 예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관청의 공무원으로 있는데 다른 사람이 다 받았으니까는 뇌물을 다 같이 받았다가 그후에 양심이 너무 무거워서 다시 돌려주려고 하니까는 그 사람을 찾을 수도 없고 그러니 내가 이 돈을 연보를 하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이런 무제를 가지고 와서 의논한 청년들도 있습니다. 참 회개에는 할 수만 있으면 봉사하는 것이 참 회개의 열매입니다.
 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70.술 두 병을 훔친 여인의 괴로움
 
전에 어떤 여자가 어려서 남의 집에 식모 노릇을 합니다. 아마 그때 그 주인집이 안 믿는 집이었던 모양입니다. 술 두 병을 훔쳤습니다. 그 후 이 여자는 장성해서 출가한 후에 아들 딸 낳고 잘 삽니다. 또 그후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죄를 다 자복하고 옳은 생활을 꼭 하려고 하는데 항상 이 여자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니 언제나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그 술 두 병이 떡 나타나곤 합니다. 하나님께 고백은 하였지만 그 술 두 병은 그냥 있거든요. 아,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생각하다 못해 목사와 의논을 하고서 그거 별 수 없으니 그런 경우에는 그 술 두 병 아주 갖다 주라고. 아 가져다주려니 그 집주인 할아버지 할머니다 세상을 떠나고 없단 말이요. 그 자손들만 사는 집에 가서 그런 이야기를 다 하고 술 두 병을 도로 갖다 주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이야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이렇게 보상할 수 있는 경우면 보상하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에 심히 마음이 무거운 것은 어떤 죄는 보상할래 야 보상할 수 없는 죄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다음에 그 명예를 어떻게 다시 온전히 회복해 줄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71.젊은 여 성도의 회개
 
바로 몇 달 전에 어떤 여자 청년이 예배 필한 다음에 저를 보자고 했습니다. 그 여자의 사정을 들으니까 어떤 회사에 근무하는 여자입니다. 그 집은 잘 믿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그 회사에 책임자로 있는 사람이 큰 시험에 빠졌습니다. 이 여자를 그르쳤습니다. 마음가운데 무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그가 아무래도 이 자리에 꼭 떠나고 새로운 생활을 하여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말했습니다. 곧 그 자리를 떠나도록 기도를 하고 그 상대자도 내가 만나고 그 사람에게 꼭 회개하도록 권면을 했습니다.

72.톨스토이의 《부활》
 
톨스토이의 유명한 《부활》이라고 하는 소설을 기억하실 줄 압니다 청년 귀족이 자기 정욕을 만족하기 위해서 철없는 여자를 그르쳤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 여자는 그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타락하고 타락해서 윤락 여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큰 죄에 빠지고 또 빠졌습니다.
  그 후에 이 청년이 알고 보니 몇 해 전에 자기가 그르친 여자올시다. 이 여자를 다시 회복해서 좋은 여자를 만들기 위하여 이 청년이 온갖 수고를 다 합니다. 그러나 일생을 그르친 그것을 다시 보상해 줄 수 없어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나의 일생을 그르쳐 준 죄를 무엇으로 보상합니까?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 가서 전도한 동기가운데 하나는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내가 이 보상의 하나로서, 백인의 하나로서 나아가서 이 사람들에게 참으로 봉사하겠다는 그 정신이 있습니다.

73.마음속의 큰 기쁨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가 개인으로 보상할 수 없으니 사회적으로 봉사하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의 죄를 깊이 참회하는 가운데 자기의 일생을 어떤 공공 사업이나 자선 사업이나 문둥병 자를 위하여, 걸인들을 위해서 일생을 바쳐서 참회의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회개에는 이 보상이 따릅니다. 먼저 죄를 깨닫고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이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남겨진 손해를 할 수 있는 대로 보상할 때 그것이 참 회개입니다. 그는 “미쁘셔서”약속대로 지킵니다. 예수 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이에게 약속대로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시편 32편을 기록한 기자는 이런 자기의 체험을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衰)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니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야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였나이다”그리고 끝에“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큰 기쁨이 올 것입니다.      <회개와 사죄>에서

74.성도의 유일한 자랑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수 된 것을 멸하고 화목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사실 그 십자가의 수직선은 높은 하늘에서 땅 끝까지 미쳐서 죄는 사함이 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그 십자가의 횡선은 인간괴 인간이 다시 화목하게 되고 인간 사이에 참된 화평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그러나 오직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결단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75.독일 어느 예배당의 어린 양
 
제가 들으니 독일의 어느 예배당 정문 위에는 조그마한 어린양을 돌에다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배후에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 예배당 지붕이 좀 상해서 고치기 위해서 일꾼이 올라가서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만 일을 하다가 일꾼 가운데 하나가 발을 헛디뎌서 그 높은 지붕에서 떨러졌다고 합니다. 그 예배당 옆에는 풀밭이 있었는데 거기 마침 양 때가 있어서 풀을 먹고 있었다고 합니다. 떨어진다는 것이 어린 야의 위에 떨어져서  그 양은 눌려 죽었습니다. 그 대신 일꾼은 살았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께서 어린양과 같이 우리 대신 죽음으로 우리 인간을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76.모세와 불 뱀
  
모세가 한 번은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서 죽는 사람이 많을 때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높이 장대 끝에 달아서 누구든지 그 구리 뱀을 바라보는 사람은 비록 불 뱀에 물렸지마는 죽지 않고 살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구리 뱀과 같이 높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가운데서 바라보는 가운데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옛날로부터 오늘날까지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오직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가운데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사실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도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가운데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섬 프랜시스 같은 이도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신령한 은혜를 받고 죄 사함을 체험을 얻은 것입니다.

77.모라비아 교회 창시자
 
모라비아 교회를 처음에 설립하고 온 세계, 우리 신교도 가운데 제일 먼저 세계 선교의 봉화를 든 진젠돌프 같은 사람도 자신이 젊었을 때에 어떤 미술관에 들어가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큰 은혜를 받고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바치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금 도덕 재무장회로 전략이 되어서 좀 섭섭하지만 옥스퍼드 운동이라고 처음에 많은 좋은 일을 한 운동이 있습니다. 이 운동을 처음에 일으킨 프랭크 북한, 그 사람도 십자가를 신령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자기의 교만을 깨닫게 되어 온전히 죄 사함을 얻고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을 우리가 다 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78.성 프랜시스의 손의 못 자국
 
우리는 이 렌트 기간에 특별히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십자가를 묵상합시다. 성 프랜시스는 십자가를 얼마나 묵상하였는지 그 손바닥에 못 자국이 생겼다고 하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우리도 자랑합시다.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높이 들 것은 십자가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암흑의 세상에 광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이 불안과 공포의 세상 가운데서 마음의 안심과 평화를 얻을 곳은 오직 십자가 앞에 나아갈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 환난과 고통과 죄악과 절망에서 헤매 이는 모든 인류에게 우리 위로 십자가를 높이 들어서 모든 인류들로 하여금 이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우리 소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재생의 길이 있습니다. 여기에 새 사람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험악하고 나의 과거가 아무리 추악하지마는 십자가 앞에 나오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79.밀턴의 명언
 
존 밀턴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의 영혼의 존귀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까닭이요,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까닭이다” <성도의 유일한 자랑>에서

80.어느 성도의 유언

우리 교우 중에 잘 믿는 어떤 자매 한 분이 장사 차 멀리 갔다가 그만 임산기(臨産期)가 되어서 그 곳에서 해산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일이 있습니다. 이 분은 잘 믿는 분으로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스스로 깨달은 다음에는 같이 갔던 자기 남편을 위로하면서 “나는 이제 오래지 아니해서 주님 계신 데로 갈 터인데 나를 위해서 조금도 염려하지 마세요”라고 오히려 남편을 위로하면서“내가 십일조를 드리던 것이 어디 있는데 그것을 교회에 가져다 드리고 또 여전도 회비를 내가 어디에 마련해 둔 것이 있는데 그것도 꼭 여전도회에 가져다 바쳐 주세요”
 그 때에 이 부인이 어린애가 일곱이 있었습니다. 여섯이 딸이고 하나가 아들입니다. 일곱 살쯤 아들이 있는데 그 남편보고 이 아들은 잘 길러서 이 다음에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하고 또 자기 육체는 세상 떠난 다음에 영락 묘지에(강원도 외지에서 별세) 좀 불편하지만 옮겨서 꼭 묻어달라고 그런 유언을 하고 고이 잠자듯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사망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고 찬송가를 부릅니다.“요단강 건너가 떠나리”이렇게 안 부릅니다. 왜 그런고 하니 믿는 사람에게는 사망도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을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간 성도를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의 사망도 끓을 수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81.죄의 고백과 그 축복
 
여러분, 이미도 말했지만 다윗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다윗은 어렸을 적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큰 범죄를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도 큰 유혹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전감(前鑑)이 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믿었든지, 우리가 얼마나 신앙생활을 하였든지 조심하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어떻게 하여서 시험에 들었다고 하면 우리가 이 죄를 가리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이 죄를 덮으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곧 그 자리에서 깨달아 아는 대로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솔직히 자복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죄는 값이 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를 범한 다음에 값이 없는 줄 스스로 속지 맙시다. 물론 무신론자들은 죄를 부인합니다

82. <주홍글씨》와《세조대왕》
 
지금부터 약 30년 전에 전 세계적으로 극단의 자유주의 사상이 팽배해질 때에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에도 죄를 경히 여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심리학자 프로이드를 비롯해서 많은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심리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육체의 모든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기 시작하는 가운데, 그들이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은 많은 육체의 질병과 여러 가지 정신적 이상이 어떤 때에는 자기도 모르는 내적 분열과 내적 충돌에 의해서 여러 가지 육체의 질병과 여러 가지 심리적 고장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갓입니다.
  내적 분열, 내적 충돌은 결국은 어디서 원인이 되는 줄 압니까? 속에 죄가 깊이 묻혀 있을 때에, 결국은 속에서 분열이 생기고 내적 충돌이 생깁니다.
어떤 때에는 자기 자신도 잊어버려서 그 죄를 잊어버리지마는 사람의 심령 속에는 죄를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고통이 생깁니다. 번민이 생깁니다. 오뇌가 생깁니다. 유명한 소설 토스토에프스키《죄와 벌》을 읽어보십시요. 미국의 유명한 소설, 호오돈(Nathaniel Hawthorne)이 지은 <주홍글씨> (The Scarlet Letter) 라고 하는 소설을 읽어보세요. 혹은 우리 한국의 소설 가운데 춘원 (春園) 선생의 <세조대왕>(世祖大王)을 읽어보세요.
  죄에는 값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다음에 피할 수 없습니다. 값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지은 다음에는 솔직히 하나님 앞과 또한 부득이 어떠한 경우에는 사람 앞에서라도 온전히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죄의 고백과 그 축복>에서

83.모르켄 박사의 강연에서
 
이번에 버어마에 가서 같이 수양회를 인도할 때에 홍콩에서 일하는 모르켄(David E. Morken) 박사라고 하는 분도 같이 와서 수양회를 인도했는데 그이가 그 때 목사들한테 강연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 오스트레일리아에 어떤 젊은 여자가 불행히 소녀 때에 중한 병을 만나서 그만 처음에 두 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그 다음에는 불행히 이 병이 손으로 올라와서 부득이 두 팔을 자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여자는 그와 같은 가운데서 믿음이 더욱 독실해지고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남의 봉사를 받고 사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팔을 자르고 조금 남은 데에다가 만년필을 붙들어 매고 글쓰기를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자르고 남은 데를 붙들어 매고 글을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글쓰기를 배운 다음에 이 분이 드러누워서도 편지를 쓰는데, 자기가 전에 안면이 좀 있는 이들 가운데 별로 믿음이 없고 교회에 잘 나오지 아니하는 이런 친구들에게 간절하게 자기의 믿음을 증거하고 전도하는 편지를 쓰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가만히 드러누워서 편지를 일년에도 여러 수백 수천 장을 씁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누워서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하면 어떤 방면으로든지 하나님께 봉사하고 기쁜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에서
                                       
84.둘째 되는 큰 계명

제가 지금부터 근 30년 전에 청년 전도사로 신의주 제2교회에서 일 볼 때에 우리 가운데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곽산에 김진근 목사님이라고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한 번 신의주에 들어오셔서 저하고 조용히 함께 이야기할 때에 자기 경험담을 이야기해 준 그 말씀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습니다.

85.두 목사 이야기
 
다른 이야기가 아니고 김 목사님이 그 때에 신학을 다 마치고 노회에서 이제 목사 장립(將立)을 받기 위해서 시취(試取)를 하는데 그 때 노회에서 시취하는 법은 무슨 시취 위원이 따로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노회 앞에서 아무나 이 사람도 묻고 저 사람도 묻고 그저 물어서 대답을 잘해야 그 다음에 목사 장립을 시키든 때라고 합니다. 그저 그렇게 시취를 자기와 어떤 다른 분하고 두 분이 받았습니다. 아 그래서 묻는 말을 자기 생각에는 무던히 애써 다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여러 목사님들의 태도를 보니까 한국 목사들의 태도는 아 그저 뭐 목사 장립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분위기가 거이 그저 될 듯하더니 아 마지막에 어떤 선교사 하나가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고 하니 “거 나 보기에는 이 사람들이 아직까지 목사 장립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줄 생각합니다”하면서 반대를 합니다.
  아 그러니까 그 때는 특별히 선교사의 발언은 소중히 생각되든 때인데 여러 한국 목사 장로들이 대체로 다 될 줄 이렇게 공기가 돌아가더니 아, 아, 이 선교사의 말 한 마디에 공기가 갑자기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는“한 노회 기간동안 연기하기를 동의합니다.”“재청합니다”이렇게 되니까 그만 목사 장립을 못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고 이제 자기 숙소로 돌아오게 되니까 가만히 자기 마음속에 분한 생각이 났단 말입니다. “아니 선교사로 와서 복음이나 전할 것이지 남의 목사 장립하는 데까지 참견할 것이 무엇 있나?”
그러나 얼마 후에 그날 저녁 이 일을 가만히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생각을 해보니까,“그 선교사와 나와 무슨 개인적인 감정은 조금도 없는데 그가 그와 같이 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는 경험 많은 선교사인데 내가 아직까지도 좀 부족한 점이 있기에 한 동안 기다리라고 하겠지. 그것은 나를 미워한다 든 가 무슨 다른 생각으로 그런 것이 아닐 것 아닌가”이렇게 생각하여 양해가 되었고, 그리고“그 선교사가 내게 불리한 말을 했지마는 나는 이 노한 마음 분한 마음을 오래 품지 않겠다”하고 그것을 양해를 했단 말입니다. 그랬는데 그 때 똑 같은 일을 당한 다른 한 분은 그 양해가 도무지 되지 않았습니다. 한 달 후에 만났는데도 그 때도 아직까지 분한 마음을 품고“에이! 그 선교사, 그놈! 아, 그저 그 분한 마음을 풀지 못하고 그냥 오래 기지고 있더라고 말했습니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지마는 하여간 그 후에 그 다른 분은 결국은 교회 일을 보지 않게 되었더랍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좌우간 우리가 무슨 일로 분한 마음이 들든지 그때 분한 마음을 풀지 아니하고 오래 두면 손해는 결국 내가 본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서 떠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내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 태도입니다. 내가 내 형제의 죄를 용서 해 주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도 용서해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용서하면 내가 다른 사람도 용서해야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시기하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언제든지 시기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부족한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86.현미경과 망원경
 
어떤 사람이 시기는 현미경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 같은 것도 보통 눈으로 보면 맑지마는 현미경으로는 암만 맑은 물이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는 더러운 벌레도 많고 그 외에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이 많습니다. 시기의 눈으로 사람을 보면 암만 좋은 사람이라도 여러 가지 결점이 많이 나타난다 하는 그 말입니다.
  그 대신 사랑은 망원경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방금 저 사람이 좀 부족한 것이 있지마는 이 앞에는 대단히 좋은 사람으로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사람은 멀리서 보아야 합니다. 내가 내 자신을 사랑으로 본다고 하면 내가 다른 이웃도 사랑으로 보아야 하는 말이올시다
  이것은 소극적으로 하는 말이지마는 적극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우선 우리 자신을 얼마나 귀하게 여깁니까?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이내 물 가져다 마시고 추우면 이내 외투 가져다가 입히고 더우면 부채질하고 피곤하면 이내 자리에 누어서 쉬고, 또한 병이 나면 이내 약 가져다 먹고, 혹 다른 사람에게 오해받으면 변명하느라고 분주히 돌아다닙니다.
  자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가 그러합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고 하는 말은 내 자신을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내 이웃도 소중히 여겨라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다시 말하면 내 자신을 보호하고 보양하고 평안하게 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내 이웃의 명예나 생명이나 재산을 보존하도록 최선을 다하라 하는 그 말이올시다. <둘째 되는 큰 계명>에서

87.영혼의 닻

배에는 꼭 있어야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닻입니다. 큰 파도가 일어날 때에 이 닻이 깊은 바다 밑에 박혀있어야 배가 밀리지 아니하고 파선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고해와 같은 세상을 지나가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꼭 있어야 할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소망이올시다. 소망은 닻과 같다고 그래서 옛날부터 닻은 소망의 한 상징으로 사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올시다. 오늘 이 시간, 이 영혼의  닻을 생각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88.닻과 소망
 
배마다 닻이 있습니다. 작은 배는 작은 닻, 큰배는 큰 닻이 있습니다. 물론 한강에 떠 잇는 노름 배 같은 것은 닻이 없을 줄 생각합니다. 사실 인생은 노름 배는 아닙니다. 아무리 작다고 할지라도 작아도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배라고 한다면 거기는 반드시 닻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바다를 반드시 건너야 하는 배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 소망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매일 일하고 사는 것은 소망이 있기에 그러합니다. 학생은 소망으로 공부를 합니다. 농부는 소망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상인은 소망으로 상업을 경영합니다. 실업가는 소망으로 공장을 경영합니다. 부모는 소망을 기지고 자녀를 기릅니다. 사실 모든 활동, 모든 사업의 배후에는 이 소망이 잠재합니다. 모든 노력의 배후에는 이 소망이 있습니다. 특별히 어려울지라도 인내하여 무슨 일을 계속하는 그 배후에는 반드시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인간적인 소망에 있어서는 설사 이런 소망들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우리가 본래 기대하던 것처럼 만족은 없습니다. 바로 여기 어떤 실업가가 새로 사업을 하면서 그가 꼭 이 사업에 성공을 하고 돈을 많이 벌겠다며 자지 아니하고 열심히 일하고 생각하며 많은 수고를 합니다. 그런 이들 가운데 성공 못하는 이들도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래도 성공한 이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그저 사업만 성공하고 돈만 모으면 천하를 얻은 것처럼 생각하지마는 정작 사업에 성공해 놓고 보면 또는 돈도 모아 놓고 보면 기대하던 것처럼 만족은 없습니다. 오히려 돈이 많으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가 많이 닥칩니다. 시기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돈을 내라고 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여러 가지 변태(變態)무쌍(無雙)한 사회는 항상 공포를 가져옵니다. 설사 사업에 성공하고 돈을 모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환멸의 비애를 느낄 수 있습니다.

89.이스트맨의 성공과 자살
 
여러분, 요사이 웬만한 젊은 사람은 다 사진기 하나씩 가지고 다닙니다. 아마 그 사진기 가운데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마는 아마 이스트맨 코닥(Eastman Kodak)이 제일 많을 것입니다. 이 이스트맨이라고 하는 사람은 미국인으로서 제일 먼저 사진기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필름도 제일 먼저 만든 사람이올시다. 로체스터 뉴욕(Rochester New York) 에 가보면 이스트맨 코닥회사(Eastman Kodak Company) 가 한 들판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돈을 몇 억을 모은 모양이지요.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사람이 어떻게 크게 성공하고 돈도 많이 모았지마는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결국은 인생의 환멸을 느껴서 마지막에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의 소망이라고 하는 것, 바라볼 때는 굉장한 것 같지마는 결국 얻어 놓고 보면 여기에도 참 만족은 없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그래요. 우리가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하고“내가 어떻든지 이번에 꼭 석사가 되고 박사가 꼭 되어야지, 박사 학위를 내가 받아올 테야”열심으로 공부하고 굉장히 노력합니다. 그런다고 다 박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이들 가운데 더러 박사가 됩니다. 그러나 혹 박사가 된다고 할지라도 정작 박사가 되고 보면, 그것 뭐 별것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혼의 닻으로 삼는 이는 어떠한 실패, 어떠한 타락, 어떠한 환난, 어떠한 슬픔이 있을 지라도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그 배가 바람에 밀러 가지 아니합니다. 암초에 부딪치지 아니합니다. 파선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절망이란 말은 없습니다. 이 영원불멸의 영혼의 닻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 이 닻을 붙잡았습니까? 내가 과연 이 닻을 붙잡았다고 하면 이 예배당 문 밖에 닻 없는 작은 배를 타고 노도광풍에 시달리는 가련한 우리 민족에게 이 영혼의 닻을 전파하여야 되겠습니다.  <영혼의 닻>에서

90.하나님의 승리적 사랑

인간의 여러 가지 고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고도 역시 그렇습니다. 혹은 천재, 혹은 지변, 혹은 빈궁, 온갖 불행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91.성 패트릭과 아일랜드
 
하나님은 이 모든 것도 초월 통치해서 축복으로 전환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올시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아디 가서 예배당을 짓든지 성 패트릭기념 예배당을 짓습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성자입니다. 전 아일랜드 사람들이 성자를 모시는 그 패트릭이올시다.
  여러분, 젊은 시대의 그의 역사를 읽어보면, 그 분은 불행하게도 요셉과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열 대여섯에 나서 아일랜드의 해적들에게(그는 본래 영국사림입니다) 붙잡혀 갔습니다.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그 아일랜드에 가서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그 종노릇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에 패트릭이 거기서 우연히 석방을 받게 되었고 다시 와서는 공부를 계속하였고 공부를 다 한 다음에는 다시 이일랜드에 돌아가서 미신에 얽매었던 전역의 그 무지한 백성들을 온전히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서 지금까지 아일랜드의 성자가 된 것입니다.

92.드 세이저 선교사와 일본
 
지금 일본에 나와서 활동하는 여러 선교사 가운데 특별히 드 세이저(Jacom De, Shazer) 라고 하는 선교사가 잇습니다. 이 선교사는 본래 미 공군 폭격 부대의 일원으로 미국 비행기가 일본 동경을 제일 먼저 폭격한 그 두리틀(Doolittle) 비행기에 같이 타고 동경을 폭격한 사람입니다. 그 비행기가 저 중경(重慶) 으로 달아나다가 그만 채 가지 못하고 이 사람이 탄 비행기는 고장이 나서 저 상해(上海)방면에 떨어졌습니다. 다행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서 죽지는 않았지만 일본 관헌들에게 잡혔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근 3, 4년 동안 상해, 대련(大連) 혹은 북경(北京) 그 다음에는 일본에까지 여러 감옥으로 전전하면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당하고 일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그는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은혜를 받았습니다.“일본 사람이 왜 이렇게 포악할까? 이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는 까닭이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른 까닭이다. 이 사람들에게 성경을 주고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다”그런 결심을 하였습니다. 포로에서 석방되자 곧 미국에 돌아가서 공부를 해 가지고 일본에 나와서 다시 전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도 그 사랑으로 통치해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이와 같은 말을 하려고 하면 한량이 없습니다.

93.파스칼의 명상록
 
프랑스의 유명한 파스칼(Pascal, Blaise) 이라고 하는 분은 본래 유명한 자연 과학자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한 번은 말을 타고 가다가 다리에서 떨어져서 죽을 뻔하고 중상을 입고 치료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읽는 그야말로 불멸의 저서“파스칼의 명상록”을 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적 사람>에서

94.무디의 회개 설교와 시카고의 대 화재
 
전에 유명한 무디 선생이 시카고 교회에서 어떤 주일 저녁 설교를 하는데 ‘회개하라’라는 문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다가“자, 이것으로 오늘 저녁은 시간이 다 가서 마칠 수가 없는데 내가 이 문제를 다음 주일에 마칠 터이니 다음 주일 저녁에 다 나오시오”하고 말하면서 설교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부르는데 갑자기 밖에서 소방차 소리가 나더니 사방에 화광이 충천해서 그 때 그 굉장히 유명했던 큰 화재가 일어나서 시카고 전역이 다 불탔습니다. 그날 저녁에 무디 선생의 설교를 들은 사람 가운데도 불에 타서 죽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경험을 당하고 무디 선생이“내가 왜 그날 저녁에 회개하라고 말하지 않고 오는 주일 저녁에 다시 오라고 했던가!”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는 지금이올시다. 지금이 구원의 날이요, 지금이 회개할 때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무슨 일을 당할지라도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살아야 됩니다. 예수 님의 이 경고를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95.리빙스턴과 성 다미안의 십자가 정신
 
예수 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고난, 육체적 모든 고난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 이하에“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疾苦)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라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별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간고를 통해서 사명을 행하라고 우리에게 권면만 하지 않았습니다. 재난을 당할 때에 회개하라고 경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히 자기가 인간고에 참여해서 그 고난을 자기가 당하시고 모든 고난과 죄악 가운데서 전 인류를 구원하여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는 언제든지 이 십자가의 정신을 가지고 수난자의 고난에 같이 참여하면서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도와주기를 힘써야 될 것입니다. 리빙스턴이 평안한 자기의 나라를 버리고 암흑의 아프리카 대륙에 제일 먼저 가서 몸을 던지며 간 것도 십자가 정신에 의지해서 나아간 것입니다. 성 다미안 같은 사람이 문둥병 자들만 살고 있는 하와이의 한 섬 몰록카이 섬에 가기를 자원해서 일생토록 문둥이와 같이 살며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마지막에 자기까지 감연이 되어서 죽은 것도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대 잇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일을 한 것입니다. 수난자와 같이 수난을 나누며 그들의 육신과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예수와 인간고>에서

 96. 감격의 신앙
 
요한은 요한 일서 3장 16절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그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조금 내려가서 4장 19절에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사랑의 감격, 그리스도의 은혜의 감격이 서로 요한으로 하여금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도를 만든 것입니다.
  이 감격의 신앙을 우리가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신앙만이 아닙니다. 모든 교우들과 모든 선지자들과 모든 참된 성도들의 공통된 신앙의 특색이었습니다. 어거스틴도 일단 회개한 다음에는 그 일생을 통해서 이 감격이 마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내가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인데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이렇게 구원하여주셨으니 무엇으로 이 은혜를 보답할까 하는 마음입니다.

97.인도네시아의 바탁 교회
 
지금 독립된 인도네시아라고 하는 나라가 있지마는 이 인도네시아라는 나라에 가면 ‘바탁 교회(Batak Church) 라고( 그 이름이 좀 별나지마는) 모두 인도네시아 사람으로 조직된, 어느 다른 선교부의 도움을 별로 안 받는 독립된 큰 교파 하나가 있습니다. 아마 세례교인 수는 약 50만 되는 큰 교파입니다. 그런데 이 교파는 유럽에서 온 어떤 한 사람이 처음에 복음을 전파해서 세웠다고 합니다. 유럽 북부에 있는 어떤 청년이 소년시절에 중한 다리의 병을 만나서 그 때에 의사들 생각에 이 아이의 생명을 구하려고 하면 이 다리를 절단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부모도 깊이 생각하고 이 아이도 깊이 생각하고 결국 이 두 다리를 자를 것이냐, 어떻게 할 것이냐 하고 많이 생각하는 가운데 이 아이가 한 번 하는 말이“아, 어머니, 성경을 보면 예수 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고칠 수 없는 병도 다 고쳐주셨는데 내 다리도 예수 님의 능력이면 고칠 수 있지 않겠어요? 아, 이것 어떻게 고칠 수 없고 내 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습니까?”그리면서 하는 말이“나는 그저 예수 님께서 다리를 자르지 않게 해달라고 모든 것을 맡기고 간절하게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와 그 아이가 함께 간절히 그 다리가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은혜 가운데서 다리가 나았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습니까? 아직까지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나라, 복음을 듣지 못한 나라, 다른 사람이 가보지 못한 지방, 이런 곳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겠다”이렇게 작정을 하고 오래 전에 인도네시아에 혈혈단신으로 나와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해서 그런 큰 교회가 섰다고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건강에 감격한 심정 가운데서 일생을 하나님께 바칠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친 그 심령을 축복하여 주신 것입니다.

98.열 일곱 사람이나 구원한 사람
 
토리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그 미시간 호라는 호수에 한 번은 큰배가 파선을 당해서 많은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그 가운데서 헤엄 잘 치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혼자서 열 일곱 사람을 건져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굉장한 보도를 하여 여러 사람이 그 사람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로스앤젤리스에서 토리 박사라고(여기 한국에 나왔던 그이의 바로 아버지가 되겠습니다) 그때는 그가 지금 유명한 빌리 그래함과 같이 유명한 목사이었는데 그이가 로스앤젤리스에서 한 번은 설교를 하면서 그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참 이렇게 용감한 것을 우리가 배워야 된다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도 힘을 써야 된다고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 설교를 듣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뜻으로 손을 드느냐고 하니까“제가 바로 그 사람이올시다”하였습니다. 열 일곱 사람이나 구원한 그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 와서 토리 박사의 설교를 들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토리 박사가 너무 감사해서 강당으로 좀 올라오라고 해서 올려다 세워 놓고 이 분을 소개하면서 아주 참 용감한 일을 했다고 마지막에 묻기를 이 같은 좋은 일을 했는데 이 일을 한 후에 특별히 혹 무슨 느낀 바가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조금 생각하더니 “뭐 별로 특별히 느낀 바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내가 그 때 열 일곱 사람을 구해 주기는 하였는데, 그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나한테 와서 고맙다고 말 한사람은 없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보통 인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이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고 우리가 어떤 때에 은혜를 깨닫는 다고 할지라도 이 은혜를 항상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깨닫고 기억할 수 잇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전에 어떤 성자는 이렇게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오, 주님이시여, 모든 은혜를 내게 풍성히 주셨으니 이제 한 가지 은혜를 더 주셔서 감격의 마음을 주시옵소서!” 이 은혜까지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을 볼 때에도 감격한 마음으로 볼 줄 알고, 들을 바라볼 때에도 감격한 마음으로 곡식으로 덮인 들을 바라볼 줄 알고, 가을에 단풍을 바라볼 때에도 감격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길을 가다가 예배당을 볼 때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으로 그 예배당을 바라보고, 높이 솟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으로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특별히 독립된 우리 한국의 태극기를 바라볼 때마다 감격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내 사랑하는 부모, 내 사랑하는 처자. 내 사랑하는 친구들, 모든 다른 동포들을 바라볼 때에도 감격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 감격의 신앙,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모든 것을 바라볼 때에 감격에 넘치는 심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가 더 받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이 앞으로 한 주간 감사 주일을 지내는 동안에 우리 하나 하나가 한 가지 은혜를 더 받아서 이 감격의 믿음을 받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감격의 신앙이 있는 이에게는 불평이 없습니다. 이런 이는 아무리 수고를 하고도 대우를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이런 이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원한을 품지 아니합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이는 범사에 감사합니다. 감격의 은혜를 우리가 받아야 되겠습니다.  <감격의 신앙> 에서

99.인생항로의 파선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속에 지남(指南)침 하나를 주셨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곧 양심이올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작은 배, 우리 속에 지남 침을 주셨는데 이것은 곧 양심입니다. 부끄럽지 아니한 착한 양심입니다. 양심은 영혼의 지성소올시다. 양심은 마음속의 촛불이올시다. 밝힙니다. 양심은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올시다. 양심은 속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올시다.“착한 양심을 가져라.”고 권면하십니다. 이 양심이 우리의 생활의 방향을 지시하여 줍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여 줍니다. 시비를 판단하여 줍니다. 갈 길과 안갈 길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한 거름 더 나가서 양심은 우리를 격려하기도 하고 혹은 책망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옳은  길을 갈 때에 우리를 칭찬하고 우리의 마음을 평안케 해서 우리를 격려해 주고, 안 된 길을 가려고 할 떼에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가책을 주어서 우리를 책망하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 향로를 바로 가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양심 그대로의 양심을 지니고 결코 저버리지 맙시다. 양심의 음성을 무시하지 맙시다. 양심의 음성을 거역하지 맙시다. 양심의 음성을 무시하자 맙시다. 아무리 어려워도 양심의 음성에 순종하십시다. 아무리 손해가 나도 양심의 명령에 순복(順服)하십시다. 아무리 부끄러워도 양심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100.양심의 명령에 순복한 쟝발쟝
 
빅토르 유고의 유명한 <쟝발쟝>의 이야기를 여러분은 기억하시지요. 그 사람은 여러 가지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리고 몰래 도망했습니다. 먼 곳으로 갔습니다. 변 성명 했습니다. 그 곳에 가서 정계(政界)에 투신했습니다. 성공을 해서 그 곳의 시장이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더러운 죄를 많이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도회에 가서 변 성명하고 새 사람으로 시장의 자리까지 올라가서 평안히 삽니다.
  그러나 한 번은 심문을 보니까 자기가 살던 그 도회에서 어떤 죄인이 하나 붙잡혔는데 도적질을 하다가 붙잡혀서 그 당국자는 이 사람이 곧 전에 악한 것은 많이 하던 쟝발쟝이라고 인정을 하고 고문까지 해서 자백을 아마 받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중형을 내린다고 하는 신문의 보도를 보았습니다. 자기는 지금 평안한 시장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문을 보고 그 날 저녁에 잠을 못 잤습니다.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진짜 쟝발쟝은 여기 평안히 있고 무죄한 사람이 내 대신 중형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그곳으로 마차를 타고 달려가서 그 재판장에게 자기가 실상 쟝발쟝이니 이 사람은 놓아주라고 말했습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많이 손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명령에 순복하였습니다. 이리해서 인생 길을 마지막에 바로 갔습니다. 우리가 인생항로를 바로 마치려고 하면 양심의 명령에 순복해야 됩니다. <인생 항로와 파선>에서

101.창조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천지를 언제 지었으며, 어떻게 지었으며, 얼마나 오묘하게 지었는가 하는 점을 잠깐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보니“태초에…”그랬습니다. 이‘태초’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맨 처음에’입니다. 그 맨 처음은 언제입니까? 영원 전이란 말은 아닙니다. 일정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오래 전에 지었지마는 영원 전부터 이 우주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지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과학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이 지구의 연령을 계산합니다. 얼마나 꼭 들어맞는지는 모르지마는 대체로 계산합니다. 그 계산방법이 여러 가지 있지마는 보통 쓰는 방법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102.모든 것은 시작할 때가 있다
 
금속원소( 金屬元素)가운데 우라늄(U)이라고 하는 아주 신기한 원소를 이용해서 원자탄도 만들고 그 외의 여러 가지를 만듭니다. 이 원소는 이상하게도 그 자체가 방사합니다. 그래서 이 우라늄이라고 하는 원소는 방사를 하면서 변하다가 맨 마지막에는 무엇이 되는가 하면 납(鉛)이 됩니다. 여러 과학자들이 조사한 결과를 보면 약 1천만년마다 이 우라늄이 603분지 1이 납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알아 가지고서 지구 가운데 가장 오랜 지층 바위 속에 함축되어 있는 우라늄을 혹 발견합니다. 발견해서 그 가운데 몇 분의 몇이 납으로 변했는가를 조사해서 가장 오래된 지층이 몇 해전에 형성 됐나를 짐작으로 계산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계산에 의하면 제일 오래된 지층이 약 25억만 년 전에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조사를 해서 홈즈 박사라고 하는 이는 지구의 연령이 즉 지구가 생긴지가, 창조를 받은 지가 약 33억5천만 년이라고 계산을 합니다 영원은 아니오, 시작한 때가 있다고 말입니다.
  태양계의 연령은 38억만년으로 계산을 합니다. 한 걸음 나아가서 이 우주의 연령, 우주의 창조, 시작 연대를 약 100억만 년으로 추산을 합니다. 자, 이렇게 우주가 창조 받은 것을, 영원 전은 아니지만 매우 오래 전에 태초에 지음을 받은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103.우주의 크기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지으셨는데 이 우주를 어떤 규모로 지으셨나, 이 우주가 큰가 하는 것은 특별히 이 20세기에 사는 우리로서 궁금히 생각는 바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우주를 탐색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우주를 탐색하게 될 때에는 자연히 이 우주가 얼마나 큰가 이런데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옛날에도 우주가 얼마나 큰 것은 대강 짐작했지마는, 특별히 이것도 20세기에 와서야 미국의 마운트 윌손(Mount Wilson) 천문대에 있는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크던 1백 인치 태양 관측용 망원경을 사용해서 우주를 살펴보게 되었고 또 바로 20여 년 전에 마운트 팔로마(Mount Palomar)에 있는 천문대에서는 지금 세계에서 제일 큰 망원경 2백인치의 헤일(Hale) 망원경을 통해서 우주를 좀더 자세히 내다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늘 보는 태양은 얼마나 큽니까? 멀리서 보면 태양이 작게 보이지마는 과학자들이 조사한 결과를 우리가 들어보면 태양 자체가 얼마나 큰고 하니 우리가 사는 이 지구 같은 것이 1백만 개나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다고 합니다. 태양 자체의 그 중량이 얼마나 무거운가 하니 태양계에 속하는 모든 위성을 다 합한 것의 750배나 더 무겁다고 합니다.
  또 이 우주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피차에 먼가 생각해 봅시다. 광선의 속도가 아주 빠른데 1초 동안에 18만 6천 마일 갑니다. 1초 동안에 18만 6천 마일 가는 이 광선의 속도로 재어보아도 지구에서 태양까지 가는데 8분 19초가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지구에서 제일 가까운 다른 별인 항성 알파센타워라고 하는 별에 가려고 하면 이 태양광선의 속도로 측량을 해서 4년 3개월, 다시 말하면 4광년 3개월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하늘을 살펴보면 이 항성들이 모여 있는 소위‘갤럭시(Galaxy)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밤에 나가보면 하늘에 은가루를 뿌린 것처럼 보이는 것, 이것을 우리는 은하라고 합니다. 그 은하수를 망원경으로 보면 그것이 전부 큰 별입니다. 별이 많이 있어서 멀리서 보게 될 때에 이렇게 강처럼, 은하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태양에서 속하는 그 은하계가 얼마나 먼가 하면 10만 광년이라고 합니다.
  우리 태양은 이 은하 중심에서 3만 3천 광년 되는 거리에 있는데 매초에 2백 마일 속도로 이 은하계의 중심을 돌고 있습니다. 태양도 돕니다. 태양계를 도는데 2억만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이 하늘에 별이 얼마나 될까요? 천문학자의 말에 의하면 이 은하계 하나에는 약 1천억의 별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1천억의 별이 있는 은하계가 대략 몇이나 됩니까? 지금 발견 된 것만 해도 약 1억이 있다고 합니다.
  아인쉬타인(Albert Einstein) 박사의 계산에 의하면 그 별의 수가 얼마이고 하니 10의 28자승한 수만 하다고 합니다. 영국의 천문학자 제임스 진스(James Jins)는 보통 사람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했습니다. 하늘의 별이 얼마나 많은지 알려면 이 지구의 모든 해변에 있는 모래알을 전부 모아 세어 보면 알 수 있다고 말 헸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우주가 그 만큼 큽니다. 그것을 보니 하나님의 살림살이가 굉장합니다. 큰 데만 놀랄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이 우주를 살펴보면 과연 오묘하게 지었습니다. 이렇게 대 우주이지만 꼭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유성이 항성을 돌고, 항성이 모든 유성을 또 돌고 ‘갤럭시’ 가 또 되고, 그렇게 꼭 조직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정한 속도가 있고 일정한 궤도가 있어서 꼭 법칙에 의지해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별이 하늘에 그렇게 많아도 하늘의 교통 사고 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아주 오묘합니다. 이렇게 많은 별들이 멀리 있다고 하지마는 법칙이 꼭 통일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구의 움직이는 자연 법칙이 다른 별에도 꼭 같이 통용된다고 합니다. 여기에 우주 탐색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104 서로 다른 눈송이
 
이것은 전체적으로 볼 때에 그렇지마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계를 좀 더 자세히 보면 그 가운데도 참 오묘한 것이 많습니다. 금년 겨울에는 눈이 굉장히 많이 와서 우리가 다 놀랍니다. 여러분께서는 그 눈을 좀 자세히 살펴보셨습니까?
  그것을 현미경으로 보면 굉장히 아름답다고 합니다. 얼른 보기에는 그저 흰 것이 내려오는 것 같지마는, 자세히 살펴보면 결정체들입니다. 어떤 것은 여덟 모가 나고 어떤 것은 열 두 모가 나고 어떤 것은 여섯 모가 나고 꼭 같이 있는 여러 가지 결정체입니다. 그러나 그 결정체가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과학자가 조사해 보니까 약 9백 가지의 다른 결정체가 있다고 합니다.
  그 눈송이 하나도 일정한 고안이 있고, 어떻게 아름답게 만들었는지 말로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님이 말씀하시기를“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아라”하셨지마는, 백합화 한 송이를 가만히 볼지라도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게 고안을 했습니까? 또 꽃이 하나 하나 다 다릅니다. 잎사귀 하나 하나를 볼지라도 어떻게 그렇게 고안을 잘 했는지 모릅니다.
  요사이 한국에도 방직업이 발달되어서 영등포에서도 양단을 많이 짜는 모양입니다. 그 양단을 보면 고안을 굉장히 아름답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고안들이 어디서 왔는지 압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고안한 것을 빌어다 쓰는 것밖에 다른 것 없습니다. 그 꽃, 그 잎사귀, 새니 뭐니 다 하나님의 고안을 거저 빌어다 쓰는 것밖에 다른 것 없습니다. 어떻게 아름답게 고안이 잘했는지 모릅니다. 나비 한 마리, 새 한 마리를 볼지라도 어떻게 고안이 잘됐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 자연계에서 생물도 많고 동물도 많고 식물도 많지마는 피차간 어떻게 조화되어서 살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서

105 민주국가와 자유 관념

민주 국가가 잘 건설되려면 몇 가지 요소가 꼭 필요합니다. 그 중 하나가 정당한‘자유 관념(自由觀念)입니다.
  자유는 우리 민주 국가의 한 표어처럼 되었습니다.‘자유 진영’이란 말을 씁니다.‘자유 사회’이란 말을 씁니다. 이 관념도 결국은 개인을 존중하는 사상에서 오게 된 것입니다. 전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4대 자유가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첫째는 신앙의 자유(신앙)
    둘째는 언론의 자유(언론, 출판)
    셋째는 공포에서의 자유(공포가 없는 세계)
    넷째는 궁핍에서의 자유( 궁핍 없는 사회
  미국의 트루블러드(Elton Trueblood)라고 하는 분은 민주주의 사상에 대해서 많은 글을 썼는데, 그는 <자유의 선언>이란 저서 가운데서 여섯 가지 자유를 주장하였습니다.
    첫째는 학문(學問)의 자유
    둘째는 변론(辯論)의 자유
    셋째는 신교(信敎)자유
    넷째는 노동(勞動)의 자유(강제 노동이 아니고, 자유 노동을 할 수 있는 자유)
    다섯째는 생존(生存)의 자유
    여섯째는 봉사(奉仕)의 자유
  민주 사회는 반드시 이 여섯 가지 자유가 있어야 되겠다고 그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이 모든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 사회일 것입니다. 국민 하나 하나의 이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민주국가의 지상의 의무인 것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당한 자유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가진 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흔히 자유는 그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방종이지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행하여야 할대로 행하는 그것이 자유인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 자유의 관념의 원천이 어디 있는가? 이것은 역시 근본을 더듬어 볼 것 같으면 성경에서 왔습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자라난 나사렛 회당에서 그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시게 될 때에 회당 장이 책을 올렸습니다. 예수 님께서 이사야 61장 1절을 찾아서 이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네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 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됨을, 눌린 자를 자유 캐 하고 주의 복된 해를 전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읽으시고 하시는 말씀이“오늘날 이 말씀이 응하였도다”고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3장 17절에“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 함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갈라디아 5장에“주께서 저희에게 자유를 주셨은즉 다시는 종의 명에를 메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자유의 적당한 관념을 옳게 가지라고 계속해 말씀하시며“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히려 피차에 봉사하라”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자유에 대한 올바른 관념을 가지고 또한 그 원천이 어디 있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때에 우리가 이 자유에 대한 모든 활동을 바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민주 국가와 자유 관념>에서

106. 발베이도스 섬에서 일어난 일
 
제가 몇 해전에 북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에 있는 카리브 바다의 발베이도스라고 하는 섬에 가서 그 지역 여러 섬에 있는 교역자들이 모여 목사 수양회를 하는 자리에 참석했던 일이 있습니다. 발베이도스에 가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조그마한 섬인데 아마 한국 이수로 길이가 약 30리,  넓이가 약 20리로 비행기 타고 높이 올라가면 다 보입니다. 이 섬은 참 좋습니다. 언제나 일은 여름 같습니다. 과히 덥지도 아니하고 물론 춥지도 아니하고 언제나 꽃 피고 경치 아름답고 아주 바닷물이 맑고 참 피서하기 좋은 아름다운 곳입니다.
  어떤 이가 여기 꽃도 많고 하니까 여기 꿀별을 갖다 놓으면 많은 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꿀통을 갖다 놓으니까 처음에 몇 달은 이 꿀벌들이 꿀을 잘 만들어 옵니다. 그러더니 그 다음부터는 꿀을 만들어 오지 않는 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저 사방에 꽃이요 언제나 벌들이 청밀(淸蜜)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꿀을 갖다 모아 놓을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꿀벌들이 할 것이 없어서 그저 꽃에서 꿀을 먹고는 악착스럽게 다른 사람을 만나는 데로 쏘아 주어서 큰 변이 났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일없는 사람은 이런 꿀벌 비슷해서 공연히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만 해칩니다. 일은 도덕적 생활에도 필요합니다. 일하는 가운데 만족을 얻고 천재가 다시 되고 내재의 능력이 다시 될 수가 있습니다. 일하는 가운데 향상이 있고 발전이 있고 새 문화가 창조됩니다.

107.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예배당을 짓는 공사장에 가서 여러 사람들이 돌을 깎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서 그 중 한 석수(石手)를 붙잡고 “당신은 뭘 합니까?”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 석수가 얼른“나는 그저 하루에 백원 벌이합니다.”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다른 석수에게 “당신은 무엇합니까?”하니까“나는 돌을 깎습니다”하고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또 다른 석수에게 “ 당신은 뭘 합니까?” 이 사람은 “나는 만 유 주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습니다”이렇게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보세요, 꼭 같이 돌 일을 하지요, 그러나 그 정신이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가 꼭 같이 무슨 일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정신을 가지고 그 일을 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과 동사하는 것, 이것이 곧 기독교 노동관이올시다.
  우리 믿는 사람은 일을 이렇게 봅니다. 무슨 일을 맡았든지 하나님과 의논하고, 하나님의 힘을 입고, 하나님과 같이 일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사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일한다는 이 신념, 이 이상이 곧 우리 믿는 사람이 노동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사상인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우리가 일할 때는 그 일이 참 기도요, 그 일이 참 예배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노동>에서
 
108. 믿음의 어머니가 남긴 유산

오늘‘어머니 주일’을 당해서‘어머니의 믿음과 그 감화’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인간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이는 어머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를  흔히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하나는 유전, 또 하나는 교육이올시다. 흔히 이 두 가지가 거이 지배했습니다. 유전의 견지에서 볼 때에, 자녀들은 문자 그대로 어머니의 혈육을 받아서 납니다. 어머니의 피와 살을 받아서 납니다. 문자 그대로 살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전의 영향은 말할 것도 없고, 둘째로 교육의 견지에서 볼 때에도 역시 그렇습니다. 교육이라 하면 가정 교육, 교회 교육, 학교 교육, 사회 교육, 대략 이와 같이 네 가지 종류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중에도 제일 큰 영향을 인격에게 주는 것은 가정 교육입니다. 그 이유는 가정 교육이란 가장 어렸을 때부터 받는 교육인 까닭입니다. 그런데 이 가정교육은 주로 어머니가 책임을 지게됩니다. 어머니는 항상 아이들과 같이 있게 되는 까닭으로, 아버지는 아무리 힘쓴다고 할지라도 그런 기회가 적습니다. 따라서 가정교육의 대부분의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전의 견지에서 볼 때, 어머니의 영향은 자녀들에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장 큰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어머니의 존재를 우리가 발견합니다. 우리가 한국 역사를 읽을 때에도, 신라조의 김유신 장군을 생각할 때는 자연히 그 어머니를 우리가 또한 기억합니다. 고려조의 일대의 충신이었던 정 포은 선생을 생각할 때에는 그 어머니를 또한 기억합니다.
  이러한 예는 참으로 많습니다.
  이조의 석학으로서 유명한 율곡 선생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도 역시 그 어머니를 기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한국뿐 아니고 어떤 나라도 그렇습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 같은 이도 일찍이 말하기를“내가 나 된 것의 전부가, 그리고 장차 되기를 바라는 것의 전부는 오직 천사와 같은 내 어머니의 덕입니다”하는 말을 남겼습니다. 일찍이 헬라의 유명한 알렉산더 대제가 파사에 가서 고관과 귀족들을 다 초대하여서 큰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그 연회 소에 나갈 때에는 오래 입던 군복을 벗어버리고 일찍이 자기 고향에서 어머니가 친히 짜고 친히 바느질해서 지어준 옷을 입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깊이 우리가 생각하여 볼 때에 누구든지 어머니가 지어준 옷을 입고 다닙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고 하니 누구든지 자기 어머니의 그 유전, 그 교육, 그 감화로 이루어진 성격, 인격, 생활로 일생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만큼 어머니의 영향이 큽니다. 그러므로 어떤 분은“어머니들은 작은 요람을 통해서 온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도 이럴진대 우리가 영적 방면에서 볼 때에 더욱 그렇습니다.
  어머님의 믿음은 자녀의 신앙에 큰 영향을 줍니다.

109.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나카
 
기독교 역사를 생각할 때에 제일 유명한 믿음의 어머니로서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를 우리가 다 기억합니다.  어거스틴의 고향은 아프리카 북방의 한 작은 동리였습니다. 그 때에는 이 곳도 다 로마의 영지였습니다. 어거스틴은 본래부터 총명했습니다. 재주가 있었습니다. 글공부도 잘 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문명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감은 믿음이 없습니다. 방탕한 길로 나갔습니다. 그 때 세상 청년들이 걷던 세속의 길로 나갔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믿음의 어머니 모니카는 항상 이것이 고통이었습니다. 어떻든지 회개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10여 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응답은 되지 아니했습니다. 10여 년이나 기도했지마는 그 다음에 된 일을 보면 이 청년 어거스틴이 아프리카 북방을 떠나서 로마로 가자고 합니다. 로마는 물론 정치의 중심이요 문화의 중심지이지마는 또한 음란한 곳이요, 말할 수 없이 부패한 곳입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이 젊은 청년 어거스턴이 로마에 가게되면 얼마나 죄악 가운데 빠질까 염려해서 어떻든지 못 가도록 간절히 권면도 하고 기도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기도하는 동안에 몰래 배를 타고서 지중해를 건너서 로마로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기도했습니다. 도무지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자기도 그 후에 배를 타고서 로마로 쫓아갔습니다. 그 후에 로마에 가서 정착한 것은 아니고, 얼마 동안 머물렀다가 다시 이태리 북방 밀란이라고 하는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 가서 우연히 그 밀란 교회의 유명한 목사 암브로우스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의 감화를 통해서 점점 신앙을 갖게 되어 온전히 회개한 이야기를 우리가 잘 알고 잇습니다.
 15, 6년을 계속해서 기도한 후에 결국은 그 아들이 회개를 했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그 다음에는 모자가 같이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작정을 하고 두 사람이 같이 기쁨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채 같이 고향으로 돌아오지는 못하고 티벨 강 저 끝에 있는 작은 오스티아라고 하는 동네에 와서 여관에서 묵다가 그만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이 아들이 2천 년 기독교 사상을 거의 지배했다고 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교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배후에 어머니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어거스틴 자신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였습니다.“하나님이시여,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고 하면 이것은 오직 아버지께서 나에게 이런 어머니를 주신 까닭입니다.”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믿음의 어머니에게 믿음이 같이 따라 갑니다.

110.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

그리고 물론 우리 교회 역사상에  유명한 믿음의 어머니를 아마 우리가 생각하자고 하면, 감리교를 설립한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부인은 참 아들을 잘 기를뿐더러 자녀를 많이 길렀습니다. 자녀를 열 아홉을 낳아서 길렀습니다. 이 요한 웨슬레는 열 다섯째로 낳은 아들입니다. 자기 남편은 성공회 목사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목사로서 뭐 봉급이 많은 이치가 없습니다. 박봉입니다, 자녀들이 이렇게 많으니까 항상 생활이 구차했습니다. 그 구차한 살림에 이 많은 자녀를 가지고, 또 전기에 나오는 대로 읽어보면 국민학교 교육은 4, 5학년까지 거이 가정에서 가르쳤습니다. 다섯 살 되었을 때 벌서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글을 해독하자마자 창세기 1장부터 성경을 가르쳤고, 또 규칙적으로 이 많은 자녀들을 잘 길렀으니 그 가운데 요한 웨슬레는 온 영국뿐 아니고 온 세계에 큰 공헌을 한 종교가가 되었고, 차알스 웨슬레는 많은 찬송가를 작곡해서 위대한 음악가가 되었고, 그 밖에 자녀들도 하나 하나가 좋은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어머니가 있는 곳에 믿음의 자녀들이 일어납니다. 

111.피얼스 박사의 어머니
 
제가 이번에 로스앤젤리스에 잠깐 들러서 기독교 선명회 본부에서 같이 예배를 보고 비행장으로 자동차를 타고 나오는데 피얼스 박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기 어머님이 지금 80세가 넘었고 심히 약해서 사실 사람 보기에는 얼마나 더 오래 세상에 계실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병원에 입원해 계신데 매일 한 번씩 꼭 가서 어머니를 뵙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내가 사실 단점도 많고 성격상 결함도 많은 사람인데 참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서 일을 시키고 지금까지 무난히 해 온다고 하는 것이 그저 다 내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항상 기도해 주시는 그 덕택이며 내가 은혜 가운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이의 배후에도 이와 같은 기도의 어머니가 있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믿음의 어머니 감화가 얼마나 위대하고 그 어머니의 공헌이 교회와 사회와 국가에 주는 공헌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우리가 다 헤아려서 말로 할 수가 없는 줄 생각합니다.

112.필립스 브룩스 목사의 어머니
 
19세기 보스톤에 성공회 감독으로 아주 유명한 목사가 한 분 있었습니다. 필립스 브룩스라고 하는 목사입니다. 이 목사는 자기 어머니가 세상 떠난 다음에 비석을 해 세우면서 그 묘비에 자기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성경 절을 새겼는데 마태복음 15장 28절을 새겼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15정 28절에 무슨 말씀이 있는지 아십니까? 예수 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한 말씀이 거기 있습니다.“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자녀들이 어머니를 장사하고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만들려고 할 때에, 자기 어머니를 생각할 때에, 무엇보다도 과연 우리 어머니는 믿음이 크신 어머니였다 하는 생각이 날 만큼 믿음의 어머니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우리 가정에서 누가 예수를 잘 믿는지는 아이들이 더 잘 압니다. 내가 들으니까, 어떤 가정에서 누가 예수를 잘 믿나 투표를 하여보았다고 합니다. 어떤 자녀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아십니까?“우리 어머니는 예배당에 가긴 가도 믿음은 별로 없어”아이들은 못 소깁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 혹 남편까지 속일 수 있지요. 하지만 그 자녀들은 못 소깁니다. 항상 붙어 있으니까, 항상 따라 다니니까.
  자녀들이 보기에 자기 어머니의 일생을 회고할 때에 과연 우리 어머니는 믿음이 크신 어머니였다고 자녀들이 생각할 정도로 믿음의 어머니가 됩시다. 그런 은혜를 받으세요. 우리가 다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를 원합니다. 좋은 집을 지어서 남겨 주기도 원하고 돈을 많이 모아서 남겨 주기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그와 같은 유산은 며칠 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남겨줄 불멸의 유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해가 가고 갈수록 없어지지 아니하고 더욱 축복의 근원이 될 불멸의 유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부모의 믿음이올시다. 우리가 이 불멸의 믿음의 유산을 우리 자손에게 남겨주면 이 유산은 우리 가정과 대대손손이 같이 하면서 우리의 후손을 축복할 것입니다.   <어머니의 믿음과 그 감화>에서

113.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녀

우리가 하나님의 좋은 아들과 딸이 되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전적으로 그를 의지할 것입니다. 효자가 자기 아버지 말씀을 의심할 수 있습니까?  효자가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을 때가 있겠습니까? 사실 세상의 부모는 요새 보니까 더러 아들과 딸을 내다 버립니다. 하나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과 딸을 끝까지 그 손에 쥐고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14.성 프랜시스 이야기
 
성 프랜시스가 처음에 은혜를 받아서 그저 주님의 일 만 하고, 옷도 해주면 가난한 사람에게 갖다주고 이렇게 되니까 자기 아버지는 크게 낙심하였습니다. 자기 아버지는 큰 부자요 포목상 주인이었는데 이 애가 커서 자기의 사업을 계대(繼代)할까 생각했는데 사업을 할 생각은 안하고 돌아다니면서 기도하고 주의 일만하고 도무지 자기가 하라고 하는 일은 안 한단 말입니다. 책망해도 쓸 데 없고 때려도 쓸 데 없어요, 마지막에는 성이 나서“이놈, 내 아들 된 것을 아주 파면해 버리겠다”고 호적에서 빼버리고 그 때 법관에게 가서 그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법관도 할 수 없이“이제는 아무개의 아들이 아니라”고 호적에서 빼도록 선언을 했습니다. 그 때에 성 프랜시스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자기 입었던 옷가지 다 벗어서는 자기 옆에 계신 아버지에게 다 놓으면서“아버지 이것 받으세요, 이 앞으로는 오직 하늘에 게신 아버지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부모는 혹 우리를 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늘에 게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성 프랜시스를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모든 근심과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서

115.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환난 날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부른다”고 하는 말은“찾으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큰 환난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을 부르고 찾았습니다. 성 프랜시스도 중대한 병에 걸렸을 때 마침내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유명한 과학자요 유명한 종교가였던 파스칼 같은 이도 중상을 입고 병상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마침내 그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로욜라의 생활 역시 그렇습니다. 요나가 탄 베에 큰 풍파가 일어날 때에 그 선장이 잠자고 있는 요나에게 와서 “잠자는 자여 ! 어찜이뇨?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재촉을 하였습니다.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고 찾아야 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환난의 날이야말로 하나님을 찾고 또 만날 만한 때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습니다.
  환난의 날에 낙심하지 말고, 자포자기하지 말고, 반항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부르고 찾아 만나는 가운데 살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환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고 하는 말은 한 거름 더 나나가서“기도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바베론에 잡혀갔을 때에 오래 잊어버렸던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다니엘이, 에스켈이. 많은 백성들과 같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환난의 날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116.도버해협의 기적
 
세계 2차 대전 때에 불란서가 독일 나치스 군데에게 패해버리고 영국에서 도와주려고 건너갔던 30만 대군이 자기들만으로 불가능한지라 영국으로 건너오기 위해서 해협으로 도망 갈 때에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도망하는 영국 군인들을 아주 전멸시켜 버리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태연히 있었습니다. 그 때에 영국왕 조오지 6세가 온 국민에게“어떻게 하든지 영국 군대를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기도의 날을 선포하고 전 국민이 그 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상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날 독일 편에는 큰 폭풍우가 일어서 비행기가 한 대도 뜰 수가 없었고 너무 비가 많이 와서 탱크 한 대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국 편에는 그 도버해협이 어떻게 잔잔하고 고요한지 거울 같이 맑아서 수많은 배가 29만의 영국 군대를 무사히 영국까지 옮기게 된 것입니다. 그 일 후에 영국 군대를 비롯해서 온 영국 국민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하나님의 말씀이올시다.

117.모라비아 교회의 운동
 
이것이 또한 신령한 면에서도 그런 줄 압니다. 18세기 초엽에 유럽에 있던 신교의 정세를 보면 대단히 암담하였습니다. 천주교의 핍박은 여전히 심했습니다. 그러나 신교도들은 작은 신학 문제로 분쟁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교회는 분열로 침체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전도니 세계 선교니 하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던 암흑의 때였습니다. 이 때에 진젠돌프라고 하는 젊은 백작이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믿음이 독실한 이로 은혜를 받아서 자기의 토지를 개방하고 천주교의 핍박에 쫓겨오는 피난민들을 자기 토지에 정착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수백 명이 모이게 되어 이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만 교회를 하나 세웠습니다. 진젠돌프는 이 작은 교회의 목사가 되어 피난민과 한가지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이 핍박이 그치고 신교들 가운데 분쟁이 그쳐서 어떻든지 교회가 부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달라”고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1714년 8월 14일 예배 후 성찬식을 할 때에 큰 은혜가 내렸습니다. 하나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몸을 받치게 되었고, 이렇게 되어서 유명한 ‘모라비아 교회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교회는 5, 6백 명의 피난민들이 모여서 조직되었지만, 은혜를 받은 백 여 년 동안에 는 백여 명의 선교사를 세계 각국으로 파송하게 된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교회역사를 보면 요한 웨슬레 같은 사람도‘모라비아’교회 때문에 큰 은혜를 받고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해서 영국에는 웨슬레 운동이 일어나고 계속해서 피틀리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서 미국에까지 미치게 되어 18세기 중엽부터 신교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19세기는 부흥을 받은 교회가 온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선교의 세기가 된 것입니다. 베른훗이라고 하는 조그만 교회에서 피난민들이 모여 간절히 기도한 결과 은혜를 받게 되었고 이 은혜가 세계에 퍼지게 되었고, 이 은혜가 온 세계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교회역사와 세께 역사에 큰 영향을 주게 된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난 날에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죄를 회개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이 환난이 변해서 하나님에게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진젠돌프와 이 피난민 몇 사람이 환난 가운데서 기도한 그 기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계의 수억의 생명을 구원하는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환난의 날과 기도>에서

118.살피시는 하나님
 
몇 해 전 그리스의 수도 아데네에 갔는데 옛날 천여 년 전에 지은 오랜 예배당이 있어서 구경하려 갔습니다. 거기 헬라 정통교회 들어가면 천주교와 좀 다른 것은 천주교는 예배당 안에 마리아의 성상과 성화를 만들어 놓았지만 그러나 이 헬라 정통교회에서는 성상은 아주 폐지했습니다. 주후 8세기에 아주 폐지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화만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들어가면 천장과 담으로 여러 가지 옛날의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예배당에 들어가면 이 강대, 저 아치 맨 위에 무슨 그림이 있는고 하니 큰 눈(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그 눈입니다. 그 눈이 나를 내려다봅니다. 아마 그 뜻은 이 예배당에 들어오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눈이 너를 보신다 하는 그 뜻을 알리기 위해서 그려 붙인 모양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그 예배당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배당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십니다. 이 하나님의 눈은 성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가던지, 온 세계에 이 하나님의 눈을 피할 데가 없습니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옛날 이런 사상을 좀 깨달았던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고서에 무슨 말이 있는고 하니 신목여전(神目如電) 이란 말이 있습니다. 신의 눈이 번갯불과 같다는 말입니다. 제일 밝은 것이 번갯불 아닙니까? 하나님의 눈이 번갯불과 같이 밝게 우리들을 살피십니다.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살피시고 나를 보십니다. 내 생각과 내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거슬리는 것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눈이 여러분 하나 하나를 지금 보시고 여러분의 양심에 말씀해 주십니까? 사도 요한은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스스로 속이지 맙시다.“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의 모든 불의한 가운데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하나님께서 몰라서 자백하란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볼지어다 지금은 구원의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지금 이 시간 구원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직까지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자백하지 아니하고 자고 새가 알을 품고 있듯 그냥 죄를 마음 가운데 품고 있는 이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죄를 보고 계십니다. 이 시간에 그 죄를 자백하고 내 놓아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에서

119.하나님의 동역자

제가 일전에 어떤 책을 보니 어떤 사람이 자기 신앙 생활에 대한 간증을 했는데 그는 미국에서 음식점을 하나 경영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요리법을 잘 공부한 후 그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적당한 곳에서 개업을 했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고객이 도무지 오지를 않더랍니다. 거리에 지나가는 많은 사람 가운데 배고픈 사람도 많을 텐데 자기 집에 들어와서 점심 사먹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주인은 초조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이유일까? 이 사람이 곰곰이 생각하다가“이거 내가 여러 가지 내 머리로 애써서 하지마는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적구나 내가 이 일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밖에 없다”이렇게 생각하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를“제가 이 음식점을 시작했는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됩니까?”간절히 지시해 주시기를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성령의 감화 가운데서 일어나는 생각이“그저 어떤 고객이 오든지 네 아들이나 딸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처럼 그만한 정성을 가지고 음식을 실속 있고 맛있게 만들고 사랑으로 대접을 하라”이런 생각이 마음 가운데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의 지도인 줄 믿고 꼭 그렇게 실행을 했더니 누구나 한 번 온 사람이면 꼭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니까 그 음식점에 음식 먹으로 오는 사람이 줄을 지어 들어올 정도로 번창하드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변 하나님께 감사를 하면서 “제가 이렇게 축복을 많이 받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됩니까?”또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성령의 감화 가운데서 무슨 생각이 났는고 하니“그저 어떤 사람이든지 네 집에 오는 사람은 음식만 잘 대접할 것이 아니라 신령한 양식도 공급하기를 힘써라. 그저 여러 사람의 사정을 아는 대로 도와주고 봉사할 수 있는 대로 봉사하라”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120.기도로 응답 받은 판사
 
그 후로는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모든 고객을 대합니다. 한 번은 자기 집에 단골로 점심 식사하려 오는 어떤 판사가 들어올 때 보니까 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음식을 갖다 놓아도 무슨 생각에 깊이 잠겨서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그래 이 주인이 가서“아 판사 님 ! 무슨 근심이 있습니까? 왜 이렇게 음식을 못 잡수시지요?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이거 대단히 어려운 이혼 소송 사건이 하나 들어왔는데 이 사람들이 이혼을 하면 그 아들과 딸의 장fork 어떻게 됩니까? 이 기막힌 사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이 얼른 대답하기를“그거 해결하기 쉬운 방법이 제게는 하나 있습니다.”“아! 그래 그것이 무슨 방법이지요?”그저 기도를 하십시오‘예수 님께서 이런 사건을 맡았다고 하면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하고 기도를 해보세요”이 말을 들은 판사가 깊이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음식을 대강 먹더니 그 이튿날 점심때가 되어서 이 분이 얼굴에 화기가 충만해서 들어옵니다. 이 주인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아, 내가 당신 말씀대로 하니까 그대로 됩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예배당엘 더러 다녀 보았지만 뭐 별로 기도를 못했었는데 이번에 그 가족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가운데 생각나는 대로 꼭 그들에게 솔직히 말했지요. 그랬더니 무사히 해결이 되었어요”
  사실 재판도 공정하고 바르게 하려고 하면 하나님과 동역 해야 됩니다. 우리 나라에도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의논하면서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있는 법관들이 좀더 많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무슨 사업이나 하나님과 동역 해야 성공합니다.

121.수술하기 전에 기도하는 민게이 박사 
 
병을 치료하는 것도 그래요. 미국의 저명한 외과 의사 가운데 민게이 박사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이 분이 늘 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수술은 사람이 하지마는 병은 하나님이 고치신다”물론 약도 사람이 주고 수술도 사람이 하지요, 그러나 고치는 것은 하나님께서만 고치십니다.
  이 분은 늘 수술하기 전에 꼭 기도를 하는데 어떻게 되어서 기도를 하게되었냐고 물어보니까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하더랍니다. 그는 본래 캐나다의 어떤 가난한 농촌에서 자라면서 참 가까스로 고학을 해서 의학을 공부하고 이제 외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어렸을 적에야 물론 주일 학교에 다녔지만 대학에 다니는 동안 교회에 가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의사가 된 다음에도 교회에 가는 것은 거이 다 잊어버렸습니다. 기도도 오래 안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멀리 있는 자기 동생에게서 장거리 전화가 왔습니다.
  “아! 형님, 빨리 오셔야 되겠습니다. 어머니가 밭에서 일 하시다가 황소에게 받혀서 중상을 입었습니다. 인사 불성이 되었는데 여기 가까운데 있는 의사를 청해서 보이니까 그 이상 수술을 못하겠다고 하며 살 희망이 없다고 그럽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사가 급히 비행기 세를 내서 간호원과 보조하는 의사를 데리고 특별기로 달려왔습니다. 자기 집이 워낙 시골이라 비행장에 내려서도 여러 시간을 또 자동차로 달려서 집에 도착해보니 아니나 다를 까 연로하신 어머니가 황소에 받혀서 중상을 입었는데 갈비뼈가 여러 개 상한 체 인사 불성이 되어 누워있었습니다.
  수술을 해야 되었습니다. 얼른 수술 준비를 하고 자기가 수술을 하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손이 자꾸 떨립니다. 아마 너무 흥분되어서 그렇겠지요, 자기가 의학을 했다고 하면 이런 때 어머니를 위해서 의술을 발휘해야 하겠는데 수술을 하려고 하니까 손이 떨려서 집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진정이 안 됩니다. 그래서 수술을 시작하지 못하고 그 주방 의자에 앉아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얼마쯤 기도한 다음에는 마음이 진정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시간 걸리는 어려운 수술을 다 마치고 그 어머니가 위험한 가운데서 소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 이 분이 자기 신앙을 회복하고 언제 어느 때 무슨 수술을 하든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서야 하는 그런 습관이 자기에게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 해야 합니다. 사람의 할 부분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동역 해 주셔야 병이 낮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나, 상점에서 장사를 하는 것이나,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것이나, 관청에서 공무원 노릇 하는 것이나, 군대에서 군인 노릇 하는 것이나. 전쟁터에 나가서 전쟁을 하는 것이나. 무엇이나 하나님과 동역 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에서

122.마음에 숨은 사람

스티븐슨이라 하는 유명한 소설 가운데 《지킬 박사와 하이드》 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지킬 박사는 유명한 과학자로서 아주 점잖은 분입니다. 자선 사업도 하는 신사올시다. 그러나 그 박사의 마음속에는 숨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하이드라고 했습니다. 하이드란 말은 영어로 숨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 하이드라는 사람이 그 사람 가운데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그 박사로 나타나지만 날이 어두워지면 이 숨은 사람이 나타납니다. 어두운 거리를 다니면서 나쁜 일을 합니다. 야비합니다. 음란하고 포악합니다. 사람은 하나인데, 겉은 이렇게 점잖은 신사요 박사인데, 그의 마음속에 숨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보통으로 자기 자신도 자기 마음속에 숨은 사람을 모릅니다.

123.다윗·솔로몬·네로의 숨은 사람
 
여러분! 다윗의 생활을 한 번 기억해 보십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좋은 아이였습니다. 착실한 목동으로 자라서 훌륭한 군인이 되었습니다. 좋은 정치가로서 칭송을 받든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마음에도 음행하고, 억울하게 우리야를 죽인 숨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 다윗이 젊을 때에 그의 마음속에 그런 숨은 사람이 있을 줄 생각 못했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생활을 보아도 역시 그렇습니다. 청년 시대에 무엇을 할지. 부귀를 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지혜를 많이 받아서 모든 정치와 재판을 지혜를 가지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고 봉헌식을 거행하며 경건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 솔로몬인데 그 후에 보면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위해서 심지어 예루살렘에 우상 숭배하는 신당을 짓기 시작했고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기까지 우상을 숭배한 적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마음에 이런 숨은 사람이 있을 줄 아마 자기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로마의 역대 황제 중에 가장 악하기로 이름난 네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학살했습니다. 전설에 의하건대 시흥(詩興)을 돋우기 위해서 심지어 로마성에 불을 질렀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였고, 지기 아내, 어머니까지도 죽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십니까? 이 사람의 생활의 한 페이지 가운데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맨 처음에 황제가 된 다음에 한 번은 결재서류가 올라왔는데 어떤 사람이 사형을 보고 받아서 황제의 인준을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때 네로가 탄식하며 말하기를“내가 어떻게 이 사람을 죽이라고 시인을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내가 글을 몰랐다면 좋지 않았겠느냐?”고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때에  자신도 그 후에 역사상에 나타난 흉악한 숨은 사람이 있을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제가 몇 주간 전에‘세브란스’병원에서 종합진단을 한 번 해보았습니다. 엑스광선도 여러 번 찌고 혈액 검사도 여러 번 하고 그 밖에 또 다른 검사를 여러 번했습니다. 물론 귀찮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지만 이런 진단이 필요합니다. 우리 몸에 어떤 때에 병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미리 진단하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혹 병을 치르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숨은 사람이 어떠합니까? 숨은 사람의 건강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빛은 엑스광선보다도 더 빛납니다. 더 밝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나 지신을 내어놓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로 날선 검보다도 더 예리해서 사람의 신혼골수를 쪼갠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139편을 저술한 시인은 마지막에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시옵소서 내가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옵소서”
내 속의 악한 행위를 내 스스로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살펴서 이것을 알고 회개할 것은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은 질문을 자문자답해 보세요.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과연 마음속에 숨은 사람이 거듭났습니까? 과연 내 마음속에 숨은 옛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온전히 못 박혀서 죽고 새 사람으로 변화하였습니까? 과연 내가 과거의 나를 청산하고 새로운 방향을 잡았습니까? 과연 내 속에 숨은 사람이 세상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까? 돈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까? 내 뜻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까? 스스로 물어 봅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그 눈으로 내가 나를 볼 줄 알아야합니다. <마음에 숨은 사람>에서

124. 뿌린 대로 거두리라

이조 역사 가운데에 당쟁(黨爭)사를 주의해 읽어보세요. 어떤 사람들은 작당을 해서 다른 사람을 모함합니다. 그 사람이 피를 흘립니다. 몇 해 후에 또 역시 그들이 모함을 받아서 지기의 피를 흘리고 넘어집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무고한 자기 아내를 다만 공부 못했다고 이유로 내쫓아 버리고, 알뜰한 공부한 여자를 새 아내로 맞아 왔습니다. 세월이 지나갑니다. 모든 것이 바뀝니다. 돈 있던 것도 다 없어졌습니다. 병까지 났습니다. 그런 때에 그 알뜰하게 맞아 왔던 그 아내가 남편도 버리고 아이도 버리고 다른 데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천대하면 자기가 천대를 받습니다.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 자기 가슴이 아플 때가 옵니다. 남을 속이면 내가 속임을 당합니다.‘남젭이 제젭이’라고 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출어이자 반어이자’(出於爾者 反於爾者)라고 네게서 나온 것이 내게로 돌아간다고 하는 옛 말이 그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어제 신문에 월남에 혁명이 일어나서 고 딘 디엠 대통령과 그의 동생이 자살했다고 하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면에, 성령으로 심으면 영생을 거둡니다. 선으로 심으면 선을 거둡니다. 덕으로 심으면 덕을 거둡니다. 의를 심으면 의를 거둡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둡니다. 친절을 심으면 친절을 거둡니다. 자비를 심으면 자비를  거둡니다. 화평(和平)으로 심어야 화평을 거둡니다

125. 어느 의사 이야기
 
전에 어떤 의사에게 어떤 가난한 여인이 자기의 심히 앓는 아이를 데리고 가서 이 아이 병을 좀 봐달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병은 중합니다. 이 부인이 돈은 없지마는 이 아이를 그냥 두면 죽을 수박에 없으니 어떻게 이 아이를 불쌍히 여겨서 고쳐 달라고 간절히 부탁합니다. 그 의사가 불쌍히 여겨서 돈 받지 못하고 약값 못 받고 라도 그 아이를 며칠 동안 정성을 들여서 고쳐주었습니다. 그 후 며칠 후에 6·25가 났습니다. 그만 이 의사가 공산당에게 잡혀갔습니다. 꼭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알지 못할 사람이 나서서 그 의사를 위해서 말을 하면서 이 의사는 이북에서 오긴 했지만 참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가난한 아이들 병을 거저 고쳐 주었다고 말을 합니다. 알고 보니 얼마 전에 자기가 돈 안 받고 고쳐준 그 아이의 아버지더라고요. 그래서 살았다고 합니다.

126.‘적선지가에 필유여경’
 
나치스 독일 사람들이 유대 사람은 수백 수천 수만을 학살하던 떼입니다. 어떤 비행조종사가 자기 비행기 속에서 무엇을 만지고 있는데 어떤 젊은 사람이 상기가 되어서 다짜고짜로 비행기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나는 당신이 살려 주지 않으면 죽겠는데 어서 이 비행기를 띄워서 독일 국경 밖으로 좀 데려다 달라”고 간절히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 사람이올시다. 이 사람의 뒤를 지금 비밀 경찰대가 추격해 왔던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서 얼른 비행기를 띄워 멀리 국경 밖으로 데려다 주고 왔다고 합니다. 물론 그 후에 다 잊어버렸지요. 얼마 후에 제 2차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 역시 독일에 있을 수 없습니다. 영국으로 가서 연합군의 공군으로 종군하면서 전쟁에 가담해 싸웠습니다. 한 번은 전쟁에 나갔다가 큰 사고가 나서 그만 자기가 탔던 비행기가 떨어지면서 중상을 입었습니다. 뇌를 상해서 도무지 의식이 하나도 없고 중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수술을 잘하는 이를 청해서 수술을 하고 두어 주일 후에야 의식을 회복하고 수술해준 의사를 만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는 가운데 그 의사가 바로 여러 해 전에 자기가 독일 비행장에서 건져준 그 유대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덕으로 심어야 덕으로 거둡니다.‘유음덕이면 필유양보’(有陰德必有讓)라고 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 숨은 덕이 있어야 양보가 있다고‘적선지가에 필유여경’( 積善之家必有慶) 이라는 글귀 역시 그 뜻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127.많이 심어야 많이 거둔다
 
성령을 쫓아 심어야 영생을 거둡니다. 또 양에 따라서 거둡니다. 영적 세계에 있어서도 이 원리가 변치 아니합니다. 고린도 후서 6장 9절에 사도 바울이 헌금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이런 말을 했습니다. 많이 심어야 많이 거둡니다. 적게 심으면 적게 밖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좋은 씨를 많이 뿌리도록 우리가 사(思)언(言)행(行)에 있어서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또 그리고 언제든지 종자보다는 수확을 많이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도 옥토에 떨어진 씨는 30배, 60배, 100배가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선을 조금이라도 뿌리면 하나님께서는 많이 우리에게 선으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나 아십니까? 악을 조금이라도 뿌리면 그 악은 많이 거두게 됩니다. 그러기에 호세아 8장7절에 보면“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말이 있습니다. 작은 바람으로 심었더니 회오리바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악도 역시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종류를 심든지 항상 조심해서 바로 심도록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추수의 원칙>에서

128.아버지와 아들 목사 이야기
 
이런 얘기가 있지요. 전에 미국에 어떤 부자 목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아들도 각각 교회 일을 맡아봅니다. 어느 주일 날 아버지는 차를 타고 자기 교회로 가고 아들은 자기 차를 타고 자기 교회로 갔습니다. 날이 다 저물 때에 아버지가 먼저 돌아오고 조금 후에 아들이 돌아오더니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하는 말이“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제가 은혜를 참 많이 받았습니다. 예배를 보고 올 때 어떤 운전사가 차를 몰고 앞으로 달러오기에 그것을 피하려다가 차가 뒤집어 졌지만 저는 그저 핸들만 꼭 잡고 있었습니다. 별로 다치지 않았고 차도 상한 데가 없이 이렇게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정말 감사하다”고 하면서 잠시 생각하더니“너만 감사한 것이 아니라 나도 감사하다 나는 아무런 사고 없이 예배를 보고 돌아왔으니 이거 얼마나 감사하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큰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으면 물론 감사할 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런 환난 없이 평범한 가운데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가도 깨닫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129.두 노인의 간증
 
어떤 분이 감사일 전날 꿈을 꾸었는데 꿈에 천당에 가보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지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구경을 합니다. 그런데 한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서 마치 서로 싸우듯이 큰 소리로 변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천당에도 싸움하는 사람이 있는가 싶어 곁에 가서 그 에기를 들어보았습니다. 두 노인들이 서로 은혜를 더 많이 받았다고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질이 나빠서 부모에게도 순종치 않고 학교에도 잘 가지 않아서 나중에는 깡패가 되고 도둑놈이 되어서 나쁜 짓을 하고 살인 강도죄를 짓고도 교도소에서 종신 징역을 받게 되어서 소망이 없었는데 그 교도소에 어떤 분이 들어와서 성경을 전해 주어 그것을 읽는 가운데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우리 죄인을 구원하려 오셨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해서 예수 님을 믿고 천당에 오게 되었다”하면서 하는 말이“내가 세상에서 갖은 죄를 지었는데 이렇게 죄 사함을 받고 천당에 오게 되었으니 나 보다 큰 은혜 받은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요”라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듣고 있던 다른 노인이 말하기를“그것도 큰 은혜이긴 하지만 내 얘기를 좀 들어보십시오. 나는 어릴 적부터 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고 주일학교에도 빠지지 않았고, 열 대여섯 살 났을 때 입교문답을 하고, 주일학교도 가르쳤고, 성가대도 하고 그러다가 집사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렇게 일하다보니 또 장로 투표에서 장로로 피택 되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작은 죄도 지었지만 남처럼 큰 죄는 짖지 않았고. 교회에 봉사하고, 선교사업을 하고, 봉사사업도하고, 교육사업도 하면서 일생을 평안히 살다가 이 천당까지 왔으니 나보다 더 큰 은혜가 뉘게 있단 말이요?”하고 변론한단 말입니다. 여러분도 어느 분이 더 큰 은혜를 받았는지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명백히 알 것은 이 두 분이 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환난 가운데서 은혜를 받는 것만 큰 은혜인줄 생각합니다. 혹은 많은 죄를 짓고 회개함으로써 은혜를 받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평범한 가운데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크다고 하는 것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꼬!”
  앞으로의 생활은 은혜를 보답하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 시편을 기록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봉사의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되겠습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이후에 우리의 생활은 무엇을 하든지 은혜에 대한 보답의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에서

129.스스로 만족하는 생활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의 생활을 할 줄 아는 비결을 배우면 이야말로 큰 보배가 될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6자에서도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 편지 할 때에 그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자족한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유익이 되는데 우리 사람이 세상에 올 때에 가지고 온 것이 없고 또 세상에서 갈 때에도 가지고 갈 것이 없다고, 그저 사람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자족할 생각을 하는 이 은혜를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줄 생각합니다. 이 자족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만 이렇게 말한 거이 아니고 이 편지를 쓸 때에 헬라의 많은 철학자들 가운데도 이 자족에 대해서 교훈 한 분들이 있습니다.

130.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 대왕
 
특별히 그 당시에 스토익파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자족을 그들이 윤리의 최고 표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모든 행동의 가장 높은 덕은 이 자족에 이르는 것이라고, 이 철학자들은 가르쳤습니다. 보통 우리 동양식으로 말한다면,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는 그런 심경에 있는 것이 가장 귀하다고 항상 가르친 것입니다.

  그리해서 이 철학자들은 이 자족의 심경에 이르는 길을 간단히 두 가지로 가르친 것입니다.
 하나는 모든 욕망을 더는 것입니다. 그들이 늘 하는 말대로 물건을 더 할 것이 아니고 욕망을 덜음으로서 사람은 자족한 생각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늘 가르쳤습니다. 이 말씀은 일리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 십만 원 돈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족의 마음을 기진 사람이 있고 백 만원 돈 가진 사람도 항상 부족하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까닭은 한 사람은 돈은 많지마는 그보다 욕망에 더 큰 까닭이이고 그래서 이 사람들은 어떻게든 욕망을 주리는 것이 이 자족의 생활에 들어가는 첩경이라고 항상 가르쳤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불교의 소위 욕심을 금하여 온전한 자리에 나간다고 하는 교훈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해서 그들은 어떤 물건도 원하지 말고 아무 사람도 원하지 말라.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면 그 지경이야말로 온전한 자족의 지경이라고, 심지어 내 생명에 대한 욕망까지도 버리라고, 그래야 온전한 그 자족의 자리에 이른다고 이들은 가르쳤습니다.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는 그 대표적 인물이 말하자면 디오게네스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아주 간단한 생활을 했습니다. 밤에는 무슨 퉁 나무 위에서 잤다고 랍니다.
한 번은 아침에 일어나서 통나무 위에 앉아 있노라니까, 그 때에 큰 세력을 가졌던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하는 이가 유명한 철학자를 찾아보려 왔습니다. 와서 그 대왕이 하는 말이 “선생님께서 무엇을 원하든지 다 드릴 수 있는데 무엇을 원하는가?” 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답이“나는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소, 당신이 내 앞에 서서 햇빛을 가리우니 좀 비켜 서 주시기를 바랍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 이르러야 자족의 자리에 이른 것이라고 이 분들이 가르쳤습니다. 또 이 사람들은 자족의 자리에 이르려면 감정을 말살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이런 감정 때문에 우리 마음에 자족이 깨지고 안심이 깨지니까 이런 모든 감정을 할 수 있는 데로 말살해서 감정을 초월하는 생활을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가령 쓰던 그릇 같은 것이 깨졌을 때 어떤 부인들은 그것 때문에 마음을 쓴단 말입니다. 아예 마음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그릇 깨진 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큰그릇이 깨져도 그렇게 생각하고 혹, 내가 사랑하며 기르는 고양이 같은 것이 그만 다리가 부러져도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말고,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감정을 초월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라고 그들은 가르쳤습니다.

131.에피크레터스의 일화
 
여기 그런 방면으로 힘을 쓴 에피크레터스라는 사람은, 본래 종으로서 이 철학을 연구한 사람인데 그 사람에 대한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이 분이 어떤 자리에 있든지 자족한 마음을 가지고 살며 감정을 초월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초월하나 보자고 하여 그 사람의 다리를 막 비틀었습니다. 그러니 앞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프다는 소리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
 그래도 자꾸 비트니까 이 사람이 하는 말이“당신들이 내 다리를 비틀면 아마 내 다리가 부러질 것 같소”그렇게 말하더랍니다. 아 그래도 이 악한 사람들이 그냥 비틀어서 결국은 다리가 뚝 부러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 아프다고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안하고“그렇게 자꾸 비틀면 부러지겠다고 내가 그러지 않았습니까?”그 말만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 생각에는 이렇게 감정을 순전히 초월하는 가운데서 큰 자족의 경지에 이른다고 믿고 이렇게 하려고 애썼고 가르쳤습니다. 순전히 인간의 의지의 힘으로써 이런 방면에 이르기까지 성취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줄 생각합니다. 몇 사람 안 되는 모양입니다. 또 혹 이런 자리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이 아파도 아픈 줄도 모르게 되어 버린다면 그게 목석이지 어디 사람입니까? 사실 우리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은 이 스토익 학자들이 사람의 마음을 광야로 만들어 놓고는 이것이 평화라고, 이것이 자족이라 말한다고 비평한 것입니다.     
 
132.바울의 자족 비결
 
여기 사도 바울이“내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족을 배웠노라”고 하였는데 어떤 길을 통해서 자족을 배웠습니까? 욕망을 말살해서 배웠습니까? 감정을 말살해서 배웠습니까? 그런 것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을 연구해 보면 사도 바울은 요망을 말살하지 않고 보다 더 고귀한 욕망을 가지고 그 욕망을 성취함으로 자족을 얻은 것입니다.
  빌립보 3장7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깨닫고, 그리스도를 사실 알고 보니 그 지식이 얼마나 고상한지 그 지식을 알고 그리스도와 서로 동행하고 그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된 다음부터는 다른 모든 세상의 욕망은 자연히 봄 동산의 눈처럼 쓰러졌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보니,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보니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만족한지 세상의 욕망은 자연히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자족의 생활에 들어간 비결입니다.           <일체의 비결>에서

133.작은 일이라도 성실히
 
작은 것들을 조심해야 됩니다. 작은 일을 크게 알아서 작은 일을 바로 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작은 일에 충성한 자가 큰 일에도 충성하고,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 한자는 큰 일에도 충성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니 내가 큰일도 맡기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작은 일에 부지런한 사람이 큰 일에도 부지런합니다. 작은 일에 양심적으로 하는 사람이 큰 일에도 양심적으로 합니다. 좋은 생각은 아무리 작아도 어떻든지 우리 마음 가운데 품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진, 선, 미의 모든 생각은 아무리 작아도 항상 우리 마음가운데 품도록 힘은 써야 합니다. 작은 핑계는 아무리 작을 지라도 어떻든지 우리가 안 하도록 힘을 써야합니다.

134.와나메이커의 친절
 
여기 지금 YMCA를 재건하느라고 굉장히 힘을 쓰는 중에 있지마는 저는 이 YMCA일을 늘 볼 때마다 본래 이 YMCA에 기부해서 지어주었던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실업가 와나메이커(Warnermaker)라고 하는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 사람의 일화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그이가 젊어서 어떤 상점에 가서 물건을 하나 샀는데 사 가지고 와서 보니까 자기가 꼭 원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상점에 도로 가지고 가서“이거 내가 꼭 원하는 물건이 아니니 이걸 좀 바꿔 주시요”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상점 주인이 대단히 성이 나서“아, 한번 사간 것을 뭘 다시 가지고 왔는가?”고 하면서 불친절하게 거절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천년 은 대단히 섭섭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때에 이 청년은 그것 때문에 반발하지 않고 왜 장사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손님에게 불친절하나? 나는 앞으로 친절하게 장사를 해보겠다. 어떤 사람이 물건을 샀다가 다시 바꿔 달라고 해도 기쁜 마음으로 친절히 바꿔주겠다 하는 결심을 하고 작은 상점을 경영하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친절 본위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사업이 잘 되어서 지금 필라델피아 나 뉴욕에 가 보아도 굉장한 와나메이커 빌딩이 있고 큰 상점이 그냥 있습니다.
  작은 친절을 우리가 힘 쓸 줄 알아야 됩니다. 선은 아무리 작을 지라도 하도록 힘을 써야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냉수 한 그릇을 목마른 사람에게 주어도 내 이름으로 주면 상을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작은 의무를 바로 하도록 힘을 써야합니다.          

135.미국의 한 철도회사 사장
 
내가 전에 어렸을 때에 어떤 신문을 보니 미국의 큰 철도회사 사장이 죽었는데, 본래 사장이 그 회사에 들어갈 때는 사환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사환으로 들어가서 자기의 맡은 바 책임을 얼마나 잘 했던지 점점 올라가서 마지막에는 그 회사의 사장으로 있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작은 책임을 바로 하는 사람이 큰 책임도 바로 합니다.
  여러분은 다 큰 전도자가 될 수 있을지 그건 모르겠어요. 여기 빌리그래함 목사처럼 한꺼번에 수백 명 수천 명을 회개시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 하나가 개인적으로 내 친구, 나  아는 사람에게 권면해서 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는 개인 전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역사를 본다면 큰 부흥회를 통해서 그 때의 교회가 발전된 것은 아닙니다. 이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개인적으로 권면해서 이 작은 개인 전도를 통해서 마지막에 온 로마 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든 것입니다. 작은 의무, 작은 전도를 우리가 힘 쓸 때에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36.스파르타의 교훈
 
옛날 헬라의 스파르타 나라에서는 항상 그 국민들에게 외쳤던 말이 있습니다.“너희 하나 하나가 벽돌이 되라 산 벽돌이 되라”그것은 그 때 스파르타 사람들이 벽돌로 성을 쌓고 있었는데 너희 하나 하나가 산 벽돌이 되어서 나라를 지키라고 한 뜻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군인은 하나 하나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산 벽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교우는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보키 위해 하나 하나가 벽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땅에 떨어지는 밀 알이 되면 얼마나 많은 수확을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하나 하나가 큰 등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 하나가 작은 촛불이 되어서 여러분이 사는 그 곳을 밝힌다고 한다면 온 한국이 아마 거이 밝아 질 것입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천사 같이 말못하고 바울 같이 못하나 네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우리 하나 하나가 개인적인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 개인 전도를 통해서 온 국민을 구원하고 온 민족의 대부분이 기독교로 돌아오게 될 때에 자연히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방면에 큰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큰 문제는 아직까지 교회가 많다고 하지만 서울의 전 인구로 보면 아직도 열 사람에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백 명에 일곱 정도입니다. 아이들까지 전부 다해서 백 명에 일곱 명 정도입니다 <작은 일의 날>에서

137. 진리의 책 성경

성경을 주신 목적은 인간을 죄악 가운데서 구속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 성경이 지금 까지 많이 읽히고 보급되나요?  이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씌어졌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주 되시는 그리스도를 그려주십니다. 성경의 목적은 인간을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여서 새 사람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고자 하는 데에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 성경과 인간과의 관계를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어떤 축복을 받게 됩니까? 물론 여러 가지 고대의 역사와 문화도 배우게 되지만 그러나 제일 큰 축복은 누구든지 읽으면 이 가운데서 구주를 발견해서 죄를 깨닫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악인이 변해서 선한 사람이 됩니다. 음란한 사람은 성결한 사람으로, 거짓된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 됩니다. 살인 강도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대로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138.위대한 책
 
세상에 위대한 서적이 물론 많이 잇습니다. 미국의 어떠한 대학에서는 소위 위대한 책에 대한 과목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동서고금을 통하여 위대한 책을 골라 통독을 시키는 그런 학과가 생겼습니다. 플라톤이니, 단테니, 혹은 동양의 논어, 맹자, 도덕경 같은 책들을 한 번 읽어보도록 힘을 쓴다고 합니다. 세상에 위대한 책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책을 읽어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알고 구주를 만나서 새 사람이 되는 책은 성경 하나밖에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새 사람이 되었지만 아직 어립니다. 이 어린이가 자라기 위해서는 도덕의 젖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젖이 필요합니다. 이 성경은 생명의 양식, 도덕의 젖입니다. 성장을 계속해서 읽을 때 심령이 자라고, 건강하고, 힘을 얻습니다. 성경을 읽으므로 모든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슬픈 일을 당할 때에도 위로를 받고, 사업에 실패하고 낙심할 때에도 새로운 용기를 얻고, 성경을 통해서 새로운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은 매일 매일  좋은 음식을 먹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 신앙의 유일한 표준입니다. 전통도, 이성도, 어떤 감정도 신앙의 표준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 신앙의 표준입니다. 이단과 사설이 횡행하는 이러한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앙의 정로(正路)를 밟아갈 수 있는가 ? 성경을 읽고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행위의 정확한 표준입니다. 성경에는 지고의 윤리가 있습니다. 최고의 도덕적 법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십계명을 비롯해서 산상보훈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행해야 할 모든 구례를 분명하게, 똑똑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새 사람이 되게 하고, 생명의 양식이 되고, 신앙과 모든 행위의 표준이 됩니다.

139.《벤허》에 얽힌 이야기
전에 허다벌스 잉그설이라고 하는 무신론자가 역시 무신론자의 친구 류 윌리스라는 대장에게 기독교를 반대하는 책을 쓰라고 권면했습니다. 그 권면을 듣고 그런 책을 쓰기 위해서 우선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려고 성경부터 읽어보았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어 가는 가운데 생각이 점점 변했습니다. 나중에는 회개하고 오히려 성경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분이 예수의 생활을 그 유명한 《벤허》라는 책으로 썼던 것입니다.

140.짐 윌슨 박사 이야기
 
성경의 감화력은 이렇습니다.
 성경을 반대하는 사람의 내면을 살펴보면 거의가 성경을 읽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전에 프린스턴에 짐 윌슨 박사라는 유명한 구약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프린스턴 대학의 학생들이 성경토론을 하려 왔습니다. 이 늙은 박사는 웃으면서 “성경토론 하는 것은 좋은데 그래 성경을 몇 번이나 읽어 봤나 요?”하고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고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박사가 정색을 하면서 하는 말이“나는 적어도 40년을 밤잠 안 자고 몇 백 번 읽고 연구해서 믿지 못할 것이 없으니 우선 몇 번 읽고 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보통 성경을 읽지도 않고 반대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묵상해 보면 어려운 문제는 성경 자체가 모두 대답해 줍니다.      

141.성경은 가난한 자의 대헌장
 
성경이 우리 사회에 주는 영향은 어떠합니까? 바로 내일 모래 12월 10일이 세계 인권 선언일 이고 이 주간이 인격 옹호주간입니다. 한국에 있어서 얼마나 적절한 주간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인권 평등의 사상의 원천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이 가는 곳마다  인간의 죄와 무지와 정치적, 사회적 모든 구속에서 해방됐습니다. 노예제도는 없어졌고, 남존여비의 사상이 타파되었으며, 만인 평등의 사상이 사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민주주의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전에 토마스 헉슬리의 말과 같이 성경은 가난한자와 피압박자의 대헌장입니다. 인간은 성경 없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142.성경은 자유의 대헌장
 
성경은 자유의 대헌장인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성경은 박애와 자선사업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사회에는 병원이 생기고, 고아원이 생기고, 양로원이 생기고, 적십자사 운동이 생기고, 모든 인도주의 운동이 이러 납니다. 성경이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도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는 곳에는 미신을 타파하고 학문의 연구를 권장케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누구나 성경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된 이후 자연과학도 발전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최고의 문학과, 미술과, 음악과 같은 예술은 성경의 감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실도 우리는 압니다. 
  성경이 가는 곳에 그 사회의 도덕이 향상됩니다. 이렇게 성경은 국가 사회 도덕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때에 어떤 외국 사절이 와서“영국이 이와 같이 흥왕(興旺)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고 물어보니까, 여왕은 책상 위에 놓인 성경책을 가리키면서“저 책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143.성경은 항상 새로운 책
 
성경은 오래 된 책 같지만 항상 새로운 책입니다. 성경 가운데 새로운 진리가 무진장으로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성경 가운데 우리 인류가 찾아내지 못한 진리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16세기에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새로운 진리가 발견되어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고 18, 19 세기에는“온 세상에 가서 진리를 전파하라”고 하는 새로운 말씀이 발견되어서 세계 선교운동이 일어났습니다. 20세기에는‘교회는 하나라고 하는 이 진리가 발견되어서 신 구교를 막론하고 이른바‘에큐메니칼’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오래된 책 같지만 항상 새로운 책입니다. 교회는 성경을 중심 하여 부흥합니다.
  성경을 상고하는 교회가 성공합니다.
  교회는 언제든지 성경을 중심 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의 뜻이 여기 있습니다.
  지난주간에 로마에서 제2차 바티칸 회의가 폐회되면서, 미사 때에 라틴어를 쓰지 않고 자기 나라 말을 쓰는 것이 하락되었고, 다른 교회와 결혼하는 것도 허락되었다고 하는 이런 좋은 소식을 듣고 우리가 다 환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성서의 바깥만 본 것에 불과합니다. 혼상(婚喪)문제, 마리아 예배, 미사문제, 교황 전제정치, 이런 것이 좀더 성경에 가까이 와야 비로소 신구 교회의 합동문제는 선언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중심으로 교회가 돌아와야 합니다.
  개인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이웃 사람이나. 감정에, 또는 행동에 너무 따라가지 마세요. 언제나 성경 중심의 신앙 생활을 해야 실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전파하고, 성경대로 살고 죽어야만 합니다.        <성경은 어떠한 책인가?>에서

144.주님을 닮자
 
예수 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그 갈대를 회복하시고, 그 희미한 불을 돋우어서 큰 등대를 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이와 같은 정신 가운데서 살지 아니 하리 오 마는 특별히 이와 같은 계절을 맞아서 주님의 이 정신을, 이 성품을 우리는 좀 배워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와 같은 계절에 병난 사람들을 위해서, 그 가난한 형제를 위해서, 모든 죄인들을 주님 앞으로 구원해 내기 위해서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도 이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쌀을 모으는 것도 이러한 목적이 있기 까닭입니다. 이 계절에 작은 믿음 잇는 이들을 북돋워 주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솔선수범해서 상한 갈대, 스치고 밟힌 불쌍한 이들을 함께 붙들어 주어야 됩니다.

145.펄벅의《살아 잇는 갈대》
 
미국의 유명한 여류 소설가 펄벅 여사가 한국에 대한 소설을 쓰셨지요. 펄벅 여사는 더 리빙 리드(The Living Read), 《살아 있는 갈대》에서 우리 민족을 갈대로 보았습니다. 갈대도 살아 있다고 하니 소망은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상한 갈대입니다. 38선으로, 6·25로, 거듭되는 혁명으로, 거듭되는 실정으로, 경제파탄으로 상했습니다. 그 상처가 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낙심하고, 어떤 이는 절망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범죄는 더욱더 격증해 갑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해외로 피하려는 사람도 많이 잇습니다. 이 상한 갈대를 구할 이는 누구이며, 이 꺼지는 민족의 혼을 다시 북돋을 이가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님뿐이며 우리 주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님만이 우리 민족을 다시 살려 밝은 빛을 비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다 주님께 나와서 새 사람이 되어야, 주님의 정신을 가지게 되어야, 제3공화국도 바로 건설될 수 있을 것입니다.  <상한 갈대>에서

146. 빛의 생활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사람들이 사귐은 무너질 때가 없습니다. 영원히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가 또한 그런 사귐에 대해서 생각할 것은 언제든지 죄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나뉘게 합니다. 부부간에 죄가 들어올 때에 부부도 서로 이혼하는 수가 잇습니다. 부자간에 죄가 들어올 때에 부자도 서로 불상견(不相見)하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친구 사이에도 죄가 들어올 때에는 그 친구가 나뉘어지게 됩니다.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사람들의 사귐만이 참으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성도의 교제, 성도의 사귐이 매우 필요합니다. 이것은 피차에 도움이 됩니다. 또 한 가지로 힘을 합해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두운 세력과 싸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147.썸바디’와 ‘노바디’
 
제가 전에도 이런 말을 한 줄로 생각하는데 여기 우리말로는 적절한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지만 영어에‘썸바디’(Somebody)라는 말이 있고, ‘노바디’( Nobody)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썸바디 라고 하는 말은‘좀 아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아무개가 우리동네 썸바디하면 좀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노바디’라는 말은‘누군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되 어떤 교회의 교인이 되었으면 그 교회 안에서 썸바디가 되어야합니다. 좀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에 와서 같이 예배는 보지만 다른 사람이 전연 모르는 노바디가 되면 그것은 성도의 교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와 같이 좀 큰 교회에서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148. 사귐의 필요성
 
우리가 이 성도의 교재를 가지는 게 필요한데 성도의 교재를 가지려고 한다면 여러분이 여러 단체에 가입해서 함께 활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여러분이 들어오실 때에 주보를 다 받으신 줄 압니다. 여기 각 성경 공부반의 장소와 시간을 연령에 따라서 참여 할 수 있게 안내해 놓았습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들어가서 같이 성경도 공부하고, 피차에 서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빛 가운데서 행하는 이들에게 빛의 사귐이 있습니다. 이 사귐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내게도 필요하지만 피차에 사귐을 통해서 힘을 합해 이 세상에서 어두움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떼도 아주 중요합니다.   <빛 가운데 행하라>에서
                                   
149 심령의 진공 상태
 
자연계나 영계에서는 진공 상태를 오래 용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물병에 물이 하나 가득한 것을 쏟아보세요. 물이 나올 때 콜록 콜록 하는 소리가 드립니다. 왜 그런 소리가 들리는지 압니까? 물병에 물이 가득했는데 물을 쏟으니까 그 병 속에 진공 상태가 됩니다. 비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밖에 있는 공기가 얼른 그 곳에 들어가 차지하려고 파고 들어가는 소리가 그렇게 납니다. 
  이 세상에 진공상태가 오래 용납될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심령이 그렇습니다. 사람의 심령에 진공상태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빈집에 흔히 도적이 들기 쉬운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소극적으로 죄를 떠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여야 그 신앙생활이 건전한 신앙생활이 됩니다.

150.지옥의 행랑방
 
단테의《신곡》을 읽어보면 단테가 유명한 시인 붜질이라 하는 사람의 인도를 받아서 지옥 구경을 갑니다. 얼마쯤 내림 길로 가다가 보니까 조그만 문이 있는 데 그 문 위에는 이 문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소망을 버리라는 글귀가 씌어 있습니다. 지옥 속에는 소망이 없는 모양입니다. 안내자의 뒤를 따라서 그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제일 첫 방에 어떤 무리들이 있는데 그들은 슬픈 눈물을 흘리며 탄식을 하고, 원망을 하고, 근심을 하고, 걱정을 하고, 심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단테가 자기 안내자 붜질에게 물었습니다.“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그 때에 안내자가 대답하는 말이“이 사람들은 전에 세상에서 살 때에 소위 중립주의자들인데 하나님을 배반해서 나쁜 일을 별로 한 것은 없지마는 하나님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저 세상에서 살 때 꼭 자기만 위해서 산 이기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물론 천국이 이런 사람을 용납할 수 없어 지옥에 부득이 오게되었는데 지옥에서까지 이런 사람들은 멸시를 받아 이렇게 첫 방에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마 지옥에도 행랑방이 있는 모양입니다. 우tm운 이야기 같지마는 우리에게 큰 경고를 주는 말씀입니다.

151떠돌이 교우들
 
제가 이런 말을 이따금 듣습니다. 여러분, 용서하시고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웃자는 생각으로 이런 말도 하는 줄 압니다.
  제가 들은 대로 사람들은 우리 영락교회에 대해서 말하기를“아 영락교회에 가면 어째서 예배보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아느냐?”고 물으니까“그거야 알기 쉽지, 왜 영락교회에 가면 사람이 많으냐 하면 이 서울 장안에는 이 교회에도 저 교회에도 속하지 않고 그저 빙빙 돌아다니는 떠돌이 교우들이 많은데, 이 교인들은 주일날 아침이 되면 오늘은 어느 예배당에 가볼까 생각하다가 가만 보니까 영락교회로 오는 사람이 많거든, 그러니까 사람 많은 데로 따라 가보자 그래서 영락교회에 예배하려 오는 사람이 많은 거야”어떤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은 좀 다른 대답을 했습니다.“그 이유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지요. 왜냐하면 영락교회에 가면 그저 예수 믿기가 제일 쉽지요. 자그마한 교회에 간다면 가서 몇 달되지 않아서 이런 일을 해주시오, 저런 일을 해주세요, 부탁이 많은데 영락 교회에 가면 몇 해 있어도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부탁하는 게 하나도 없고, 또 자그마한 교회에 가 보면 연보 할 때에도 특별히 대표자가 와서 연보 좀 더 해주시오, 좀더 해주시오 이러는데, 영락 교회에 가면 그저 연보주머니 돌아갈 떼 십 원 짜리 하나 넣으면 그 다음엔 체면유지는 잘 된단 말이요. 그러니 이거해라 저거해라 하는 말없이 그저 공짜로 예수만 믿으려면 영락교회에 가야지요”
  여러분,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스운 이야기 가운데도 무슨 뜻이 있는 줄 압니다.

152 교회는 십자가의 군대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신앙생활에는 방관자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세계에는 중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생활에 구경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에서 여럿이 같이 모여서 이 예배를 들이는 것은 교회의 중대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교회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와 같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헤어지는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리하실 때에 성령을 이 땅에 보내어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이 땅에서 주님의 일을 계속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 교회는 군대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천국의 군대입니다. 십자가의 군대입니다. 이 땅에 남아 있어서 악한 세력과 싸와 승리해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교회가 세워 진 것입니다
교회생활에 있어서 떠돌이 교회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입교한다는 것은 군대에 입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해야 됩니다. 교회는 악마와 죄의 쇠사슬에 얽매인 불쌍한 영혼을 구원해서 해방하는 전도의 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 전도를 힘쓰는 것이고 남녀전도를 조직해서 전도를 힘쓰는 것이고 노방전도대도 조직하는 것이고, 전도 인을 파송하는 것이고, 방송전도 와 문서전도도 하는 것이고, 여러 가지로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모으는 자냐, 헤치는 자냐?>에서

153. 인생의 아침

고요히 생각해서 하루의 생활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에 옛날부터 일일지계는 재어신(一日之計在於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다는 말입니다. 천년시대는 일생의 설계를 하는 때입니다. 설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일생의 성공과 실패가 달렸습니다. 그러기에 청년시대에는 요새 말로 비전(幻見)이 있어야 합니다. 이상(理想)이 있어야 합니다. 포부(抱負)가 있어야 합니다. 입지(立志)가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공자의 말씀을 들어보아도 어십오이지유학하고 삼십이립(於十五志有學 三十而立)이라 했습니다. 열 다섯 살 날 때 학에 뜻을 두고 서른에 섰다는 말입니다. 입지란 뜻입니다. 동양에 유명한 철학자 왕양명(王陽明)이 말하기를 입지가 없는 사람은 키가 없는 배와 같고 재갈이 없는 말과 같다고 했습니다. 방향이 없는 사람입니다.

154.청년 때 하나님을 찾아야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 인생의 봄을 맞아서 일생을 그르치지 않을, 일생의 설계를 꼭 바로 하는 비결이 하나 있는데 무엇인지 압니까?
  조물주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는 것입니다. 늘 하는 말이지마는 우리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만들지 못합니다. 내가 나를 지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에 이런 그릇도 만들고, 저런 그릇도 만들고, 일정한 목적에 의해서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일생을 지으실 때에도 하나님의 일정한 목적에 의해서 우리를 각각 조금씩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천년시대는 가장 원기가 왕성한 떼입니다. 가장 힘이 많은 때입니다. 이 때에 모든 정력을 집중해서 일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일을 한 사람들의 역사를 보면 인생의 아침에 일찍부터 즉 소년시대, 청년기 때부터 일을 했습니다.

155. 데모스테네스 · 시세로
 
헬라의 유명한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같은 사람은 벌서 17세부터 웅변가로서 국가에 봉사했다고 합니다. 시세로(Cicero) 같은 사람은 스물 여섯 살 때 벌서 유명한 법률가가 되어서 국가에 대한 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156. 모차르트 · 헨델
 
음악가 중 모차르트 같은 사람은 여섯 살 때부터 독일 황제 앞에서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헨델 같은 유명한 사람은 열 살부터 작곡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157.휘트필드 · 스팔존 · 리빙스톤 · 칼빈
 
부흥 목사 가운데 유명한 죠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 같은 사람은 스물 한 살부터 유명한 부흥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펄존 같은 사람은 벌서 스무 살에 유명한 런던의 헤본애플교회의 목사가 된 것입니다.
  리빙스톤 같은 사람은 스물 네 살에 이미 아프리카 지방에 가서 흑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요한 칼빈 같은 사람은 스물 여섯 살에 이미《기독교강요》를 썼습니다. <신앙의 아침>에서

158.예수를 바라보자

봄 동산의 풀이 어떻게 자랍니까? 태양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자랍니다. 어떻게 꽃이 아름답게 핍니까? 햇빛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아름다워집니다. 어떻게 괴실 나무가 많은 열매를 맺습니까? 햇빛을 보는 가운데서 열매가 맺히고 익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심령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우리 심령이 장성합니다. 우리 심령에 꽃이 핍니다. 우리 심령에 열매가 맺습니다. 예수를 바라봅시다.
 
159.주님의 얼굴을 본 사람들
 
성 프랜시스는 젊었을 때에 성 다미안의 조그마한 예배당에서 홀로 십자가 상 앞에서 기도할 때에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온전히 변해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라비아 교회를 창설한 진젠돌프 백작 같은 사람도 젊었을 때 어떤 미술관에서 예수 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얼굴을 보다가 신령한 주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제일 유명했던 스펄존 목사도 소년 시대에“땅 끝에 잇는 백성들아 나를 바라보고 구원을 얻으라”고 하는 말을 듣고 다른 것을 하라면 못하겠지마는 예수를 바라보는 거야 못할 것이 있나 하고 언제나 예수를 바라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 새 사람이 되어서 유명한 설교가 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바라봅시다
  튼튼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아야 시험에 안 듭니다. 병날 때에도 예수를 바라봅시다. 낙심하지 맙시다. 기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슬플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성공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실패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학교에 입학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하교에 입학을 못 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봅시다.
  언제나 예수를 바라봅시다. 살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죽을 때에도 예수를 바라봅시다.    <예수를 바라보자>에서

160.그리스도의 얼굴
 
누가 복음19장에 보면 삭게오라고 하는 세리장이 예수의 얼굴이 보고 싶어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 님이 지나가실 때를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수의 얼굴을 보고싶어 하는 분이 많이 계신 줄 압니다. 우리 가운데도 많이 계신 줄 압니다. 그러나 사람은 예수의 얼굴이 어떠하였는지 확실히 알 길이 없습니다.

161.‘거룩한 세마포’이야기
 
이태리에 큐링이라고 하는 곳에 옛날부터 예배당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보물로서 보존되어 오는 홀리 슈라우드(Holly Shroud)즉 거룩한 세마포라고 하는 홑이불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세마포는 에수 님을 무덤에 장사할 때에 그 유해를 쌌던 세마포라고 합니다.
  그 유해를 싸고 있던 동안에 어떠한 화학작용이 일어났는지는 모르나 그 홑이불 위에 예수 님의 모습이 사진처럼 박혀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예수 님의 귀가 얼마나 크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 전설이 얼마나 확실한지는 믿기가 대단히 어려운 줄 압니다.
  제1세기에는 사진 만드는 법을 몰랐습니다. 예수 님을 누가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조각으로 만들어 보았다고 하는 이도 없습니다.
  더욱이 1세기나 2세기에는 기독교 예술가들이 감히 예수의 얼굴을 그려볼 생각도 못했습니다. 첫째는 너무 황공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렇게 하면 혹  둘째 계명에 저촉이 안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 역사를 보면 3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기독교 예술가들이 예수 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5, 6세기에 내려오게 되면 예수 님의 얼굴을 그린 사람들이 많아져서 성화를 예배당 안에 가득히 붙여 놓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교회 안에 이렇게 성화가 너무 많은 것이 좋으냐 좋지 않으냐 이런 굉장한 논쟁이 벌어진 때도 있습니다.
지금도 특히 동방교회 즉 헬라 정통교회에 가보면 그저 천장으로부터 온 벽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으로 장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상화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 성화 가운데 제일 유명한 성화들은 종교개혁 이후에 그려졌습니다.

162.하나님의 형상
 
우리가 흔히 보는 하프만의 유명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얼굴이든지, 혹은 다빈치의 유명한 성 만찬식에 나타나신 주님의 얼굴, 혹은 홀맨 한트 같은 이의 세계의 빛이라고 하는 그 그림에 나타난 예수 님의 얼굴이 아마 대표적인 것이고 제일 유명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부가 상상화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친히 볼 수 없다고 그다지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줄 압니다. 예수께서 도마에 말씀하시기를“너는 나를 보고 믿으나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더 복이 있느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외모를 보는 것보다도 우리의 마음 눈으로 그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잇습니다. 가령 요한 복음 1장에 보면 사도 요한 이 주님을 보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혹은 이렇게도 기록했습니다.“보라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돼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가 나타내셨느니라”이것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증언하는 사도 요한의 말씀입니다.
오늘 아침에 읽었지마는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163.주님 얼굴을 계속해서 바라보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우리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주의 얼굴을 바라보는 중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말할 수 없는 그 연민, 그 긍휼(矜恤), 그 자비를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물론“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고 궁창(穹蒼)이 그 손으로 만드신 것을 나타내어”보입니다. 그러나 이 굉장한 대 우주도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오직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에만 하나님의 참되고 지극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찬송가 일 절과 같이“머리와 수족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나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 위해 쓰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우리가 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다시 말하여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 얼굴을 앙망(仰望)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돌이켜서 나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네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요, 네 죄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리해서 우리는 겸손히 주님께 나와 죄를 회개해야 하며 그 때에 자기 죄 사함과 구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가운데 구원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계속해서 바라보게 되면 우리의 얼굴도 점점 빛나게 됩니다. 모세가 오랫동안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대면하고 내려올 때에 그 얼굴이 빛났다고 하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스테반이 핍박을 받아 돌로 맞아서 마지막에 순교할 때,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빛났다고 하였습니다. 스테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우편 서신 예수 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그의 얼굴까지 빛나게 된 것입니다.
  달빛이 어떻게 비치는지 아시지요? 태양광선에 반사되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영광을 항상 앙망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또 우리 얼굴에도 어느 정도까지 반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얼굴은 우리 사람의 마음의 거울인데 우리의 마음 눈이 항상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서 우리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면, 아마 어느 정도까지 그 빛이 우리 얼굴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164.굶주린 자에게 먹이라
 
옛날 율법을 읽어보면 곡식을 거둘 때 전부 다 거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모퉁이 이곳 저곳에 좀 남겨 놓고 거두라고 했습니다. 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그 이삭을 주어다가 먹고 살 수 잇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감람나무를 털 때 아주 다 털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좀 남겨두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그것을 따서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옛날 나오미와 룻이 멀리 모압 땅에서 돌아와서 베들레헴에 왔는데 자기 땅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 살았어요? 이삭 주어 먹고살았습니다.

165.사마리아인의 자세
 
배고픈 이가 빵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적당한 기본 권리입니다. 그러기에 성 프랜시스는“ 가난한 이가 빵을 달라는 것은 자기 것을 달라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하나님께서 먹고살도록 낸 것인데 먹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적당한 권리라는 말입니다. 우리 동양에도 옛날부터 내러오는 말 가운데 천불생무록지인(天不生無錄之人)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녹 없는 사람은 만들지 않으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 비슷한 사상이 그 가운데 내포된 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굶주린 이들을 먹이는 것은 사회정의입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이기를 거부한다고 하면 그것은 사회정의에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거름 더 나아가서 굶주린 이들을 먹이는 것은 인도입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할 일입니다.
여러분은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잘 아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불한당을 만났습니다. 돈을 다 빼앗겼습니다. 많은 매를 맞고 넘어져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었습니다. 그 때 마침 어떤 fp위 사람이 자나갔습니다. 그러나 보고만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에 제사장이 또한 지나갔습니다. 그 역시 물끄러미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유대 사람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외국 사람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도와준 이야기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에도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거리에 굶주려서 쓰려진 동포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 아닌 미국 사람들이 구호(救護)품을 가지고 오며 잉여 농산물을 보내서 이 굶주리는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바로 이런 때에 한 동포가 우리로서 더욱이 레위 사람과 제사장의 직위에 있는 한국의 교회가 이 광경을 보기만 하고 그저 지나간다고 하면 이것은 인도를 무시하는 길이고, 이웃됨을 무시하는 것이고, 정의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굶주리는 이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굶주리는 이에게 먹이는 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할 일입니다.
 또 기억하십니다. 굶주린 동포를 우리가 도와주는 것은 사실 주님을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예수와 굶주린 대중>에서

166. 기독교 가정의 기본원칙

에베소 5장 25절에“남편들아 아내 사항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디도서 2장 4절에“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 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이런 여러 교훈이 있습니다.

167.랍비의 사랑의 원리
 
가정 안에서의 생활 원칙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여자를 지으실 때에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지으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옛날 유대 랍비 가운데 한 사람이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고 합니다.“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실 때에 남자의 손뼈로 만들지 않은 것은 남자가 여자를 너무 장난감으로 알까봐 그렇게 안 하셨다. 또 여자를 만드실 때에 발에 있는 뼈로 만들지 않은 것은 남자가 여자를 너무 업신여길까봐 그렇게 안 하셨다. 여자를 만드실 때에 남자 머리의 뼈로 만들지 않은 것은 여자가 남자를 너무 업신여기면 그것도 곤란함으로 여자가 남자를 주장 못하게 하기 위해서 머리뼈로는 안 만들었다. 그럼 왜 갈빗대로 만들었는가 요?
  갈빗대는 몸의 중심에 있는데 남자와 여자가 꼭 평등하게 서로 살라고 갈빗대를 취하서 만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갈빗대로 말하면 심장에 제일 가까우니까 남자가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라고 갈빗대로 만드셨다. 또 갈빗대는 팔 아래에 있어서 살로 덮여 있는데 팔이 그 갈빗대를 잘 보호해 주고 있는 것처럼 남자가 여자를 잘 보호하라고 갈빗대로 만드셨다.”이렇게 해석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옳은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평등과 사랑의 원리를 의심할 여지가 없이 꼭 옳습니다. 우리 가정에 있어서의 생활의 원칙은 평등과 사랑으로 뭉쳐서 사는 것입니다.

168.‘꾸쉴러브’ 이야기
 
그러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몇 해 전에 제가 어떤 외국 신문을 보니 제목에‘꾸쉴러브’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대로 번역하면‘수풀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수풀 사이에 사는 야만이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무엇인가 알아보니 어떤 남자가 멀리 외국에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데 자기 부인이 비행장까지 마중 나왔어요. 여러 달 동안 떨어져 있다가 자기 부인을 만나니 오죽 반갑겠습니까? 또 서양 사람들은 반가울 때 흔히 행동으로 표현하니까 자기 아내를 포응하고 인사를 하는데 얼마나 힘차게 안았는지 그만 부인의 갈빗대가 다 부려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직 까지도 어떤 사람들은 그저  남녀간의 사랑은 이런 것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69.나와 결혼한 남편은 어디 갔는가?
 
여러 해 전에 미국의 유명한 잡지에 어떤 여기자가 글을 썼는데 그 제목이“나와 결혼한 남편은 어디 갔는가?”그런 것입니다. 간단히 보면 이 여자가 자기 남편을 잃어버렸나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마는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아무개와 결혼할 때에는 참 성인 군자요 좋은 사람인 줄 알고 결혼했는데 몇 달 살아보니 본래 보던 남편하고는 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본래 결혼한 남편은 어디 갔는고 하는 탄식입니다. 이런 탄식은 부인들만 하는 것이 아닌 줄 압니다. 혹 어떤 남자들도 그런 글을 쓸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내가 본래 결혼한 아내는 어디 갔는고?”처음에 결혼할 때에는 그저 자기 남편은 다 영웅적으로 자기 아내는 다 천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몇 달 동거하고 몇 해 지나게 되면 꼭 그런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옛 아담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옛 하와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점점 성질을 알게 됩니다. 점점 까다로운 사람도 있구나 하는 걸 알게됩니다. 그렇게 되면 환멸을 느끼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그때가 결혼 생활에 있어서 큰 위기입니다.
  가정의 기본원칙 가운데 하나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피차에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러면 사랑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성경 가운데 사랑장인 고린도 전서 13장을 잘 압니다. 4절 이하에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제일 먼저 무슨 말로 시작합니까?“오래 참고…”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오는지 압니까? “사랑은 온유하며―”친절 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170.건강과 장수의 비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75세 난 노인이 의사에게 가서 건강 진단을 받았습니다. 나이는 75세나 되었지마는 진찰을 해 보니 조금도 병이 없습니다. 아주 건강합니다. 그래서 의사가“참 노인 님 건강하십니다. 그렇게 까지 건강하게 산 비결이라도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이 잠깐 생각하더니“비결이 있다고 할 수 있지요.“무슨 비결입니까?”그 노인이 천천히 대답했습니다.“제가 지금부터 꼭 50년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50년 동안을 나의 아내와 지금까지 화평한 생활을 해오는데 맨 처음 결혼한 후에 내 아내와 무슨 약속을 했는데 우리가 피차에 한 집에서 살 때에는 간혹 성이 날 때도 있겠으나 만일 내가 성이 나면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말고 빨리 주방으로 나가시오. 또 만일 당신이 화가 나면 나는 문 열고 문 박으로 나가서 산책을 할 터이오. 그런 약속을 하고 지금 50년을 지나고 생각해 보니 제가 참 산책을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밖에 나가서 산책을 많이 했더니 이처럼 건강해졌습니다. 산책하고 집에 돌아오면 집안은 화평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건강해 진 것입니다”

171.부부간의 사랑의 비결
 
사랑이 무엇이라고요?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성나는 일이 있어도 또 어떤 때에 분이 나도 부부간에 오래 참는 것, 참을 줄 아는 그것이 성서적 의미에서 참 사랑입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친절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서적 교훈입니다. 보통 잘 모르는 낯선 사람을 대할 대는 아주 친절합니다. 그러나 집안에 들어가서는 친절히 안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제일 가까운 사람, 남편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친절히 안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밖에 나오면 아주 참 친절한 사람 같이 보이는데 집안에 들어가서 혹 그 부인에게 하는 걸 보면 도무지 친절하지 않습니다.
  자 여러분, 내놓고 말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먼 사람에게 친절하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왜 친절히 하지 않는 가 말입니다. 또 보세요, 우리가 보통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항상 예의를 갖춥니다. 예의 있게 대하고 깍듯이 합니다. 그러나 제일 가까운 사람한테 와서는 무례하게 행할 때가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고린도 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무례의 행치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예의를 왜 안 갖춥니까? 사실은 우리가 어디 가서나“고맙습니다”“수고 많이 하셨습니다”이런 말들을 많이 하지마는 그런 말을 많이 할 곳은 가정입니다. 이런 가정이 화평하고 이런 가정이 즐거움이 충만합니다. 가정생활의 기본 원칙은 사랑입니다. 성서적 의미의 사랑입니다. 

172.가정제단
 
어떤 건축가가 저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우리 한국 건축에는 주택을 짓는데 중심이 없습니다.”서양 사람의 주택을 보면 그 주택에 중심이 있습니다.‘화이어 플레이스(fireplace) 라고 하여 불 피우는 데가 있는데 그것이 중심이 됩니다. 일본 사람이 집을 지을 때에는 '도꼬노마' 라고 하는 그림 걸어 놓은 중심이 있는데 그것이 집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주택은 도무지 중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택에도 중심이 있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에 중심이 꼭 있어야 합니다. 가정의  중심은 가정 제단입니다. 우리 가정은 작은 교회라고 할 수 잇는데 교회 안에는 반드시 제단이 있어야 합니다. 제단 없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제단에 항상 불이 켜져 있어야 합니다. 불 꺼진 제단은 무엇합니까?
  우리 가정이 과연 기독교 가정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려고 하면 남편과 아내가 예배당에 와서 예배보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자기 가정에 가정 제단을 쌓고 같이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같이 기도를 드려서 가정 제단에 불을 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옛날부터 모든 경건한 가정에는 그 주인이 이를테면 그 가정의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이를테면 전도사가 됩니다. 우리 가정의 중심은 제단입니다. 우리 가정에 가족예배를 드리는 튼튼하다고 하면 제가 이미 말한 일부일처의 원칙이니, 부부일신의 원칙이, 성결의 원칙이오니, 사랑의 원칙이니 하는 것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가운데 다 잇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까지도 이 가정제단을 쌓지 못한 가정이 있으면 오늘부터 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73.가정의 오대 원칙
 
바로 제가 주간에 크리스천 센츄리(Christian Century)라고 하는 잡지를 보니까 작년(1963년)에 뉴욕시 안에서 살인사건이 549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91건이 가정관계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보세요! 5백 여 건의 살인사건 가운데 91건, 거의 5분의 1이 가정관계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줍니까?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낙원과 지옥의 갈림길에 언제나 서 있습니다. 우리 가정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이 땅 위에서 지상낙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정이 타락하게 되면 인간의 지옥입니다.
  우리는 어떤 가정을 만들기 원합니까? 교훈대로 가정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성경은 이 다섯 가지 원칙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일부 일처의 원칙, 부부 일신의 원칙, 성결의 원칙, 사랑의 원칙, 제단의 원칙입니다.  <기독교 가정의 기본원칙>에서

174. 네 부모를 공경하라

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리 속담에 "아들 주머니에 있는 돈도 내 주머니의 돈만 못하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꼭 "사실인 줄 압니다. 아들한테 용돈 달라고 하는 말은 참 하기 어려운 줄 압니다. 용돈 달라는 말하기 전에 미리 좀 넉넉히 드리세요. 여러분, 아기 생일잔치는 잘하면서 부모님 생일은 혹 잊어버리는 분이 없습니까? 자기는 어디 가려면 조금만 바빠도 택시 타고 하면서, 부모님이 어디 가신다면 버스 값이나 드리는 분은 없습니까?

175.불효한 아버지에 불효한 아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양에서 된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모실 수박에 없습니다. 이런 일은 서양에서 매우 드물어요, 그런데 이 가정은 아버지를 모실 수박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아버지를 모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나이 점점 많으니까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해서 음식 잡수시다가도 음식을 자꾸 흘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한국도 그렇게 되어오지마는 서양에서는 큰상에서 온 가족이 다 앉아서 함께 먹습니다. 이 가정도 그렇게 한 상에서 식사를 하는 데 제일 높은데 앉은 할아버지가 음식을 줄줄 흘리니까 이거 참 창피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들과 며느리가 보기가 답답합니다. 그래서 부득이“미안 하지만, 할아버지는 딴 곳에서 잡수세요”하고 딴 상에다 잡수게 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대접하느라고 딴 상에다 드리는 수도 있어요, 하지만 서양에서는 대접이 아닙니다. 그저 주방 한 옆에 조그마한 상에다 따로 잡수시게 했는데, 그것도 아마 떠 넣기가 어려우니까 그랬겠지요, 그릇을 들고서 잡수려고 하더니 또 그릇을 떨어뜨려서 자꾸 깨뜨립니다. 자 그러니 그 다음에는 며느리가 성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거 원 안 깨지는 그릇이 없겠나하고 돌아보니까 주방 옆에 고양이 밥 주는 주발이 있는데 그게 나무 그릇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씻어서 거기에다 밥을 담아들입니다. 아마 씻기야 잘 씻었겠지요. 그러니까 이 할아버지가 이제는 주방 옆에 앉아서 그 고양이 밥 주발에 갖다 드리는 것을 조금씩 잡수고 그렇게 지냅니다.
한 번은 그 아들과 며느리가 거리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까 너 댓 살 난 아들아이가 나무 목침 같은 것을 하나 갖다 놓고는 주머니칼로 부지런히 가운데를 파냅니다. 그래서“야, 이놈아, 너 무엇 하느냐?”하고 물어보니까“나무 그릇 만들어요, 나무그릇”한단 말입니다. “나무그릇은 만들어서 뭘 하려고 그러느냐?”하고 다시 물어보니까“아버지 늙은 다음에 밥 담아 드려야지요”우리가 웃으시는데 이것은 꼭 우리가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부모를 잘 공경하지 않으면 이 다음에 우리 자녀가 우리를 공경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동양의 옛 글에 효순환생효순자 오역황생 오역자(孝順還生孝順子 惡逆還生惡逆者)라는 말이 있습니다. 효도하고 순한 사람의 그 아들이 효도하고 순한 아들을 낳고 거스리는 아들은 이 다음에 자기를 거스리는 아들을 낳는 다는 말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부모에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176.어느 목사님 가정의 효
 
한 달 전에 어떤 감리교 목사님이 제게 와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다가 “목사님한테는 특별히 감사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 분 말이“소망의 시간을 늘 그렇게 방송을 해 쥐서, 우리 집에서는 이 소망의 시간을 열심히 듣는데 두 번씩이나 듣습니다. 토요일 저녁에도 듣고 주일 아침에도 듣습니다.”라고 합니다.“그건 왜 두 번씩 듣습니까?”그런게 아니라 제가 장모님을 모시고 있는데 그  분이 벌써 몇 해 전부터 소망의 시간을 열심히 듣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점점 많아지니까 한 1년 전부터는 귀가 먹어서 좀 적은 소리는 듣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아이구 이거 소망의 시간도 못 듣고 이젠 뭘 해야 하나? 자꾸 이렇게 탄식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다 못한 제 아내가 정 그리시면 제가 소망의 시간을 필기해서 드릴 텐데 그걸 읽어보세요 하고는 매 주일 그것을 베낍니다. 할머니 시력은 다시 밝아져서 잘 보시거든요.
그래서 딸이 소망의 시간을 다 베껴서 쓰는데 말하는 것을 다 따라 베낄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대강 베꼈다가 그 이튿날 아침에 또 베낍니다. 이렇게 한 후 다시 정서를 해서 어머니한테 바치고야 주일 날 예배당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은 너무 민망해서 제가 아내보고 그걸 매 주일 어떻게 합니까? 이따금 이나 하구려 하였더니 아내의 대답하는 말이 이제 얼마나 더 앉아 게시겠소? 그저 앉아 계시는 동안은 내가 이걸 하려고 합니다. 하는군요, 이래서 저도 소망의 시간을 두 번씩 듣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나이 많은 부모님들 모시기에 좀 피곤한 이가 혹 게십니까? 이제 얼마나 더 앉아 계시겠습니까? 나이 많은 부모님들이 건강하다고 우리 부모님은 백 세를 사실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 돌아 가실지 무릅니다.                 <제 5계명>에서
 
177.주님의 손
 
모든 손들 가운데 특별히 우리가 어머니의 손을 생각할 때 봉사를 생각합니다. 또한 수술하는 의사의 의 손, 간호하는 간호원의 손, 봉사를 우리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한 손이든지 봉사의 손이 될 수 있습니다. 농부의 손도 그러하고, 의사의 손도 그러하고, 예술가의 손도 그러하고, 음악가의 손도 그러하고, 어떤 사람의 손이든지 사실 나만 위해서 쓰지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게 될 때에 우리의 손은 봉사의 손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모든 봉사가 귀하지마는 손수 할 때 그 봉사가 더 귀합니다. 같은 음식이지마는 손수 지어서 대접할 때 그 음식이 더 맛이 있습니다. 같은 선물이지마는 손수 자기가 무엇을 만들어서 어떤 친구에게 줄 때에 더욱 마음에 감격이 있습니다. 같은 쌀이지마는 내 손으로 털어서 내 손으로 예배당에 가져오고, 내 손으로 다 같이 모아서 가난한 형제와 자매를 구할 때에 그것이 더욱 귀합니다. 같은 봉사지마는 손수 할 때에 더욱 귀합니다.

178.어머니의 손
 
옛날이나 오늘이나 특별히 여성들 가운데는 손을 곱게 하려고 애쓰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국 여자들은 손톱을 길게 기르기도 하고 미국 여자들은 손톱을 빨갛게 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일 아름다운 손은 어떤 손인지 아십니까? 봉사하는 손입니다. 미국 어떤 가정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멀리 가 살던 아들딸들이 다 모여서 즐겁게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다가 젊은 사람들 사이에 누구 손이 제일 고우냐 이런 토론을 하였다고 합니다. 맨 처음에는 젊은 사람의 손이 곱다 거니, 또는 아기의 손이 곱다 거니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다가 마지막에는 결국 투표해서 정하기로 하고 투표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투표의 결과는 어머니의 손이 제일 아름답다고 나왔습니다. 주름살 많이 잡힌 어머니의 손입니다. 그것은 봉사를 많이 한 손인 까닭입니다. 봉사의 손이 제일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생각할 때에는 주님의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하면 이 봉사는 더욱 아름답습니다.

179.스코틀랜드의 성 까일스의 손
 
다음의 주님의 손을 자세히 보면 그 손에 못 자국이 있습니다. 이것이 특별히 다른 손과 다른 점인 줄 압니다.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자로 존경을 받는 성 까일스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가 잇습니다. 그는 본래 아덴의 한 왕자로 태어났지마는 주를 믿은 다음에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깊은 산에 들어가서 수도사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 즉 어렸을 적부터 자기가 사랑하던 암사슴 하나만은 자기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에 가서 다닐 때도 이 암사슴과 같이 다니고 또 암사슴의 젖을 짜서 먹고 초근목피로써 생활하면서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그때에 마침 불란서의 어떤 왕이 사냥을 하기 위해서 깊은 산 속에 들러갔는데 한 골짜기에 가보니 먼 곳 바위 아래 사슴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이 사슴을 향하여 활을 겨누어 쏘았습니다. 그 때 성 까일스가 조용히 묵상 기도를 하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얼른 눈을 떠보니까 화살이 자기의 사랑하는 암사슴을 향하여 옵니다. 이 성자는 이것을 막기 위해서 얼른 자기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화살이 성자의 손을 뚫고 나가면서 사슴을 맞혔습니다. 사슴이 맞긴 맞았지마는 손을 뚫고 지나간 살이라 힘이 없어서 사슴은 별로 상하지 않았습니다.
불란서 왕이 이런 것도 모르고 사슴이 죽었거니 하고 사슴을 얻기 위해서 헐레벌떡 뛰어왔습니다. 와 보니 난데없이 어떤 성자가 손을 들고 있는 데 그 손에서는 피가 흘립니다. 이 광경을 본 불란서 왕은 주님의 손이 연상되어서 그 자리에 꿇어앉아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의 손은 다른 사람을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기 위하여 상한 손입니다. 그 손에 못 자국이 생긴 손입니다. 그 손에 상처가 생긴 손입니다. 주님의 이 손을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도마가 이 손을 바라보고 이 못 자국을 만져보고 예수 님 앞에 꿇어앉아서 하는 말이 “과연 내 주님이시오. 내 하나님입니다”하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 가운데 아직도 예수 님이 어떠한 분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분이 계시면 성령의 감화로서 주님의 이 피 흘리는 손을 바라보고 과연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인 것을 깨닫고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손>에서  
 
180.영원한 삶을 위하여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풍성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도덕적으로 고귀하고 옳게 살기 위해서, 문화적으로 빛나게 살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번영하고 화평하게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살기 위해서”라는 말은 아마 좀더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영원히 살기 위해서”란 뜻입니다. 사람이란 간단한 육체의 일생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시편 103편에 보면“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하는 구절이 잇습니다.
  그러나 그 구절만은 아닙니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라고 읊었습니다.“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이것은 이 세상의 생만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르친 것입니다

181.월남 이상재 선생의 명언
 
전에 YMCA의 위대한 지도자로 계시던 월남 이상재 선생이 남기신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연세가 상당히 높으셨을 때 어떤 청년이 가서 묻기를“지금 신문에 보니까 일본의 아무 수상은 100을 능히 살 수 있다고 장담을 하고, 영국의 사람은 120세를 능히 살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는데 선생님은 얼마나 사시려고 합니까?”이때에 선생님이 곧 대답하는 말이“그건 다 사람이 어떻게 사는 법을 몰라서 그래, 나는 영원히 살 테요”하는 것입니다.

182.콜게이트 회사의 설립자 이야기
 
지금도 유명하지마마는 미국의 콜게이트(Colgate) 회사가 있습니다. 비누를 만들고 치약을 만들고 하는 큰 회사인데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회사를 처음 설립한 사람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그이가 뉴욕 근처 어떤 촌에서 살았는데 아마 17, 8세쯤 나서 자기 촌을 떠나 뉴욕으로 나왔습니다. 그 앞에는 조그만 강이 하나 있는데 그 강을 건너 나룻배에서 어떤 노인을 만나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너 어디 가느냐?”물었습니다.“저 뉴욕에 가요”“뉴욕에 뭘 하려 가느냐?”“나도 뉴욕 가서 뭘 좀 해보려고 갑니다”“그래 너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뉴욕엘 가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느냐?”“지금은 모르겠어요. 그 전에 우리 삼촌 네 집에서 비누 만드는 걸 좀 배웠는데 가서 비누나 좀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합니다”“대단히 좋은 생각이다. 내 생각은 앞으로 뉴욕이나 온 미국에 비누 잘 만드는 유명한 회사가 생길 줄 꼭 아는데 혹 네가 이 다음에 그런 사람이 될지 아느냐? 그저 내가 부탁하는 건 비누를 만들 때에 진실하게 만들어라. 한 근의 비누를 만들려면 한 근 되리 만큼 재료를 써라. 남 속이지 말고 저울대 속이지 말아라, 그리고 돈을 얼마를 벌었든지 꼭 십일조를 드려라”
  이렇게 말한 노인은 강가에 앉아서 그 아이를 위해서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 이 아이가 뉴욕에서 어떤 비누 만드는 공장에 가서 일하기 시작했고 일을 하는데 이 노인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꼭 그대로 했습니다. 노인의 말이 인연이 되어서 과연 그 방면에 이 청년이 성공을 하였습니다. 제품에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근면이 있어야 합니다. 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진실과 근면을 택할 수박에 없습니다.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에서

183.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밭

옛날 우리 동양 사람의 글귀에도 악한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은 마치 포어지실(鮑漁之室) 에 들어간 것과 같다고 하는 글귀가 있습니다. 생선 많은 방안에 들어가면 생선 비린내가 납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과 같이 있게되는 것은 지란지실(芝蘭之室)에 들어간 것과 같다 하는 말도 있습니다. 지란은 난초를 의미합니다. 좋은 향기가 나는 난초가 있는 방안에 들어가면 향기로 가득해서 자연히 향기에 도취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을 때에는 우리의 심령이 향기를 피우게 되고, 우리의 생활이 향기를 풍기게 되고,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무언의 감화를 줄 수 있는 높은 자리에까지 우리의 신앙이 오라가야 될 것입니다. 

184.깊은 골짜기에 내리는 이슬
 
이와 같은 은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슬이 어떤 곳에 많이 내리는지 압니까? 언제 많이 내리는지 압니까? 어떻게 내리는지 압니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이슬을 별로 보지 못합니다. 저는 농촌에 자랐기 때문에 이슬을 잘 압니다. 여름에 이슬이 많이 내릴 때라도 길바닥에 이슬이 있습니까? 바위 위에 이슬이 있습니까? 별로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내리는 저녁이라고 해도 길바닥이나 바위 돌 같은 데는 이슬이 못 내립니다.
  하나님은 물론 모든 사람에게 다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길바닥 같거나 혹은 우리의 마음이 바윗돌처럼 굳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의 비유에 돌작밭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못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내립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14장 1절을 보면 먼저 말씀하시기를“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회개하야 은혜가 우리 마음 속에 미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슬이 많이 내리는 저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돌처럼 굳은 그대로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지를 못합니다.
  강퍅한 마음이나 나만 옳다고 하는 독선적인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내릴 수 없습니다. 내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그 심령 위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내립니다.
  도 여러분, 이슬이 어떤 데 많이 내리는 지 압니까? 산꼭대기입니까? 깊은 골짜기입니까? 깊은 골짜기입니까? 산골짜기에 많이 내립니다. 산꼭대기에는 이슬이 별로 안 내립니다. 깊은 산골짜기에 가보면 거기는 산꼭대기보다는 이슬이 더 많이 내립니다. 아마 신령한 은혜도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이슬 같은 은혜>에서

185. 마음속의 천국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보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성소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천국의 영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의 마음에 오시고 계셔서 보좌를 정하시고 다스릴 때에 우리의 마음에는 천국이 이미 임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1장 15절에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십니다.“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에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와 영을 소성(蘇醒)캐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 캐 하려함이라”하나님께서 통해하는 마음과 겸손한 마음에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제자들에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의 생각과 상상과 감정과 그 밖에 모든 것을 다스리실 때에는 천국이 이미 우리 마음 가운데 임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친히 약속했습니다.“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약속은 리빙스턴과 같이 문자 그대로 믿는 이에게는 언제나 천국이 그 속에 임재(臨在)하는 것입니다.  

186.초대 교회의 순교자 이그나티오스
 
역사적으로 성령께서 오순절에 임하실 때에 120명 신도들에게 천국이 임하신 것입니다. 전에 초대 교회 시대에 안디옥 교회에서 순교를 한 아그나티오스는 디오호르스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 트라얀(Trajian)이 어찌해서 그런 별명을 가지게 되었느냐고 물어 볼 때에 그는 곧 대답하기를“내 마음에는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디오호르스’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를 모시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먼저 신령한 가운데 천국이 우리 마음속에 임재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일찍이 어떤 열심 있는 청년 사회개혁자에게 이와 같은 권면을 하였습니다.“세상을 위하여 너무 피땀을 흘리지 말고 네 자신을 위하여 땀을 흘려라 세상을 보다 더 낫게 만들려고 하면 네 자신부터 낫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천국을 네 마음속에 먼저 모시기 전에는 세상을 천국 화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가 과연 이 세상을 천국 화하려고 한다면 내 마음속에 먼저 천국이 임재 하여야 될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 마음속에 임재 하는 것임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느낄 수는 있습니다. 남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은 너희 안에 있느나라”하는 이 말씀을“너희 가운데 있느니라”이렇게 번역한 성경도 혹 있습니다. 그 원어의 뜻은 그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엔토스(entos) 라고 하는 말은 안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고, 가운데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천국은 너희 중에 있느니라”는 말은 믿는 사람들 가운데 천국이 있다고 하는 뜻이 됩니다. 이것도 역시 사실입니다   <천국이 너희 안에>에서

187.《천로역정》
 
번연의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는 감옥에서 어려운 생활을 잘 이겨 나가는 은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 오히려 주님의 은혜를 더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신앙생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천로역정》이라는 유명한 책을 써서 자기가 말로 전도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 깊고 오묘하십니다. .

188.《실락원》
 
역시 청교도였던 존 밀턴 같은 분은 아주 유명한 분입니다. 그는 선천적으로 문필에 재주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이 중년에 실명이 되어 눈을 못 보게 되었습니다. 본래 신앙이 독실한 분이었으므로 실명이 될 때에도 이것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실명이 된 다음에도 혹 볼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기도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밀턴은 실명한 가운데서도 평안한 마음으로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은혜 가운데서 계속해서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더 큰 은혜를 받아서 여러분 아사는 바와 같이 만고 불후의 대작인《실락원》이라는 유명한 책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가시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가시 자체가 선한 것도 아닙니다. 가시는 사도의 사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것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날 수 있고, 또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큰 축복이 나타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검은 구름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검은 구름이 없으면 빛나는 무지개를 볼 수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무지개와 같은 주님의 빛을 반사시키기 위해서 우리 생활의 어떤 면에 검은 구름이 허락할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189.조개와 진주
 
요한 계시록에 보면 새 예루살렘은 모든 것을 아주 아름답게 꾸몄는데 그 문들은 전부 진주로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그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기억하십니까? 진주는 본래 바다 속에 사는 진주 패라고 하는 전복, 조개 가운데서 생깁니다. 그 가운데서 어떻게 되는 지 압니까? 조개가 바다 밑으로 기어가다가 어떻게 잘못되어서 깔깔한 모래알이 그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연한 살에 모래알이 들어가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진주 패는 이 고통 가운데서 말하자면 생명의 즙을 짜서 그 모래알을 둘러싸고 싸고 또 쌉니다. 한 달, 두 달, 1년, 2년, 여러 해를 지나게 되면, 큰 진주가 되어서 제왕이 면류관을 장식하고 천국의 문을 장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로 하여금 많은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진주 문을 삼기 위해서 어떤 가사를 허락하는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190.곰보 전도사의 이야기
 
제가 오래 전 학생시절에 어떤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전에 어떤 유력한 가정에 귀한 따님이 하나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 마치고 성년이 되어서 역시 유력한 어떤 집의 좋은 남자와 약혼을 하고 결혼 날까지 다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결혼하기 약 1주일 전에 갑자기 이 여자가 병에 걸렸습니다. 아주 중한 열병입니다. 정신 모르고 앓습니다. 앓는 동안에 결혼 날짜가 다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한 달 이상 중하게 앓고 겨우 생명을 보존해서 살아났습니다. 살아나고 보니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일어나 앉아서 머리를 빗으려고 거울 앞에 가서 지기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얼굴이 전혀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앓았던 병은 마마라고 하는 천연두였던 것입니다. 그 어여쁘던 얼굴이 북한에서 흔히 쓰는 말대로 졸박 졸박 얽었는데 도무지 지기자신 조차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머리를 채 빗지도 못하고 그냥 자리에 쓰러져 눕고 말았습니다.
며칠 후입니다. 병이 좀 낫다는 말을 듣고 그녀와 약혼한 남자가 찾아온다고 합니다. 이전 같으면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참 기가 막힙니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찾아온 남자를 맞아들여서 마주 앉았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한번 곁눈으로 힐끗 보더니 금방 얼굴  빛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나서는 도무지 일불거래(一不去來)입니다. 얼마 후 본래 중매했던 노파가 다시 오더니 머뭇거리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에 하는 말이 “저 집에서 파혼하겠답니다” 이 한 마디를 남기고 훌쩍 가버렸습니다. 그 여자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 얼마 후에 바로 그 남자가 자기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와 다시 약혼을 한다는 소문이 들려옵니다. 이윽고 아무 날로 결혼 날짜를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들립니다.
 이 소식을 들을 때 이 여자는 너무나 원통해서 이불을 쓰고 집안에 들어 누었습니다. 밥도 못 먹고 고생을 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에도 이불을 쓰고 가만히 누워서 바로 내일이 그 결혼식 날이라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하고 분하기만 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그만“아무도 원치 않는 이까짓 몸이 살아서 무엇 하나”하고 생각한 끝에 결국 자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안보는 사이에 지기 집을 빠져 나왔습니다. 어스름 저녁인데 천천히 걸어서 멀지 않은 강가로 나갔습니다. 높은 벼랑 위에 앉아서 달빛이래 흐르는 푸른 강물을 내려다보며 자기 신세를 생각하니 기가 막힙니다. 그만 서러움에 복받쳐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기진맥진해서 앉았는데 이상스럽게도 그 날 저녁 따라 멀리서 이상한 노래 소리가 드려왔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여서 듣기를 시작했습니다. 전에도 듣지 못하던 노래 소리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어떤 노래 소리인가 하고서, 노래 소리 나는 곳으로 점점 찾아가 보았습니다. 좁은 오손 길을 지나서 송림 사이를 한참 지나가 보니까 조그마한 집이 한 체 있는데 그 집에 사람이 가득히 모여서 찬송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게 아니고 조그마한 농촌 예배당이었습니다. 때마침 부흥회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밖에서 서성거리니까 웬 사람이 나오더니 친절한 태도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자기는 그다지 들어갈 마음도 없는데 억지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무슨 설교를 하고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모르지마는 이 여자가 그날 저녁에 처음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고, 자기는 아무 소망이 없었는데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소망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결국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후부터 이 여자의 부모에게 공부를 더 하겠다고 청을 했습니다. 넉넉한 집안인지라 부모들은 딸의 소원대로 공부를 더 시켰습니다.
  마침내 이 여자는 지금으로 말하면 여자신학교를 마치고 어떤 교회에 여전도사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서 자기의 전심 전력을 다 했습니다. 이 분은 자기를 원하는 남자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데 주님만이 자기를 자기의 신랑이 되어 주셨다고 생각하여 주님의 신부로서 정성껏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받들겠다는 결심 아래, 힘껏 전도하고 기도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했던 것입니다.
받은 월급을 다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산도 전부 다 써가면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특별히 불구자를 불쌍히 여기고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 일했습니다. 이렇게 몇 해 동안 교회 일을 보았더니 그 교회에서“우리 전도사의 얼굴은 예수 님의 얼굴과 같다”하는 말이 돌게 되었습니다.“우리 전도사의 얼굴은 어떻게나 은혜가 충만한지 모르겠어! 그 오목오목한 자리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고 그 올통 불통한 데는 주님의 영광이 반사되는 것 같단 말이야”이런 말이 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밉고 고운 것은 보기 탓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금강산에 있는 만물상을 가보신 분이 게십니까? 만물산은 미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우리 중에는 가시를 가지고 있는 이가 많습니다. 이 가시를 혼자 가슴에 두지 말고 주님께 내 놓으세요. 기도하세요. 은혜 받으세요. 그러면 오히려 이 가시로 말미암아 더 축복을 받습니다. <내 몸의 가시>에서

191.서반아 왕 페르디난도 이야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서반아(스페인)왕 가운데 페르디난도 5세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이 어떤 점쟁이에게 왕께서는‘마드리갈’이라고 하는 곳에 아예 가지 마세요. 그 ‘마드리갈’에서 왕은 장차 죽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왕의 별궁이 있습니다. 그래서 왕은 무서워서 자기의 좋은 궁전을 지어 놓고도 21년 동안 거기를 못 갔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서반아 지방을 여행하다가 어떤 조그마한 촌락에서 하룻밤 자면서 그만 병이 났습니다. 왕은 이 지방이 어떤 지방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이곳은 '마드갈레' 입니다"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마드리갈'과 비슷했습니다. 사실은‘마드리갈’은 아니고 비슷한 이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왕은“아이고 나는 죽었구나!”하드니 며칠 안되어서 죽었다고 합니다. 병이 죽인 것이 아닙니다. 공포심이 죽였다는 말입니다.
공포심이 사람의 마음을 엄습하게 되면 신경이 쇠약해지고, 혈압은 높아지고, 위액 분비가 잘 안되어서 소화도 안 되고, 심장이 뛰고, 당뇨병이 생기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사실은 세균에 의한 병보다도 이 공포심이 원인이 되어서 병 나는 이가 더 많고, 죽는 사람도 더 많다고 합니다. 이렇게 공포심이 우리 인생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192.카네기의 공포심 없애는 비결
 
그러면 공포심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마음을 들어다 보면 공포심을 안 가진 이가 별로 없습니다. 이 공포심을 어떻게 해야 극복합니까? 미국의 카네기라는 사람의 저서를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공포심이나, 근심을 없애는 방법이 있다고 하면서“첫째는 무서워하는 것, 또는 근심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나 하나씩 책에 기록을 해 보라. 그러면 실상 그 가운데 대부분은 근거가 없는 공포라고 하는 걸 알게될 것입니다. 둘째로 나머지 공포심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할 수 있는 것들을 기록해 보라. 셋째로 그 중에 무엇을 먼저 할까 하는 것을 작정하라. 넷째로는 그 공포심을 이기기 위해서 작정한 대로 행하라. 그러면 그 어떤 공포심이든지 대체로 이길 수 있다.”이런 말을 했어요. 물론 이런 것도 다소 도움이 될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비결은 우리의 심령이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하나님을 의지하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193.요한 웨슬레와 모라비안 선교사
 
우리 인간 생활에 큰 방해가 되는 것이 두 가지 잇습니다. 하나는 죄, 하나는 공포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실 뿐 아니라 공포심 가운데서 해방을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믿고 주를 의지하고, 성령을 충만히 받을 때에는 공포심까지 없어집니다.   
요한 웨슬레의 전기를 보면 그가 젊었을 때, 큰 은혜를 받기 전에 미국에 전도하려 갔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실패하고 돌아가는 뱃길에 대서양에서 큰 풍란을 만났습니다. 아주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큰 공포에 싸였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니까, 그 가운데 모라비아교회에서 이 곳에 전도하려 왔다가 돌아가는 선교사가 몇 사람 있는데 이 사람만은 아주 태연합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가 그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았습니다.“당신 네 들은 이런 가운데서도 두렵지 않습니까?”그 때에 그 중 하나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우리는 그리스도를 압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환경을 당하든지 두려운 마음이 없습니다.”그리면서 그 청년이 웨슬레에게 물었습니다.“당신은 그리스도를 압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압니까? 그리스도를 여러분 마음 가운데 영접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계셔서 성령과 힘과 능력을 주십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공포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20세기에 사는 현대인의 양상을 보면 과학문명이 발달되었고, 예술이 발전되었고, 모든 방면에 큰 진보가 발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처럼 불안과 공포에 쌓인 이런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인간의 4대 자유를 주장할 때에, 한가지는 공포에서의 자유를 부르짖었습니다. 물론 공포 없는 세계를 만들면 그것은 더 좋습니다. 그러나 그건 하루아침에 될 일 아닙니다. 성경 말씀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시대, 어떤 환경에 살든지 공포심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는 분명한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공포심을 극복하는 비결>에서

194.주의 선하심을 발견하는 길

오늘 이 시간 다윗의 신앙간증을 잠깐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 먼저 이 말씀을 생각합시다. 맛을 보아서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선하심을 알아보는 길은 몇 가지 있습니다.
  이성의 길이 있습니다. 추리의 길이 있습니다. 이치를 미루어서 무엇을 아는 길이 있습니다.

195.아르키메데스의 원리 발견
 
옛날 헬라 사람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다가 갑자기 뛰어나오면서“나는 깨달았다, 나는 깨달았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했습니다. 목욕탕에 들어가서 몸을 물에 잠가보면 몸이 가벼워집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는 왜 가벼워지며 또 얼마나 가벼워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을 하면서 그것을 꼼꼼히 생각했습니다.
  이성적으로 추리를 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이치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즉 물 속에 들어가면 몸의 용적만 한 물의 중량만큼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추리를 통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196.아이작 뉴톤의 만유인력 발견
 
영국의 유명한 아이작 뉴톤 같은 이도 과수원 안에 앉아서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자세히 살피다가 지구에서는 모든 것을 잡아당기는 인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은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성을 통해서 무엇을 아는 예입니다. 그러나 그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7.직감으로 깨닫는 주의 선하심
 
다음으로, 직감 혹은 지각 곧 느낌으로 깨닫는 길이 있습니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줄 아는 것은 무슨 이치를 생각해 보고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해와 저녁 노을이 아름다운 줄 아는 것은 누가 설명해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꽃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위대한 문학이나 시를 읽어나, 혹은 위대한 조각품을 볼 때 아름답다고 느끼고 놀라움을 나타내게 되는 것은 이성으로 생각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직감입니다. 예술적 방면의 모든 지식은 흔히 이런 직감 경로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됩니다.
 
198.권위를 통해서 믿음으로
 
또 다른 길은 우리가 많이 쓰는 길인데 권위입니다. 이 권위를 통해서 믿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각 방면에 전문가가 있습니다. 나는 깨닫지 못하지만 그 전문가의 말을 듣고 신용함으로 우리가 압니다. 지금은 어린아이들이라도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고 지구가 태양을 도는 줄을 다 압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코페리니투스가 이 세상에 나타나서 주장하기 전에는 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은 지구가 태양을 도는 줄 다 압니다.. 어떻게 압니까? 여러분이 생각해서 알아냈습니까? 직감적으로 압니까? 아닙니다. 무엇으로 압니까? 권위의 말을 믿음으로 즉 천문학자의 말을 믿음으로 압니다. 그들의 말을 신용합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모든 교과서를 앍고 지식을 배울 때에는 다 이런 여러 가지 경로를 이용해서 배웁니다.  

199. 실험을 통해서 아는 길
 
다른 또 하나의 길은 매우 중요한 방법인데 실험을 통해서 아는 길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 같은 분은 이 방법의 시조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 3백년 동안의 위대한 과학자의 발견은 모두 이 길을 통해서 이루어 졌습니다. 어떤 학설이나 진리가 과연 옳은지 알려면 그대로 실험을 해보고 그 결과를 보아서 귀납적으로 그 이론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지로 해보는 것이 새 지식을 아는 방법입니다
  여기 맛보아 안다는 말은 이치를 미루어서 안다고 하는 말도 아니고, 직감적으로 안다고 하는 말도 아니고, 본인의 말을 듣고 안다고 하는 말도 아니고, 실지로 해 보라는 말입니다. 실지로 해보아서 이것이 사실인지 아니지 알아보라는 말입니다. 

200.나폴레옹과 부하 군인들의 대화
 
나포레옹 같은 사람은 군인이지마는 이런 직감이 있었던 사람 같았습니다. 그가 한 번은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애굽을 정복하려 가기 위해서 지중해를 건너갑니다. 마침 바다는 잔잔하고 달은 밝은 밤인데 많은 군인들이 갑판 위에 올라와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이런 이야기 저란 이야기를 합니다. 나폴레옹이 조용히 뒤로 다니면서 이 군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나? 살펴봅니다. 한편 구석에 가보니까 어떤 군인들이 앉아서 열심히 변론을 합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한 사람은 하나님이 있다고 하고, 한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서로 다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무신론자요 하나는 유신론자입니다. 나폴레옹이 가만히 뒤에서 듣다가 성미가 급해서 불쑥 한마디를 했습니다.“여보 ! 변론만 하지 말고, 눈을 들어 하늘을 좀 바라보시요”두 사람이 깜짝 놀라서 하늘을 쳐다보니 명랑한 달빛이 이름답게 비치고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면서 그들을 내려다봅니다. 그 때에 나폴레옹이 두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저걸 보고도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모르겠소”직감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길이 있습니다.

201.열등감을 극복하는 비결
 
누구나 나는 부족하다 하는 느낌이 다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건전한 자기 성찰인줄 압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이 도가 지나쳐서 항상“나는 부족하다, 나는 모자란다, 나는 할 수 없다”하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것은 일종의 병적 심리상태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열등감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말하면 인페리오리티 컴플레스(Inferiority Complex) 라고 합니다.

202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람이 이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기에 대한 자신력을 전혀 잃고 무능하고 무력하게 되어서 인격상 또는 생활상 불행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런 이들은 흔히 자기의 할 일을 하지 못합니다. 씨름을 하기도 전에 누울 자리부터 봅니다. 마땅히 해야 될 경우에 할 말을 하지 못합니다. 겁이 나고 도에 넘치는 역병에 걸려서 정당한 사교생활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교회에 출석은 하지마는 교회에 봉사하거나 전도는 하지 못합니다. 사회에 나가서 일한다고 하지마는 부정과 불의에 항거할 용기가 없습니다. 그대로 나가면 결국은 그 일생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203.열등감을 보충하려는 행동
 
반면에 이런 이들이 자기의 열등감을 보충하기 위해서 다른 방면으로 도에 지나치는 일을 하는 수도 있습니다. 가령 어떤 여자가 이런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면 도에 지나치는 화장을 한다던가 의복을 별스럽게 입고 사치하게만 차리려고 애를 씁니다. 미국 같은 데를 가보면 흑인들이 많이 있는 데 흔히 흑인 여자들이 너무 화장을 도에 지나치게 합니다.
  아프리카에 가나 같은 나라에 가보니까 거기 흑인 야자들이 옷을 입었는데 별스럽게 울긋불긋한 옷들을 전부 입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열등감에 사로잡혔는데 이것을 다른 면으로 보충을 하려니까 이런 화장이나 이런 의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어떤 남편이 자기 부인보다 좀 못하다는 열등감이 있다고 하면 흔히 자기 아내에 대해서 더 괴롭게 굽니다. 그저 자기 아내를 꼼짝 못하게 지배하려고 달라붙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열등감을 어떻게 해서든지 보충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흔히 도에 지나치는 대접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합니다.
  보통 사람은 섭섭해하지 않을 것도 이런 이들은 나무라기를 잘합니다. 혹 어떤 사람이 그저 무심중에 인사를 좀 잘못해도“아 저 사람이  나를 업신여겨서 인사를 안 하느냐?”하고 대단히 섭섭해합니다. 또 어떤 때에는 어린아이들이 도에 지나치는 자기 자랑도 해봅니다.
  하여간 이것은 병적인 심리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런 아이들이 가정에 있으면 가정이 불화하기 쉽고, 이런 아이들이 교회에 많이 있으면 교회가 불화와 불평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204.겸손과 열등의식
 
자기를 낮추는 것은 미덕이지마는 이 열등감이라고 하는 것은 병적 심리상태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꼭 극복해야 신앙생활도 바로 하고, 모든 다른 사업도 바로 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이 열등감에 사로잡히기 매우 쉽습니다. 이런 열등감을 극복하는 길이 어디 있는가 몇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첫째는 자신을 잘 살펴서 이런 병적 열등감에 사로잡혔는가 알아야 합니다 .또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 알아볼 것입니다. 원인을 알면 그것을 우리가 고칠 수 있습니다. 먼저 아성을 통해서 이 열등감을 시정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205.부모와 교사의 책임
 
열등감을 가진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어렸을 적에 부모에게 좋은 가정교육을 받지 못하고 부모가 못한다고만 윽박질러서 이런 열등감이 깃들인 경우가 더러 잇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가정에서 아이들을 기를 때에 잘못한다고만 자꾸 윽박지르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아이 마음 가운데“난 그저 못난 놈이야”하는 생각이 늘 들게됩니다.
  또는 학교에서 선생이 버릇이 좋지 못하다거나, 공부를 잘못 한다 거니 하고 자꾸 못한다고만 놀려주고 욕해 주면 그만 그 아이가 마음에 깊은 상처가 나서 일생토록 열등감 가운데 사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학교 선생들은 이런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206.오해로 인한 열등감
 
그러나 이 밖에는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없는 데도 오해 때문에 혹은 그릇된 가치판단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처럼 상당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난 젊어서 교육받을 기회를 잃어서 남처럼 대학을 졸업 못했어, 그러니까 난 남보다 못해”이런 생각을 자꾸 하면 결국 열등감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사실 오해입니다.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반드시 열등한 것은 아닙니다. 또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반드시 사업에 성공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습해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207.아브라함 링컨의 이야기
 
미국의 유명한 아브라함 링컨 같은 이는 학교에 몇 달밖에 못 다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미국의 제일 유명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인도의 라빈그라나드 타고르 같은 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인이요 시인입니다. 그러나 이 분은 대학에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208.학별과 돈과 열등감
 
요사이 듣는 말로는 젊은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돈이 없어서 대학을 그만 못 가게된 것이 남부끄러워서 교회에 못 나온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되겠습니까? 
  또 어떤 학생은 부모가 학교를 보내 줘서 시험도 치르고 합격도 했는데 소위 일류학교에 입학 못하고 이류나 삼류학교에 들어갔다고 부끄러워서 마크를 못 달고 큰 거리로도 못 다니고 친구를 만나면 피해 다닌 일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것 때문에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말입니다. 오해와 그릇된 판단에 의해서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또 특별히 생활이 빈궁한 이들이 가난하니까 옷도 다른 사람처럼 입지 못하고 해서 스스로 마음이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도 사실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요단강에서 외칠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나와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약대 털옷이라고 무슨 모직 옷이 아닙니다. 변변치 못한 옷입니다.
  예수 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님은 가장 가난하였습니다. 주후 4세기 사람인 성 안토니오 같은 이는 본래 부자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그 말씀 그대로 살기 위해서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자기는 가죽으로 옷 한 벌을 해 입고 광야지대에 나가서 일생을 굴속에서 살았습니다.

209.안토니오 이야기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얼마나 안토니오의 모양이 험했던지 그를 짐승으로 오인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번은 알렉산드리아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에 온 알렉산드리아 성 사람이 그 앞에 나와서 무릎을 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열등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201.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사느냐, 얼마나 진실히 살고 얼마나 옳게 살고 얼마나 봉사를 하느냐? 여기에 우등과 열등이 있지, 돈 많고 없는데 열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 말씀입니다. 지위가 높고, 지위가 낮고, 벼슬을 하고, 벼슬을 못하고, 여기에 우등과 열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해서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맙시다.
  몸에 병이 있거나 특별히 불구자가 된 이들 가운데“나는 일생 병이 있고 나는 불구자가 되었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이들이 혹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이유는 안 됩니다.

211.토리 박사 이야기
 
바로 지난 금요일에 세브란스 의수족(義手足)부에서 아침 기도회를 인도해 달라고 해서 갔다 왔는데 거기가 보니까 토리 박사 기념 채플이 있었습니다. 이 토리 박사는 본래 그 유명한 미국의 부흥사인 토리 박사의 아들인데 이 분이 중국의 선교사로 갔다가 제2차 대전 때에 그만 부상해서 팔을 하나 잃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6·25사변이 일어나 다리 없는 사람, 팔 없는 사람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 나와서 세브란스병원을 중심해서 의수족 부를 설치하고 많은 청년들에게 다리를 해주고 팔을 해주었습니다. 지금 그이는 귀국했지만 현재 그 책임자로 있는 선교사도 두 손이 다 없는 분입니다. 두 손이 다 없는 분인데 한국에 나와서 많은 손 없고 발 없는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212.헬렌 켈러 이야기
 
헬렌 켈러 같은 여자는 소경이니 눈도 보지 못하고, 귀머거리니 귀도 듣지 못하고, 벙어리니 말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여자지마는 세계의 가장 유명한 여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몸이 약하다고 불구자가 되었다고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자포자기하면 안 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사업하다가 실패한 다음에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이가 혹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 이유가 안 됩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마는 우리 교회 고한규 장로님은 참 위대한 장로님이십니다. 그가 한 번은 자기의 회고담을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가 사업에 실패해서 많은 사람에게 빚을 졌던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213.김기범 장로님 이야기
 
내가 신의주에 제2교회에서 봉사할 떼에 그 곳에 참 위대한 장로님으로 김기범 장로님이라고 계셨습니다. 언젠가 김기범 장로님과 하루 저녁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일생 사업을 한 사람인데 일생에 세 번 크게 실패를 해서 한 푼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다시 일어나서 회복하여 이 만큼 살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사업하다가 누구나 실패할 수 있습니다. 실패했다고 절대로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14.큰 사업을 한 여자들
 
부인들 중에는 미안한 말이지마는 얼굴에 허물이 있든지 또 얼굴이 잘못 생겼으면 아주 열등감에 쉽게 사로잡히는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책을 보니까 어떤 분이 세계에서 가장 큰 일을 많이 한 여자들을 전부 조사를 하고 그들의 얼굴이 잘 생겼나, 못 생겼나를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큰 사업을 한 야자들 가운데는 못 생긴 여자들이 더 많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얼굴에 허물이 좀 있다든지 해서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열등감을 극복하는 비결>에서

215.성 안토니오의 결단
 
주후 4세기 애굽의 한 청년이 성경 말씀을 듣고 돌이켜 생각을 해보니 주님의 이 말씀은 꼭 자기에게 하는 것으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부모에게서 상당한 재산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가족이라고는 자기의 손아래 여동생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는 예수 님 당시에 재물이 많은 까닭으로 근심하며 돌아간 사람의 전철(前轍)을 다시 밟지 않기로 생각하고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꼭 실행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재산의 대부분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적은 재산만 남겨서 자기의 여동생의 생활비로 준 다음, 자기는 성경에“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한 교훈과“항상 기도하라고”한 교훈대로 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으며 기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애굽 광야에 나가서 손수 곡식을 심어서 거두어 먹고, 남는 시간을 오직 기도와 묵상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교회의 역사상 유명한 성 안토니오 입니다. 수도사들이 아버지로 존경을 받은 분입니다. 현대 청년들도 꼭 안토니오를 모방하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결단을 배워야 되겠습니다. 청년들이 아무리 성품도 좋고, 학식도 있고, 재주도 있다고 하지마는, 결단력이 없으면 무슨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 역사적 시점에서 사는 우리 한국 청년들은 반드시 결단할 몇 가지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한국 청년의 결단>에서
                                   
216. 진젠둘프의 헌신
 
우리가 교회 역사를 읽어보면 물론 위대한 전도자가 거의 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일어났습니다. 그 여러 사람 가운데도 특별히 우리 신교 역사상에 세계 선교운동을 일으켜서 자기 스스로 실천한 모라비아교회의 창립자요, 또 그 교회의 목사였던 진젠돌프라고하는 이를 기억하게 됩니다.
  이 분은 본래 귀족의 아들입니다. 백작의 벼슬을 가진 분입니다. 자연히 재산도 많은 분입니다. 그러나 이분은 자기의 지위도 버리고 재산도 다 바쳐서 오직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한 분입니다.
  그 때에는 불행이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에 큰 충돌이 있어서 구교도의 압력을 받은 불쌍한 신교도 피난민들이 갈 때가 없어서 그에게로 찾아 올 때, 이 분은 그들을 영접해서 자기가 소유한 토지를 주고, 그들을 위해서 집을 지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같이 모여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또 예배당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렇게 되어서 한 5, 6백 명쯤 피난민들로 조직된 교회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수는 많지 않지마는 진젠돌프를 중심해서 이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며 같이 모여서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배우며 성례를 거행하는 가운데 온 교우가 성령이 충만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해서 이들은 자기자신들만 믿을 것이 아니라, 이 귀한 복음을 온 세계에 전파해야 되겠다고 하는 새로운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5, 6백 명되는 교회에서, 멀리 아프리카를 비롯해서 웨스트 인디아와 저 북방의 그린란드까지 백 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보통으로 평균 네 세대, 다섯 세대에서 성교사 한 사람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진젠돌프 자신이, 이 경험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 할머니에게 독일 경건주의의 감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그가 젊었을 때에 어떤 박물관에 들어가서 여러 미술품을 구경할 때, 한 그림에 가보니까 그 때의 유명한 화가 스턴벅(Sternburg) 이라고 하는 분이 그린 명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이신 모습을 그린 그림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을 유심히 볼 때에 은혜를 받아서 주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그처럼 고생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혈을 흘리셨다고 하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되어서, 그 그림 앞에 조용히 섯는 동안 주님께서 은연(隱然)한 가운데“나는 너를 위해서 내 몸을 주었건마는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하는 음성이 그 심령 속에 들렸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자기의 몸을 바치고 자기의 가진 것 전부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 감격과 그 감사한 마음 가운데서 온 천하에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입니다.

217.흑인 전도자들
 
바로 몇 칠 전에 신문지상을 통해서 미국에 있는 흑인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라고 하는 분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다 들으신 줄 압니다. 아프리카 흑인 가운데서도 위대한 기독교인이 여러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물론 마틴 루터 킹 같은 사람이다. 한편 지난 세기인 저 19세기 아프리카 흑인 중에 제일 유명하다고 생각되는 분은 나이제리아의 사도라고 이름을 얻게 된 사무엘 애드자이 크라우드( 그 실제 이름은 애드자이) 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나이제리아는 그 때까지 영국의 식민지였지마는 지금은 독립국가입니다. 아프리카 신생국 중에 제일 문화 수준이 높은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이 애드자이의 큰 공로가 있다고 합니다. 18세기 초엽인 그 때에는 해적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들을 강제로 납치해 다가 저 웨스트 인디아라고 하는 섬에 데려가서는 여러 나라의 종으로 팔던 그런 악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 번 애드자이가 사는 동네에도 이와 같은 해적의 무리가 와서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조리 강제로 납치해 다가 배에 싣고서는 종으로 팔려고 대서양을 건너 웨스트 인디아 섬으로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치 영국 군함이 그 해적을 발견하고 추격해서 해적을 다 붙잡고 노예로 팔아 버리려든 흑인들을 다시 서 아프리카로 싣고 가서 다 놓아 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열 네 살 된 어린아이도 시에라 레욘이라고 하는 서 아프리카에 내렸는데 마침 거기서 어떤 선교사를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의 자초지종이야기를 다 들은 선교사는 그를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고 미침 그 곳에 세워져 있는 기독교학교에서 공부를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이가 거기서 공부를 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 또 공부를 아주 잘했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선교사가 그를 영국까지 보내서 공부를 계속해서 시켰습니다. 이 학생이 영국서 공부를 다한 다음에는, 자기의 생활을 돌아보니 참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바다 가운데 노예로 잡혀가서 팔려갈 신세에 있던 것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또한 대학까지 졸업하게 된 것을 생각하니 참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그래서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자기 동족들에게 이 복음을 전파할 수박에 없겠다고 결심을 가지고, 1843년에 청년으로서 다시 자기 고향인 흑암(黑暗) 대륙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서는 일생토록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전도, 교육, 문화, 사회 각 방면에 많은 공헌을 해서 나이제이아의 사도라고 하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생활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역시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러니 이 귀한 복음을 내 민족에게 전파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감사한 마음이 그로 하여금 위대한 전도자를 만든 것입니다.   
     
218. 오직 전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구원의 역사를 마치시고 승천을 하였습니다. 거기서 천사장 가브리엘을 만났다고 합니다. 가브리엘이 예수 님을 만나자, 크게 치하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물었다고 합니다.“그렇게 큰 구원의 사업을 다 이루었는데, 이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여야 하겠는데, 무슨 방법을 가르치고 올라왔습니까?”그러니까 예수 님께서 대답하는 말씀이“내가 열두 제자를 택해서 가르치고 그 열 두 제자에게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고 내가 부탁을 하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던 가브리엘이“참 잘 되었는데 그러나 그 사람들이 만일 주님의 부탁을 잘 받지 않고 부탁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무슨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하고 또 물었다고 합니다.  <감사와 전도>에서

219.하늘의 악대

오늘 우리 한국교회도 문자 그대로 모압 자손 같고, 암몬 자손 같고, 세일 자손 같은 많은 원수들이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공산당들이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세속주의가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소매치기 부대가 많아졌습니다. 인간 송충이라는 도벌부대가 많아진 모양입니다. 탐관오리 부대가 많이 침투했습니다.
  여러 원수들이 이 땅으로 지금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정부가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군대가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경관들이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하십시다.
이와 같은 때에 하늘의 악대인 우리 교회가 앞장서서 전국을 복음화 시키며 자유수호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면 이 모든 원수들은 자멸될 기회가 머지 않아 올 것입니다. 이 위대한 하늘의 악대가 먼저 전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 모든 일에 먼저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220.타이태닉 호
 
벌서 반세기가 지났습니다. 1912년에‘타이태닉(Taitanic)호’라는 유명한 여객선이 대서양을 건너던 중입니다. 그 때에는 제일 크게 건조한 배요, 아주 호화롭게 만든 여객선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유명한 배가 처음으로 대서양을 횡단하게되니 유럽과 아메리카의 저명한 인사들이 이 배에 많이 탔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배가 대서양을 건너오다가 빙산에 부딪쳤습니다. 깨어졌습니다. 침몰하기를 시작합니다. 구명정 몇 개를 싣고 가던 것을 내려서 먼저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을 할 수 있는 대로 구호를 했습니다. 그러나 여객의 다수는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배는 점점 가라않습니다. 그렇게 되니 그 여객선에 탔던 여러 승객들은 정신을 잃고 불안과 공포가운데서 갑판에 나와서 아우성을 칩니다.
  그 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압니까? 그 배에 타고 있던 악대가 정복을 입고 각자 악기를 들고 갑판 가운데 나섰습니다. 그 아우성치는 가운데서 꼼짝하지 않고 지도자의 지휘를 따라서 모든 악기가 울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분주하던 갑판이 조용해 졌다고 합니다. 한 곡 두 곡 위대한 곡을 계속하여 연주합니다.
  그러나 배는 점점 가라않습니다. 마지막에 연주한 곡이 무슨 곡인지 압니까? 우리가 잘 아는 364장 찬송합니다.“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한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그리고 마지막 순간이 가까웠습니다. 마지막 절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 돌 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 마지막 절을 부를 때에는 점점 침몰해 들어가든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일어나면서 공포도 잊어버리고, 불안도 잊어버리고 하늘을 향해서 승리의 기쁜 얼굴로서“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라고 합창을 하면서 마지막을 승리로 마쳤다하는 기록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하늘의 악대>에서

221.성경의 어제와 오늘
 
성경은 모든 책 가운데 가장 많은 공격을 받은 책입니다. 사상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옛날 셀레우스(Celeus) 라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18세기의 볼테르(Boltair) 같은 사람과 현대 파괴적 비판자에게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공격을 하였습니다.
또 성경은 가장 박해를 많이 받은 책입니다. 로마 제국에서 큰 핍박을 받을 때에, 항상 성경을 빼앗아서는 불살랐습니다. 중세기에 천주교에서 성경을 박해했습니다. 즉 일반이 읽지 못하게 금했습니다. 현대에는 공산당들이 성경을 박해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지금도 성경은 세계의 어떤 책보다도 제일 많은 방언으로 번역된 책입니다. 제가 알아보니 현재 1천 2백 23방언으로 번역이 되었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방언으로 번역된 책은 다시없습니다. 또 성경은 지금도 세계의 어떤 책보다 제일 많이 팔리는 책입니다. 요새 말로 베스트 셀러(Best seller)입니다.
작년에 여러 성서공회를 통해서 판매된 부수가 아마 쪽 복음까지 포함해서 4천 9백 88만7천4백28권이라고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만 반포된 수가 933만 5천 6백61권이라고 합니다. 거이 1천만 권에 가깝습니다. 세계에 이렇게 많이 반포되는 책은 없습니다. 지금도 성경은 어떤 책보다 제일 많이 읽는 책입니다. 학생도 읽고, 청년들도 읽고, 노인들도 읽고, 남자 여자, 학자, 정치가, 과학자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읽는 책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성경은 무적의 책입니다. 대적이 없는 책입니다.

222.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
 
18세기 불란서 자유사상가 볼테르 같은 사람은 그 때부터 약 40년 후에는 이런 책을 읽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혹평을 하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50년 후에는 그이가 앉아서 그 이야기를 했던 그 집이 바로 성서공회가 되어서 마루에서 천장까지 성경으로 가득 쌓이게 되었다고 하는 유명한 이야기는 우리가 다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디모데 후서 2장 9절에 사도 바울이 기록한 바와 같이“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할”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 이런 책은 온 세계의 하늘 아래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유일무이한 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이유가 몇 가지 잇습니다.
  첫째는 이 성경은 여러분이 방금 들으신 대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입니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디모데 후서 3장6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후서 1장 21절에“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기록했습니다. 성경은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한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가르치시고 성령이 생각나게 하신 대로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책이 많지마는 이런 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이런 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근원이 하나님께로서 났습니다.

223.성경을 읽는 자
 
매일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은 매일 매일 좋은 음식을 먹는 사람과 습니다. 강건하고 튼튼히 살 수 잇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신앙에 유일한 표준입니다. 전통이 신앙의 표준이 아닙니다. 이성이 신앙의 표준이 아닙니다. 물론 감정이 신앙의 표준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 신앙의 정확무오(正確無誤)한 표준입니다. 이단과 사설이 횡행하는 이러한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앙의 정로(正路)를 밟아갈 수 잇는가? 성경을 읽고 그대로 믿으면 신앙의 정로를 밟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행위의 정확무오한 표준입니다. 성경 가운데에는 지고의 윤리가 있습니다. 성경은 최고의 도덕적 법칙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여러 가지 계명을 비롯해서 산상보훈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간이 인간으로서 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해야 될 모든 규례(規例)를 분명하고 똑똑하게 가르쳐 줍니다. 행위의 정확무오한 표준입니다.
  그러므로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 우리 신앙의 표준이 됩니다. 전에 라볼드 잉그솔이라고 하는 무신론자가 역시 그 때에는 믿지 않던 친구 류 월리스(Lew Wallace) 라는 장군에게 기독교를 반대하는 책을 쓰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그 권면을 듣고 그런 책을 쓰기 위해서 붓을 잡게 되었는데, 반대하는 책을 쓰려니까 부득이 기독교가 무엇인가 알아야 하겠단 말입니다. 알려고 하니까 부득이 성경을 읽을 수박에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생각이 점점 변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회개하고 오히려 성경의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리해서 그분이 결국 무슨 책을 썼는지 압니까? 한국에서도 영화로 상영되어 우리가 다 본‘벤허’라고 하는 유명한 소설을 썼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생활을 묘사하는 그런 책을 썼습니다. 성경의 감화력이 이렇습니다. 성경을 반대하고 성경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내용을 알아보면 열이면 열 모두가 성경을 읽어보지 못한 삶들입니다.

224.성경독서와 토론
 
전에 프리스턴에 잭 윌슨 박사라고 하는 유명한 구약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프린스턴 대학 학생 몇 명이 와서 그 윌슨 박사에게 “우리는 구약의 이것도 믿을 수 없고 저것도 믿을 수 없는데 토론 좀 하려고 왔습니다”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늙은 박사가 그 말을 듣더니 웃으면서 토론하는 것도 좋은데 성경을 토론하겠다니 성경을 몇 번이나 읽어보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학생들은 성경을 한 번도 못 읽어보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박사는 나는 적어도 40년을 밤잠 안 자면서 몇백 번을 읽고 연구해도 믿지 못할 것이 없는데 우선 몇 번 읽고 오라고 말했습니다. 보통 성경을 읽지 않고 반대합니다. 우선 몇 번 읽어보세요. 그러면 문제는 성경 자체가 여러분에게 대답해 드릴 것입니다.  <성경을 아는가?>에서

225.참된 지혜의 생활

전도서 12장 1절에 “너는 청년의 때…너희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청년시대에 은혜를 받아서 옳은 길을 가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젊은 시대에 옳은 길을 걷기 시작하면 평생에 즐겁고 기쁜 생활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인생이 잠간이요, 수고와 슬픔이 많지마는 젊을 때부터 참된 인생생활을 하게 되면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인생의 아침에 바른 길을 택해야 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226.생애의 인수분해
 
어떤 책을 보니 스위스의 어떤 노인이 약 80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건강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80년을 가는 동안에 자기의 시간을 어떻게 썼나 한 번 조사해 봤다고 합니다. 그랬더니(확실한 조사인지 모르지만) 26년간은 침상에서 누워만 있었습니다. 아마 잠을 넉넉히 잔 모양입니다
  또 21년간은 일만 했습니다. 6년 동안은 음식 먹는 데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음식도 굉장히 많이 먹은 모양입니다. 또 다른 6년 동안 은 불쾌하고 노한 중에 지냈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한 모양입니다. 5년 동안은 다른 사람이 시간 안 지키기 때문에 남을 기다리느라고 허비했다고 합니다. 사실 시간을 안 지키는 것은 큰 골치입니다. 남 때문에 허비한 시간이 5년 동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28일 동안은 수염 깎는데 허비했다고 하였습니다. 또 26일은 아이들을 욕하는데 허비했다고 하였습니다. 손자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또18일 동안은 넥타이 매는 데 허비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모으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모양입니다.
  또 80일 동안은 코 푸는데 허비했다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시간이 가는 모양입니다. 열 이틀 동안은 담배 불 붙이는데 허비됐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담배 피운 시간은 그보다 더 길 것입니다. 담배에 불붙이는 데만 열 이틀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저 기쁨과 웃음으로 지낸 시간을 잘 계산해보니 마흔 여섯 시간밖에 없더란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날을 어떻게 계수 하십니까? 여러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십니까?

227 참새와 같은 인생
 
주후 17세기초에 복음이 처음으로 영국에 전파될 때의 이야기에 이런 것이 잇습니다. 그 때에 영국은 작은 나라 여섯으로 나뉘어 있던 때입니다. 그 나라 가운데 노듬브리아(Northumbria) 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에드워드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어떤 전도자가 그 왕에게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왕이 자기 혼자는 암만 생각해야 확실히 알 수가 없어서 하루 저녁은 연회를 베풀고 모든 신하를 다 초청해서 저녁을 잘 대접한 후에 이 문제를 꺼냈습니다.“어떤 이가 와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 하는 것을 토론해 보자”고 그러니까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어떤 늙은 재상이 일어나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이렇게 가끔 저녁에 불을 켜고 연회를 하게 될 때 밖은 어둡고 마침 비가 오고 바람마저 불게 되면, 참새란 놈이 창으로 날아 들어와서는 이 밝은 방안을 한 번 휘돌고 저편 창문으로 도로 나가는 그런 경우를 보지 않았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우리 인생이 그 참새와 비슷합니다. 이 밝은 세상에 잠깐 와서 사는데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고 마지막에 어디로 가는지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새로 들어온 종교가 우리 인생의 이 깊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하면 우리는 이 종교를 믿어야 될 줄 압니다”이렇게 말을 할 때에 모든 신하들이 다 옳게 여겨서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인생의 이 깊은 뜻을 해결해 주는 종교입니다. 순간적인 욕심을 가진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주는 종교입니다. 인생이 비록 잠깐이나 이 동안에 영원한 거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생활의 최고 목표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요. 인간 지혜의 최고의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을 계수 하는 지혜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의 하루하루 아니 한 시간 한 시간을 천금같이 아끼면서, 바로 사용하고 위로는 하나님께 봉사하고, 아래로는 모든 사람 즉 민족과 국가에 봉사하면서 사는 것이 참된 지혜 있는 생활인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인생의 아침에, 일찍 젊었을 때, 이 진리를 깨닫고 이대로 나아가면, 비록 수고가 많고 슬픔이 많은 이 세상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만족히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빠른 세월 가는 인생>에서

228.헨델의‘메시아’작곡
 
미국 포스턴 시에는 헨델과 하이든회라는 것이 있어서 150년간을 계속해서 보스턴에서 연극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실었던 타임지가 계속해서 헨델이 메시아를 쓸 때의 얘기도 좀 썼는데, 이 때 헨델이 런던의 어떤 집에 들어가서 23일간을 조용히 방에 앉아서 두문불출하고 하나님을 묵상하며 영원한 나라를 묵상하는 가운데서 이 메시아를 썼다고 합니다. 그 메시아를 쓰는 동안에 어떤 날 한번은 그 집의 일꾼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헨델이 대답하는 말이“하늘이 내 앞에 열렸다”고, 아니“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을 내가 뵈었다”고 하였습니다.
  헨델은 그 위대한 작곡을 하기 전에 하늘을 보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면한 것입니다. 이 새해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면해서 그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보세요. 고칠 것을 다 고치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가 듣게 되고, 하나님이 하시고자하는 일을 내가 깨닫고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으로써 복음을 전파하면 우리 온 한국이 새 한국이 될 것입니다. 이 새해에 새 비전을 보고 이 비전이 현실로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일해야 합니다.  <새해의 새 비전>에서

229.비전과 순종

조금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모든 위대한 생활, 모든 위대한 사업, 모든 위대한 예술, 모든 위대한 음악. 모든 위대한 건축, 모든 위대한 과학적 발명이나 발견에 이르기까지 그 배후에는 먼저 비전이 있었고, 다음에는 거기 대한 순종이 있습니다.

230.예술가 라파엘의 비전
 
문예부흥 시대에 유명한 예술가로서 성화 마돈나를 비롯해서 많은 위대한 성화를 그린 라파엘(Raphael) 에게 어떤 친구가 한 번은 그 비결을 물어보았습니다.“당신은 어떻게 그런 위대한 작품을 내십니까?”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별다른 비결은 없습니다 다만 어떤 그림을 그리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그 그릴 그림을 내게 보여 주십니다. 나는 내 마음으로 보는 그 그림을 캔버스에 옮겨 놓는 것뿐입니다”먼저 위대한 비전을 보고 거기에 순종할 때에 위대한 작품이 나타난 것입니다.

231.비전의 뼈대 역할
 
위대한 가정을 건설하려고 하더라도 거기 대해서 먼저 하늘로부터의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 비전대로 가정을 건설해야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면 거기 대해서 먼저 보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 비전대로 나라를 건설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칼럼버스는 먼저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비전을 확실히 보았습니다. 만일 지구가 사실 둥글다고 하면 서편으로 계속 가도 반드시 떠난 곳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동양에 가기 위해서 서편으로 배를 지어갔습니다. 그 결과 새 대륙을 발견했습니다. 비전에 순종할 때에 새 대륙을 발견했습니다.
  1919년 봄에 무엇이 우리 민족대표 33인으로 하여금 나라가 다 망한 그 때에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3.1운동을 일으키게 하였습니까? 그들은 한국이 비록 망하였지마는 장차는 반드시 독립하리라고는 생각에서 독립된 한국의 비전을 미리 보고 독립만세를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비전은 꼭 순종의 의무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비전과 순종>에서

232.죄의 영향
 
어째서 우리는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만 합니까?
  첫째는 우선 내가 살기 위해서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 육체로 보면 이 육체의 모든 기관이 다 튼튼하다고 하지마는 어떤 한 기관이 약하고 기관에 병이 들어서 그 병을 고치지 못하면 그 한 기관의 병 때문에 전체가 죽을 수 잇습니다. 이건 의사가 아니라도 다 압니다.
  다른 기관은 다 튼튼해도 심장 하나가 약해서, 심장병이 든 것을 치료하지 못하면 죽을 수 있습니다. 다른 기관 다 튼튼해도 폐가 약해서 폐병이 든 것을 잘 치료를 못하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적은 죄 하나야 어떤가 하지마는 이것을 그냥 두었다가 이것이 정 심하게 되면 마지막에는 이것 때문에 내가 구원을 못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집에 수돗물이 안 나와서 이유를 안만 찾아봐야 모르겠더랍니다. 깊이 파 들어가면서 수도관을 빼 보니 어떻게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죽은 쥐 한 놈이 수도관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죽은 쥐가 수도관을 막으니 수도가 나올 리가 있어요?
  우리 생명의 수도관에 죽은 쥐와 같은 죄가 있으면 내 전체 생명이 말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적은 모래알 하나가 큰 기계가 돌아가는 것을 정지시킬 수 있습니다. 적은 죄 하나가 우리의 큰 신앙의 운동을 아주 막아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꼭 벗어 버려야 합니다.
  금년은 특별히 전국 복음화 운동의 해입니다. 우리가 전국 복음화 운동에 가담하려고 하면 우리 하나 하나가 전도자가 되어야 하겠는데 내가 전도자가 되려고 하면 내가 먼저 이 죄를 온전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말만 듣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활을 봅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죄를 다 회개하고도 한 가지의 죄를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회개한 죄는 보지 못합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 하나만 있으면 그걸 보고 교회를 비방하고 예수를 비방하고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아무개 보라고, 믿는 사람이 저런 죄를 짓는다고, 우리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고, 우리 교회의 최고 목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는데, 이것을 회개 못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못 돌립니다.          

233.천국계단과 쇠사슬
 
어떤 사람이 이런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꿈에 보니 높은 계단이 보입니다. 대리석으로 쌓은 높은 계단이 보이는데 그 계단 맨 위가 천국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천국에 올라가기 위해서 그 계단을 올라가고 다른 사람도 천국에 올라가기 위해서 계단을 다 올라갑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마다 거이 발꿈치에다 쇠사슬을 하나씩 매고 올라갑니다. 쇠사슬이 좀 잡아당기기는 하지만 처음에 올라갈 때에는 과히 길지 않으니까 그냥 그런 대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얼마쯤 올라가서 쇠사슬이 길어지니까 그 다음엔 힘이 들어서 겨우 끌고 그저 조금씩 올라갑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얼마쯤 올라가다가 어떤 사람은 그 쇠사슬을 끊어버립니다 그 다음에 그저 나는 듯이 올라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끊을 줄을 모르고 계단만 올라가려고 합니다. 자기도 그냥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다가 미끄러져 떨어져서 깨어보니까 꿈이더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고 생각을 하다가 우연히 성경을 펴 보니까 이 구절이 나타났다고 합니다.“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이걸 벗어버려야 결국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내 스스로를 생각하면서 내게 달라붙어 있는 이런 무게와 죄가 무엇인가 이것을 꼭 찾아서 이 시간에 벗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벗어버릴 때는 이 시간입니다. 지금입니다. 용단이 필요합니다.

234.김 유신 장군의 용단
 
여러분, 김 유신 장군의 유명한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그이가 젊었을 때에 어떤 창기에 미쳐서 날마다 그 창기네 집에 놀려갑니다. 자기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젊은 김 유신을 자기 앞에 끓어 앉히고 단단히 책망을 합니다.“네가 그런데 다녀서 될 수가 잇느냐, 내가 얼마나 큼 소망을 가지고 너를 길렀는데 네가 이게 무슨 짓이냐? 주색에 빠지다니!”효심이 많은 이 김유신은 어머니 앞에 끓어 앉아서“제가 다시는 가지 않겠습니다.”맹세를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달 안 갔습니다. 봄이 돌아왔습니다. 날이 좋습니다. 그래서 좀 놀기 위해서 말을 타고 사방을 바라보면서 교외로 혼자 노래를 부르면서 갑니다. 거리를 건너갑니다. 한참 지나가다가 말이 갑자기 섭니다. 이거 왜 서나 가만히 보니까 전에 늘 다니던 창기네 집 앞에서 말이 섰습니다. 습관이 되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걸 보고 김유신 장군은 내려서 칼을 뽑아 말의 목을 베었다고 합니다. 그런 용단이 있기에 유명한 김유신 장군이 된 것입니다. 용단이 필요합니다.
  베드로도 법정 멀리 서서 비겁하게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죄를 짓다가,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예수 님의 시선에 마주친 다음에야 예수 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곧 그 자리에서 떠나 밖으로 나가서 슬피 울고 통곡하면서 회개했습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에서

235.이 큰  사랑을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침묵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크신 사랑과 은혜에 의지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큰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사람입니다.

236.기쁜 소식
 
제가 얼마 전에 어떤 교우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그 내용을 보니,“우리 아기가 작년에는 입학 시험에 떨어졌는데 금년에는 좋은 학교에 입학이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입학은 되었으나 등록금이 없어 크게 염려하였으나 본 교회 어느 잡사 님께서 이 사정을 알고 내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서 이 기쁨을 목사님에게 알려야 하겠기에 편지를 합니다.”라는 내용입니다.
  그와 같은 은혜도 감사히 생각하여 기쁨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밖에 없었거든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의 이 큰사랑, 이 큰 은혜를 받고, 이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할 줄 모르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237.큰 바위 종의 성귀
 
세기의 위인이라 이름을 듣는 처칠 경이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서 그 장례식을 런던 성 바울 성당에서 거행했습니다. 성 바울 성당은 영국에서 제일 큰 예배당입니다. 성 바울을 기념하여 지은 예배당이라 이름을 성 바울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당이 여러 가지로 유명하지마는 그 중에도 유명한 것은 그 종각 꼭대기에 큰 종을 달은 것입니다. 그 종의 이름을 큰 바위(great stone)라 합니다. 왜 그 종을 큰 바위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 종에는 빙 돌아가면서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구절이 바로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이 성경 말씀입니다.“만일 복음을 전파하자 아니하면 내게 화가 미치리로다”아마 이 종 둘레에 성경 구절을 새긴 것은 바울을 기념하여 예배당을 짓고 바울을 기념해서 이 종을 만들면서, 이 구절이 성경의 어떤 구절보다도 바울의 신앙과 정신을 표시한다고 여긴 까닭인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종이 한 번 땡 하고 울릴 때마다 모든 영국사람이 이 성경 구절을 듣기 위해서, 그리고 잊지 않기 위해서 이 구절을 새긴 것입니다.
  오늘 이 종소리를 우리 영락교회 교인 들, 아니 온 한국교회 교인들이 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때에 보음을 전파하면 열 두 가지 축복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열 두 가지 화를 받는 것입니다. <침묵의 화>에서

238. 놀라운 평화
 
마음의 평화가 얼마나 귀한가는 밀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세력이 많고, 돈이 많고, 지식이 많고, 지위가 있고 무엇이나 다 있다고 할지라도 마음에 평안(平安)이 없으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가령 이런 것들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 진정한 평안이 있으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239.심령의 평안에 대한 증거
 
어떤 심리학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마음만 평안하면 만난(萬難)을 돌파할 수 있지마는 마음이 불편하면 적은 일도 할 수 없다”심지어 편지 한 장을 바로 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평안하면 병도 속히 고칩니다. 혈액도 순환이 잘 됩니다. 소화도 잘 됩니다.
  요새 의학계의 말을 들어보면 병 가운데 거이 6, 7할이 마음이 불편한 가운데서 심리적 원인으로 생긴다고 합니다. 마음이 평안하면 머리가 맑아져서 생각을 바로 합니다. 손과 발이 바로 움직여져서 모든 일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평안하야 장사도 잘 할 수 있고 마음이 평안하야 공부도 잘할 수 있고 학생들도 마음이 평안하야 시험을 바로 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부인들은 마음이 평안해야 밥도 바로 짓습니다. 마음 불편한 부인들이 지은 밥을 잘 못 먹다가는 이빨 상하기가 쉽습니다.
  마음이 평안해야 바느질도 바로 합니다. 마음이 불편한 가운데 바느질 하다가는 손톱을 상하기 쉽습니다. 평안한 마음이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시려는데 잇습니다. 우리가 다 이 축복을 받습니까? 이 축복을 받으려면 몇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심령간에 평화를 수립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옳은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240.두 마음의 다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말을 들어보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서로 싸움을 합니다. 왕 양명의 말을 빌리자고 하면 우리 속에 도둑놈이 있어서 이 도둑놈과 항상 싸움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란이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하면 성신의 소욕(所欲)과 육신의 소욕이 서로 거슬려서 마음속에서 싸움을 합니다. 우리 마음속 자체에 이런 분열이 있고 내란이 있는 동안에는, 우리의 마음이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불안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경험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에 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困苦)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한 글귀를 우리가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 가운데서는 이런 글귀만 읽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우리 마음에 이렇게 분열이 있고, 우리 마음에 이렇게 내란이 있지마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면, 마음속의 모든 원수를 소멸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통합하고 하나로 만들어서 우리 마음속에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말씀은 그 말입니다. 삶의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平康)이라고 하는 말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42장 10절을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우리가 사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 님을 영접해서 내 마음에 모시고, 사실 예수 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과 같이 동행하면 이 축복이 우리와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241.평화의 그림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어떤 미술학교에서 졸업생들에게 그림을 그려오라고 하면서 평화라고 하는 제목을 내 주었습니다. 졸업생마다 자기가 구상하는 대로 평화의 그림을 한 장씩 그려 왔습니다.
 그 여러 가지 그림 가운데 특별히 대조되는 두 그림이 들어 왔다고 합니다. 한 가지 종류의 그림은 산골짝의 호수를 그린 것입니다. 그 옆에는 풀밭이 있습니다. 그 풀 위에는 소 ,나귀, 말, 산양 이런 짐승들이 한가하게 풀을 먹고 혹은 누워 있습니다. 잔잔한 호수 위에는 몇 사람이 한가하게 작은 배를 타고 낚시질을 합니다. 산이 조용하고 물이 잔잔하고 바람이 없고 모든 것이 참 평화롭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른 그림이 들어왔습니다. 아주 다른 성격의 그림입니다. 바닷가에 절벽이 있는데 때 마침 바람이 붑니다. 파도가 밀러와서 그 벼랑에 부딪치고는 다시 바다로 거품을 뿜으면서 흘러갑니다. 바람이 심하니까 나무가 꺾여져 내려옵니다. 나뭇잎이 춤을 추며 달아납니다. 얼핏보면 평화가 아니고 전쟁 그림 같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니까 그 절벽 사이에 구멍이 하나 있습니다. 그 구멍을 들어다 보니까 그 속에 갈매기가 한 놈이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 갈매기 둥지 옆에는 어미 갈매기가 가만히 앉았는데 둥지 속에는 깐 지 며칠 안 된 갈매기 새끼들이 고요히 눈을 감고 바람은 불거나 말거나 물결은 세거나 말거나 낮잠만 잘 자고 있습니다.
선생은 둘째 그림에다 일등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첫째 그림은 평화는 평화인데 그건 인간의 이상뿐입니다. 이 세상엔 그런 평화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이런 폭풍우 가운데서 얻을 수 잇는 평화입니다. 사실 그런 줄 압니다. 이 세상은 요란합니다. 언제나 혁명이 일어납니다. 전쟁이 일어납니다. 냉전이 계속 됩니다.  

242. 나환자 수용소‘소생원’
 
제가 두 주일 전에 전주에 집회에 가갔었는데 그 주일날 오후에 전주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나환자 수용소‘소생원’이라고 하는 데를 갔었습니다. 거기 있는 수 천명의 나환자가 꼭  한번 와서 예배를 바 달라고 해서 방문했는데 가보니까 여기 저기 솔밭 사이에 아주 잘 지은 건물이 있고 예배당도 벽돌로 잘 지어져 있었습니다.
  아마 오후 서너 시 반쯤 우리가 거기 도착하였는데 벌서 세시부터 그 분들이 다 예배당에 모여서 찬송을 불러서 예배당 가까이 가니까 찬송소리가 먼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들어가 보니까 사람이 가득 모였는데 어떻게 찬송을 부르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자세히 보면 어떤 분의 얼굴은 나병으로 말미암아서 좀 이상하게 됐습니다. 심지어 손가락이 없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이들이 그때 493장 찬송을 부르는데 어떻게 잘 부르는지 제가 그 사람들을 위로할까 하고 가긴 갔지마는 오히려 제가 그 사람들로 말미암아 큰 은혜를 받고 왔습니다.
그 광경을 볼 때에 제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들어왔습니다.“참 귀한 것은 복음이요, 하나님의 은혜다. 이들이 주 예수 님을 알지 못했던들 이런 가운데서 어떻게 희색이 만면에서 찬송을 부를 수가 있겠나? 몸은 비록 불치의 병에 걸렀어도 마음속에는 질병이라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평화가 있구나!” 
  예수 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놀라운 평화>에서

243.성도와 환난
스토익 철학자 에픽테투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아덴에 가서 전도할 때에 거기 에비구레오 스도이고 철학자들이 와서 토론하는 글귀를 볼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헬라 철학자 가운데 소위 스토익파에 속하는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큰 환난과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모든 것은 운명인데 우리 인간이 별 수가 잇느냐? 그저 인간의 의지로써 견디어야 한다 아무리 아파도 견디고 슬퍼도 견디어야 된다”이렇게 주장하고 행한 것입니다.
  그때 종으로서 유명한 스토익 철학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에픽테투스 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이런 철학으로 일생을 사는데 한 번은 악한 사람들이“이 사람이 얼마나 아픈 것을 견디나 보자”하고 이 사람의 다리를 비틀기 시작했습니다. 대단히 아프도록 비틀었지마는 아프다는 소리를 안 했습니다. 계속 힘껏 비트니까 “당신들이 그렇게 비틀면 내 다리가 부러질 것 같소” 이 한 마디밖에 안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꽤 견디다 하고는 바짝 더 비트니까 그만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래도 아프다는 말은 안하고“내가 그렇게 되겠다고 말하지 않았소”하는 말 한마디를 했다는 것입니다. 장한 일은 장한 일인데 그렇게 견딘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244.윌리암 E. 헨리와 김 소월
 
19세기 말엽에 영국에 윌리암 E. 헨리라고 하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폐병에 걸려서 많은 고생을 했고 뿐만 이니라 다리 하나는 절단 수술을 했습니다. 그는 그후에도 일생토록 몸이 약해서 수술을 많이 받았지만 아주 천재적 시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생활 철학이 바로 스토익 철학이었습니다. 인간의 의지로써 온갖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그런 시도 썼습니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라고 하는 유명한 시도 저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시를 쓰고 시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격려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 압니까? 자살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우리 한국에 유명한 김 소월이 이와 비슷합니다. 이 김 소월군은 참으로 천재적 시인입니다. 저와 오산학교 동창인데 학생 때부터 아주 시를 잘 썼습니다. 많은 아름다운 시를 썼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이 분이 하나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신앙을 얻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결국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의지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245,엎어놓아야 바로 가는 시계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어떤 선한 목적 때문에 이 환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친구는 탁상시계를 하나 갖다가 그것을 엎어놓았습니다. 누가 몇 시 나고 물어보면 제쳐보고 다시 엎어놓곤 했습니다. 그래서 누가“왜 그 시계를 엎어놓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의 대답이“그거 이상합니다. 이놈의 시계는 엎어놓아야 바로 갑니다”하는 것입니다.
  혹 우리가 바로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엎어놓을 때가 더러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쳐다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우리를 반드시 눕게 한다”
 우리는 사업도하고 이것저것 하느라고 분주해서 실상 위를 처다 볼 사이가 없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서 반드시 눕게 되면 자연히 위를 처다 봅니다. 질병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할 때가 있습니다.
    
246.축복을 위한 환난
 
이태리에 가보면 중세시대부터 내려오는 월렌시안 처치라고 하는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처음에 설립한 분은 피타 월터라고 하는 분인데 이 사람도 젊었을 때는 보통 이태리 청년들과 같이 허랑 방탕 하는 젊은이였습니다.
  어떤 날 저녁, 한 친구 집에 모여서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자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친구 하나가 쓰러져 생명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함께 즐기든 이 청년은 그 친구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다 세상으로 쫓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가고 정욕도 가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 세상에 있으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환난을 통해서 오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미 말한 대로 이 환난이 아무리 아프고 어려운 것이더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요셉의 생활을 생각해 보세요.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종으로 팔려가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환난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 축복이 따랐습니다. 요셉에게 만일 그 환난이 없었던들 그 후의 축복은 물론 없었을 것입니다. 축복이 따른 환난이었습니다. 종노릇 10년과 감옥살이 3년 후에 그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것입니다.
  그 환난 후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247.정금 같이 나오리라
 
이런 이야기가 잇습니다. 큰 부자로서 큰 공장을 가지고 잘 사는 분이 있는데, 한 번은 홍수가 나서 재산이 전부 물에 쓸려 떠내려갔습니다. 집과 공장이 모두 휩쓸려 내려갔습니다. 며칠 후에 비가 그치고 바람이 잔잔해지고 다시 해가 나서 물이 준 다음에, 이 사람이 자기 집 자리에 가보았더니 아무 것도 없고 돌작 밭과 모래밭뿐이었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이 사람은 그 자리에 앉아서 통곡을 하고 울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씻고 않았는데 사방을 가만히 돌아보니까, 이상스럽게 모래와 돌작 밭 사이에 광채가 나는 모래알이 있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조그마한 금싸라기들입니다. 그 곳은 사금 밭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금을 많이 캐어서 오히려 전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다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욥기 23장 10절에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나의 기도는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나의 가는 길을 나는 모릅니다. 이런 일이 왜 생기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아시는 하나님이 이런 경험을 통해서 나를 연단 시킨 후에 내가 정금 같이 되어서 나올 것입니다 욥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 에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난의 날과 신앙>에서

248.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
 
하나님은 우리 사회 가운데서 모든 부패와 부정을 일소하고 깨끗한 질서가 있는 사회를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바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모든 사상을 제거하고 이 땅위에 자유와 평화와 번영과 통일이 있는 민주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바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내일 우리가 맞이하는 3.1절의 정신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시간, 우리가 받은 재능, 우리에게 있는 지식, 우리에게 있는 물질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사용할 책임이 우리 청지기에는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249.옳은 삶
 
제가 옛날 북한에서 고아원을 할 때에 믿는 사람 가운데서 돈 좀 있는 사람들을 찾아본 경험이 있습니다. 찾아보니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우리 신의주에 고아원이나 양로원이 없어서 안 됐는데 이런 기관을 세워서 어려운 이들을 돌보자고 하는 말을 듣고 아주 기뻐해서 참 좋은 일이니 나도 얼마든지 돕겠다고 하여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그이보다도 돈도 더 많은데 이러한 사회사업 예기를 하자, 이 핑계 저 핑계하면서 결국은 못하겠다고 하는 이도 더러 만나 보았습니다. 그때 한 오 백원씩 좀 내자고 권했는데 그때 오 백원은 지금은 오십만 원쯤 되겠습니다.
  그후 몇 해 후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공산당이 들어왔습니다. 돈이나 좀 있던 사람들은 전부 숙청을 당했습니다. 자기 집에서 다 쫓겨났습니다. 많은 사람이 남한으로 넘어왔습니다. 그 가운데는 고아원을 위해서 돈 낸 사람도 넘어오고, 권면은 받았으나 내지 않은 사람도 넘어 왔습니다. 이런 분들을 다 내가 만났습니다.
  어떤 자리에서 이런 예기를 한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내가 신의주에서 살던 경험을 생각해 보니 10여 년 동안 돈 벌어서 옳게 쓴 것은 고아원 위해서 오 백원 쓴 것밖에 없어요. 그 때 권면해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저런 예기 하다가 혹 그런 말이 나오면 미안해서,“지금은 크게 후회합니다. 그 때 그 돈을 꼭 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만 아까워서 안 내다가 공산당에게 다 빼았겼어요. 참 미안하게 생각합니다”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할 때 저는 흔히 대답하기를“그거야 알겠습니까? 남한에 와서 또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으면, 이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꼭 씁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에서

250.미국 건설의 밑거름
 
제가 지남 여름에 미국에 잠깐 들렸을 때 바쁜 일정 중에도 박람회 하는 데 가서 토요일 오후 한 나절을 보냈습니다. 미국관에 들어가 보니 미국이 어떻게 오늘의 거대함과 번영을 가져왔는가 하는 경로를 보여 주는 그림, 사진, 도표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유럽에서 황무지 대륙으로 밀려오는 이민의 얼굴들이 나타납니다. 남녀노소가 여러 나라에서 적수 공권으로 이 대륙을 찾아옵니다. 황막한 들판, 우거진 수풀, 뛰노는 짐승들, 출몰하는 토인이 있는 이 대륙에, 이들이 적수공권으로 와서 무엇으로, 어떻게 하여 오늘의 미국을 이루었겠는가? 그 열쇠가 어디에 있겠는가를 생각하여 그 전시를 다 보고 나면 말을 안 해 주지마는 누구니 한 가지는 깨닫고 나옵니다.     
  그것은 일입니다. 그들은 일, 일,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도끼로 일했습니다. 호미로 일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불도저로 일했습니다. 트랙터로 일했습니다 산림을 베고 토지를 개간하고 길을 닦고 땅에서는 금, 은, 동, 철을 캐내고 석탄을 파내고 가솔린과 석유를 뽑아내고 집을 짓고 도시를 건설하고 공장을 건설하고 마천루를 짓고…일했습니다. 결국은 일입니다. 손으로 일하고 머리로 일하고 밤낮 일하고 부지런히 일하고 결국은 이 일이 오늘의 미국을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첫 째는 건전한 마음의 자세로 일하려는 결심, 그 다음엔 일, 그 두 가지가 말하자면 오늘의 미국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251.미국의 정신적 기초 뾰죽 집
 
지금은 작고하셨지마는 장덕수 선생께서 처음에 미국 가서 그 때 자기 눈으로 본 미국의 현상을 우리 어떤 신문에 연재 보도한 일이 잇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지금까지 잊지 않은 것은“여기 미국에 와 보니 우리 한국과 다른 게 한 가지가 잇는데 아디 가든지 뾰죽 집이 많다(이 뾰죽 집은 물론 예배당을 가리켰습니다) 이 미국의 정신적 기초는 이 뾰죽 집에 있다. 기독교에 있다”하는 글이었습니다. 이렇게 미국의 교회가 발전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252.애스베리 신학교의 벽화
 
미국 켄터키주에 잇는 애스베리 신학교에 가보면 제일 넓은 담에 큰 벽화를 그린 것이 있습니다.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한 손에는 말 고비를 잡고 말을 타고 달려가는 목사의 그림입니다.‘말 타고 순회하는 목사 써클 라이드(Circle Ride)’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미국 초창기에 유럽에서 많은 이민들이 건너와 이 곳에도 정착하고 저곳에도 정착하고 사방에 정착했습니다.
  그 때에는 길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기차도 없는 때인데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목사들이 말을 타고 정착지를 따라다니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이면 말을 타고 이 동네 외서 예배 보아주고, 다시 저 동네 가서 예배를 보아주고 했습니다. 사방에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오늘 날 미국 교회의 발전도 결국은 일의 결과입니다. 건전한 마음의자세로 스스로 굳세게 하면서 주를 위해서 일했습니다. 일하는 것 없이 교회는 발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일하라고 권면합니다. 일은 인간에 천직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라고 일을 맡겼습니다. 일함으로 건강해 집니다. 일함으로 지혜가 발전됩니다. 일함으로 문화가 발전됩니다. 일하는데 모든 건설이 있습니다. 일하는 이에게 참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굳세게 하여 일하라>에서

253.참 회개

참 회개에는 열매가 따릅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면 우선 그 손해를 갚아 주는 보상이 따릅니다. 삭게오는 자기의 죄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힌 것을 우선 보상했습니다. 첫째 열매가 이것입니다.

254.예수 믿은 식모의 고백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 어떤 젊은 여자가 일본 사람 집에서 식모 살 이를 했습니다. 처녀입니다. 주인 집 아주머니가 매일 찬거리를 사오라고 돈을 주면 이 식모는 매일  조금씩 거 기서 떼어내고 찬을 사오곤 하였습니다.
  물론 그 주인은 모릅니다. 그 후에 이 여자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조용히 자기 과거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하면, 언제든지 그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내가 도적질을 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완전히 회개하고 어떻게 했던지 아십니까? 그 떼었던 돈을 다 계산해서 그것을 가지고 주인에게 가서 고백하고 다 갚았습니다. 적지마는 이것이 참회개의 열매입니다.

255.보상할 수 없는 죄
 
톨스토이의 유명한‘부활’이라고 하는 소설의 카추샤의 비화가 바로 그 예기입니다. 한때 청춘의 정욕으로써 다른 여자의 일생을 망쳐버렸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 여자는 아주 타락해 버렸습니다. 그후에 이 죄를 보상하기 위하여 안타까운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갚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남녀교제를 삼가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가 있든지 선을 넘지 않아야 합니다. 조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56.고해와 회개 증거
 
중세사회에는 죄를 지은 사람이 신부에게 가서 좌를 고백하면 죄를 사해주기 전에 죄인에게 일을 시킵니다. 어디 순례를 다녀와라, 구제사업을 하라, 연보를 하라는 등의 일을 시키고 그것으로 회개한 증거가 있은 후에 야 죄를 사해주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여자가 와서 죄를 고해하면서 하는 말이“내가 실수해서 어떤 사람에 대하여 없는 예기를 퍼뜨려서 많은 명예를 손상시켰는데 그 큰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용서를 받겠습니까? 그 신부가 하는 말이 내일 아침에 큰 주머니를 하나 가지고 오는데 그 주머니 속에 닭털을 가득히 넣어 기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튿날 그 여인은 닭털 주머니를 가져왔습니다. 
  그 신부 하는 말이“전에 당신이 몇 집이나 가서 예기를 했는지 집집마다 찾아가서 그 대문에 이 털을 하나씩 놓고 오라”고 했습니다. 이어 이 여인은 뛰어다니면서 털을 하나씩 놓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이제 되었습니까?”“아니요 한 가지가 더 남았소”민 주머니를 또 주면서 그녀가 놓고 온 털을 다시 모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말하기를“바람이 이렇게 부는 날에 그 털을 어떻게 다시 모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부는 꼭 다시 모아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모아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에 신부가 하는 말씀이“말이라고 하는 것은 하기는 쉽지마는 한 번하면 다시 모을 수 없는 것이요. 우리가 얼마나 말을 조심해야 하는지 아시오? 당신 죄가 얼마나 큰지 당신은 아시오? 단단히 책망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어떤 죄는 우리가 아무리 갚으려고 해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경계하여야 합니다.

257.코페르의 비문
 
예수 님께서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마르게 하셨습니다. 나무가 불쌍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경고하시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신 줄 압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코페르는 크스다 천문학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한 과학자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의 유언에 의해서 그의 묘비에 이런 비문을 새겼다고 합니다.
 “주여! 나는 사도 베드로에게 주신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주신 은혜도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강도에 주신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지식과 과학이 문제가 아닙니다. 명망(名望)이 쓸데없습니다. 오직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 죄 사함은 주님의 부름을 듣고, 응답하고, 주님을 영접하고 온전히 과거의 생활을 청산할 때 받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받고 부활절을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회개와 그 열매>에서

258.그리스도인의 각오

 우리 믿는 사람도 고통의 십자가는 질 수밖에 없습니다. 3·8선, 6·25, 천재지변, 사업의 실패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인생 고는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받으나…”우리 믿는 사람도 이 환난은 꼭 같이 받습니다. 이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각각 다 이 몫에 태인 십자가가 있는데 이 십자가를 잘 지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십자가를 불평하지 말고, 이 십자가에 반향하지 말고, 이 십자가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잘 지고 가라고 하는 말입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내 주에 지신 십자가 세인은 안 질까 십자가 각기 있으니 내게도 있도다”이 내게도 있는 십자가를 잘 지고 따라오라는 말입니다. 

259. 나의 십자가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지만 항상 마음 가운데“내가 진 십자가는 너무 무거워서”하는 불평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꿈을 꾸는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언덕길로 올라갑니다 올라가다 보니까 산 중턱쯤인데 십자가를 여러 개 만들어 세워 놓았습니다.
 위로부터 소리가 들리는데 “네가지고 올라오는 십자가 때문에 매우 고생스러울 텐데 여기 십자가 많이 있으니 네 마음대로 하나 택해 보아라”하는 말입니다. 그래서“옳다 되었다 다른 것 하나 얻어보자”하고서 살펴보니 참 자그마한 십자가가 하나 있습니다. 빛이 뻔적 뻔적 나고 보석이 박힌 아름다운 십자가입니다.
  그는 얼른 이 십자가를 한 번 져보겠다고 했습니다. 허락을 받아 이 십자가를 어깨에 메니 조그맣기는 조그마한데 전부 황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무거워서 일어나기조차 어렵습니다. 
  겨우 일어나서 몇 거름 걷다가“이거 너무 무거워 못 지겠습니다”하고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것 하나 골라보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조그마한 중 십자가인데 아름다운 장미꽃이 가득히 피어 있습니다. 향기가 나고 아름답고 해서 이 십자가를 지었습니다.
  저 보니 처음엔 괜찮더니 장미꽃에는 가시가 있지 않습니까? 이 가시가 어떻게 잔 등을 찌르는지 지고 갈래니 걸을 수가 없습니다.“이건 너무 가시가 많아 못 지겠습니다”“그럼 벗어 놓아라 어떤 십자가를 택하려느냐?”잘 살펴보다가 골라잡은 것은 처음에 벗어 놓은 지기의 십자가였습니다.“그건 네가 벗어놓은 십자가가 아니냐?”“그래도 이 십자가를 지려고 합니다”“그럼 네 마음대로 하라”자기가 벗어 놓았던 십자가를 다시 지고 가니까 한결 가볍더라는 것입니다.
남 보기에 다른 사람은 별로 십자가가 없고 내가 진 십자가가 제일 무거워 보입니다. 그러나 정작 내가 그 사람 자리에 앉아서 그 사람이 진 십자가를 져보려고 하면 그렇게 가벼운 것은 아닙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는 지혜 있는 하나님의 경륜가운데서 각기 주어진 십자가인데 지금은 깨달을 수 없어도 그저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잘 지고 가는 것이 제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각오>에서

260.십자가에 대한 묵상
 
성 프랜시스가 큰 은혜를 받게 된 계기도 그가 성 다미안 성당의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큰 은혜를 받고 온전히 그 자신을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혹은 모라비안 교회를 창립한 진젠돌프 같은 이는 어떤 미술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님의 성화를 바라보면서 그 앞에 무릎을 끓고 기도할 때에 큰 은혜를 받아서 온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게 되었고 그로부터 유명한 모라비안 교회가 창립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 사람들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앞에 나와서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일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남녀 노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습니다. 유식한 것과 무식한 것의 구별도 없는 것입니다. 제왕과 종이 다 같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대로 전 세계의 3분에 1되는 인구, 즉 10억의 인구가 기독교도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십자가의 인력으로써 주님 앞으로 나와서 큰 교회를 이룩하게 된 것입니다.

261.콘스탄틴의 십자가 깃발
 
십자가는 이 승리의 줄을 모든 사람에게 던져 줍니다. 죄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지마는 십자가를 통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로마의 첫 기독교 황제가 된 콘스탄틴은 자기의 대적되는 막센티우스와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교회에 있는 멜비우스 다리 근처에서 일전이 있게 되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 싸움이 있기 전 날 밤에 그는 환상 가운데서 큰 십자가가 하늘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이 깃발 아래서 승리를 거두라고 하는 글씨가 보였습니다.
  그 환상을 본 후에 콘스탄틴은 곧 십자가 기를 만들어서 그 기를 들고 나가 싸워 크게 승리를 하여 로마의 온전한 황제가 되었고, 황제가 되자 기독교를 핍박하던 것을 금하고 신교 자유령을 내린 역사적 사화는 우리가 다 상식으로 아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깃발아래서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승리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전 인류에게 소망의 줄을 던져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는 반드시 부활의 아침이 오는 것입니다. 밀 한 알이 땅에 떨어져서 썩으면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인력>에서

262.영생은 확실합니다.

첫째 이성에게 물어 보세요.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입니다. 인간에게는 생각하는 이성이 있습니다. 내게 의식이 잇습니다. 내 의식을 가만히 살펴보면 나의 의식을 조정하고 내 생각을 지도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이것을 자아(自我) 라고 합니다. 이것은 영혼이라고 합니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과 같이“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반드시 나라고 하는 것,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영혼의 존재는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 영혼은 우리 인간의 육신이 죽을 때에 어떻게 되겠는가? 없어지겠는가? 그냥 있겠는가?
  둘째로 과학에 물어보세요. 과학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여 줍니다. 물질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 모양으로 변하기는 하지마는,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물질 분별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도 죽으면 썩어집니다. 그것은 화학적으로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육신이 되었던 물질이 우주에서 아주 없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냥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서 가장 귀한 영혼이, 육신이 무너질 때에 없어질 수가 있겠는가? 미국의 미사일과 로케트의 유명한 권위자 브라운(Dr. Wernher Von Brown) 박사는 최근 어떤 잡지에 이런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즉,“과학은 무엇이든 아주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과학은 오직 변화를 알뿐이다”
  하나님께서 작은 물질에도 작용하시거늘 하물며 그의 최대 걸작인 인간의 영혼에 적용치 않겠습니까? 인간의 영혼은 죽은 후에도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영혼은 불멸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여러분의 심령에게 깊이 물어보세요. 인간 심령 깊은 속에는 영혼에 대한 관념이 있습니다. 영혼에 대해 동경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263.부활과 영생의 추구
 
왜 옛날 애굽 사람들은 죽으면 약을 발라 썩지 않게 하고 금자탑을 쌓아 놓고 영원히 보존하도록 힘을 썼습니까? 부활을 믿는 까닭입니다. 왜 진시황이 삼신산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며 동남 동녀 500 명을 보냈습니까? 왜 한 무제가 승로반(承露盤)의 찬이슬을 받아먹기를 하였습니까? 다 영원히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일을 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어디서 왔나 요? 우리 인간 자체를 살펴볼 때 인간의 본성이 있으면 그 본성을 만족하게 하는 대상이 반드시 있습니다.
  배고픈 본성이 있으면 먹을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듣고 싶은 본성이 있으면 소리가 있습니다 보고픈 본성이 있으면 볼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본성에 대한 상대는 없을까요?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달이 있기에 바닷물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바닷물이 올라오는 것은 달이 있는 증거입니다.
  테니슨의‘인메모리아’에 있는 유명한 글귀와 같이“사람은 그가 아주 죽으려고 지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이 생각이 어디서 왔습니까? 영생이 있는 까닭으로 인해 죽음의 세계에서 이런 생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영생은 확실하다>에서

264.가정 전도
 
내가 내 가정에서 전도하려고 하면 사실 참 믿음이 내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말로만 믿노라해서 가정에서 전도할 수 없습니다. 안 믿는 온 가족들이,“과연 우리 어머니는 과연 우리 아버지는, 우리 딸은. 우리 아들들은 참 진실하게 믿어”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믿음을 속이지 못합니다. 다 압니다.
  얼마 전에 그의 아버지를 제가 잘 아는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아버지는 장로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교회를 잘 안나와요. 그래서 왜 교회를 잘 안나오느냐고, 잘 나오라고 하면서 장로 아들이 그래서 되겠느냐, 잘 나와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예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 하는 말이“목사님 아직 나만큼은 모릅니다. 우리 아버지는 장로이긴 하지만 실상 예수를 잘 못 믿습니다.”그 아들에게 그렇게 보이면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전도할 수 없습니다.

265.신앙 투표
 
사실인지 모르나 이미 세상 떠나신 대구의 이문주 목사님 가정에서는, 우리 가정에서 누가 예수를 잘 믿나 투표했다고 합니다. 온 가족이 다 모여서 했습니다. 투표를 했더니 이 문주 목사님이 표를 제일 많이 얻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 참 목사입니다. 가정에서 표를 얻을 만큼 예수를 믿는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아들이 되고, 딸이 되면, 그 다음에는 전도할 것입니다.
  전도할 수 있을 만큼 믿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하는 모든 일이 꼭 성경대로 하는 모범이 되어야 가정에서 감화를 받습니다. 물론 예수를 믿는 것은 사람의 뜻으로 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 정성껏 기도하고 정성껏 권면하며 우리의 정성을 다하면, 제 경험으로 보면 그런 가정은 다 감화를 받습니다.

266.참 믿음으로 구하고 힘쓰면
 
우리 교우 가운데 어떤 자매는 상당한 가정의 자맨데, 그녀는 잘 믿으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도 있고 큰 사업을 하는 그 남편은 다른 면으로 실수는 없으나 교회에 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늘 위해서 기도하고 권해서 교화 나가자고 권면 하지마는 다른 것 다 하면서 이 말은 절대로 안 듣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온 가족이 감화 받게 되었냐고 하면, 한 번은 그 자매가 갑자기 몸이 약해져서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을 받고 병이 중해서 사람 보기에는 다시 살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남편이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한이 없게 하기 위해 자기 부인의 침상에 서서 “당신 나 보기에는 상당히 중한데 무슨 소원이 업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이 여자가 얼른 대답하는 말이“내 소원은 꼭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회개하고 예수 믿는 것을 보기만 하면 이제 죽어도 한없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남편이 그 자리에서 회개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어떤 어머니, 아버지들이 그의 아들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간절히 권면도 하지마는 종내 회개하지 않는 아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관머리에 앉아서 회개하는 아들도 더러 보았습니다. 참 믿음으로써 구하고 힘쓰면 결국은 온 가정이 감화 받게 됩니다.  <너와 네 집의 구원>에서

267.언더우드 선교사에 대한 내적 음성
 
내적 음성( 하나님의 음성)을 통하여 인도하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고요한 음성이 우리 성령 속에 들릴 수 있습니다.
금년이 선교 80주년 기념의 해입니다. 몇 달 전에 이 기념예배를 새문안 교회에서 볼 때에 제가 이런 예기를 했습니다. 언더우드 박사는 본래 한국에 오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인도에 가려고 생각한 분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전도의 문이 열렸다는 말을 듣고, 자기 친구 가운데 한국에 갈 수 있는 이가 누군가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별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 그의 심령 가운데 이상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왜 네가 가지 않느냐?”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이 음성을 듣고 그는 한국에 오기를 원한다는 지원의 편지를 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회답은 지금 선교비가 없어서 선교사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뉴욕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 그를 목사로 청빙(請聘)하는 청빙서가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 가는 길도 막히고 인도에 가는 일도 잘 안되어, 이제 나는 교회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수락하는 편지를 써 가지고 우체통에 가서 넣으려고 할 때에 음성이 들리기를“한국은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 편지를 부치지 않고 내가 직접 선교부에 가서 이 일을 의논할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선교부에 가서 의논하니 총무가 하는 말이“당신 참 잘 오셨소, 당신께 편지할 때는 선교비가 없었지마는 바로 며칠 전에, 어떤 사업을 하시는 분이 한국 선교비를 6천불을 가져왔으니 우선 이것으로 전도를 시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당신이 좀 가주시오.”해서 그가 처음으로 한국에 나왔다고 합니다.
  이런 경험은 언더우드 박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닌 줄 압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몸을 바쳐서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종종 이와 같은 세미 한 음성이 그의 갈 길을 인도하여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에서

268.인과 의
 
아마 40대 이상은 다 아실 줄 압니다. 옛날 서당에 다닌 사람은 맹자 읽어보지 못한 이가 없을 것입니다. 맹자 첫 페이지는 다른 것 다 잊어버려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기억하시지요?“맹자견(孟子見) 양혜왕(梁惠王)하신데 왕왈(王曰) 수불원천리이래(瘦不遠千里而來)하시니, 역장유(亦將有) 이리(以利) 오국호(吾國乎)이까”영감께서 이렇게 천리를 멀다 하지 않으시고 우리 나라에 오시니 장차 우리 나라에 이로운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맹자가 그 말을 듣자마자 이어 대답하는 말, "왕은 어찌하여 먼저 이익을 찾습니까? 나라에는 반드시 인과 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는 말이 "왕이 이익을 찾으면 사대부가 이익을 찾을 것이요. 사대부가 이익을 먼저 모으면 모든 관리들이 이익을 도모할 것이며, 국민이 모두 이익만 찾을 것이요, 그렇게 되면 사화가 부정해져서 나라가 망하고 맙니다"
요새 말로 하면 위에 있는 대통령이 이익을 도모하면 아래 있는 장관이 이익만 찾을 것이요. 장관이 이익만 도모하면 아래 국장들이 이익만 찾을 것이요, 과장이 이익만 찾게 되면 계장, 직원들, 마지막에 백성들이 이익만 찾게되고 나라는 망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어느 때보다도 부정과 부패가 많다고 하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 동양사람으로서 다 기독교를 모른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첫 페이지는 배워야 될 것이 아닙니까.? 안 믿는 사람도 말입니다. 

269.안 중근 의사의 ‘견이사의’
 
남산에 가면 안 중근 의사의 동상을 여러분이 보실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나라를 위해 처형되기 전에 귀한 글귀를 여러 개 썼습니다. 그의 글씨가 또 명필이었습니다.
  여러 귀한 글귀 가운데 제가 항상 잊지 못하는 글귀는‘견이사의(見利思義)’라는 글귀입니다. 즉“이익을 볼 때에 의를 생각하라”고 이익 나는 일이 있을 때에, 내가 금전적으로 유익한 일이 있을 때에 의를 생각하라. 그것이 옳은 도리냐 아니냐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작정할 때에 이것이 이로우냐 해로우냐, 하는 것보다도 이것이 쉬우냐 어려우냐, 하는 것보다도 이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이것이 의이냐 아니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작정하고 무엇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생활에 있어서 꼭 같은 원리인 갓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말씀했습니다.
  “의를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른 자”같이 하면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나라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 너희가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옳게 살기  위해서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에서

270.눈을 들어 주께 향하라
 
인생 길을 걸어가다가 어떤 때에 막다른 골목에 부딪칠 때가 잇습니다. 아무리 돌파구를 찾을 내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을 들어 위를 바라봐야 합니다. 

271.진강산에서의 기도
 
오래 전에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에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제가 존경하는 장로님이 한 분이 계셨는데 그 장로에게서 그의 경험을 들은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 장로님은 본래 촌에서 농사지으면서 살던 장로님인데 촌에서 그런 대로 생활은 할 수 있었지마는 그러나 자녀들 교육이 힘들어서 돈 될 만한 것을 다 팔아서 신의주로 이사를 했습니다. 와서 이런 사업, 저런 사업을 해보았지만 경험이 없고 해서 거듭 실패를 하였습니다.
  몇 해 후에는 촌에서 가져온 돈은 다 없어졌습니다. 자녀들을 더 많이 낳았습니다. 학비는 많이 듭니다. 마지막에는 끼니조차 어려운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새도록 무슨 궁리를 하지마는 생각이 잘 나지 않고 잠은 한잠도 못 잡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는 무슨 생각이 낳는지 압록강 철교를 건너서 안동이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신의주에는 산이 없으나 안동에는 진강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꼭대기를 올라갔다고 합니다. 올라가서는 어떤 소나무 아래 앉아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물론 전에 교회를 다닌다고는 했지만 이런 간절한 기도를 드렸던 적이 없으리 만큼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생의 막다른 곳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매어 달려 기도했습니다 종일 기도했다고 합니다. 날이 어두운 다음에 다시 압록강 철교를 건너오는데 다른 생각이 나는 것은 없으나 철교를 건너갈 때에는 빠져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철교를 건너올 때는 그런 마음은 없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지 하는 든든한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후에 여러 가지 사업을 하는 중에 모든 것이 형통해서 가정은 안정을 이룰뿐더러 다른 사람들까지 많이 도와주다가 이 장로님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에 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72.‘에벤에셀’과 ‘여호와 이레’신앙
 
근대 선교 역사를 공부하는 가운데 위대한 선교사의 전기를 우리가 많이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중국에 가서 선교하시던 분 중에서 제일 유명한 분은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라고 하는 분일 것입니다.
  다른 분도 많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허드슨 테일러는 영국 사람으로서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서 복음을 알지 못하는 곳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자원하여 중국의 선교사로 간 것입니다. 영국의 어떤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중국에 가게된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몇 해를 전도하는 가운데 하루는 영국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는 선교회 총무가 보냈는데 그 내용을 보니 “선교비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서 당신의 월급을 매달 보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힘써도 안 됩니다. 섭섭한 일이지마는 본국으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하는 소환장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테일러는 민망해졌습니다. 멀고 먼 곳에 전도하려 왔는데 선교 비용이 없어서 돌아오라고 하지만 돌아가자니 민망하고, 계속하자니 앞일이 캄캄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이 테일러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데 구약성서 중의 히브리말 두 말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사무엘서에서 나오는‘에벤에셀’이라는 말인데“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셨다”하는 뜻이요. 또 하나는 창세기 22정에 나오는 말로‘여호와 이레’라고 하는 말입니다. 즉“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느니라”하는 뜻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이삭을 제사 드리려 올라갈 때에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물어보기를“아버지여! 제사들일 나무도 있고 불도 있는데 제사들일 양이 없으니 어떻게 하시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얼른 대답하는 말이“여호와이레, 여호와께서 그것을 준비하시느니라”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준비하시리라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데로 과연 하나님께서는 미리 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테일러는 이 말이 기억났습니다. 그는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셨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리라 하는 말씀을 믿고 이 땅에 계속 남아 복음을 전파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중국 사람 입는 대로 옷을 입고, 중국 사람 먹는 데로 먹고, 중국 사람 자는데서 자고, 중국 시림과 꼭 같이 살면서 전도를 계속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굶기지 않으셨습니다. 쓸 것 그냥 주셨습니다. 외롭게 혼자 전도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많은 일꾼들을 보내 중국 내 지선교회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 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헤이드 미tus이라는 테일러의 신앙에 의지한 전도운동이었습니다.  
      
273. 천로역적의 저작과정
 
여러분, 앞이 보이지 않을 떼에 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읽어보신 분도 많이 계실 줄 알지마는 못 읽어본 이는 이제라도 사다 읽어보십시오.《천로역정》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지요. 이것을 누가 어떻게 해서 썼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시지요. 청교도 운동을 영국 성공회에서 핍박하였습니다. 한 청교도가 성공회 허락 없이 전도한다고 붙잡혀 가서 감옥에서 12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전도 못하고 감옥에 가서 젊음을 허송하게 되니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그러나 이 존 번연(John Bunyun)은 그 가운데서 은혜를 받아《천로역정》이라는 책을 써서 12년 동안 다니며 전도하는 것 보다 책을 통해서 몇 배의 많은 생명을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오산 학교를 창설한 남강 이승훈 선생께서 105인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실 떼에 신약성서를 백독(百讀) 하였다고 합니다.  <눈을 들어 주께 향하라>에서

274.여호와의 등불

한 번은 어떤 유물론자가 한 목사에게 와서 이런 질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목사님께서는 우리 인간 육체 속에 영혼이 있다고 믿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목사는 대답하기를 “나는 사실인줄 믿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청년이 하는 말이“내가 아무 대학 부속 박물관에 가보니 사람을 분석한 것이 있었는데, 사람의 육체 속에는 수분이 몇 퍼센트, 광물질이 몇 퍼센트, 탄수화물이 몇 몇 퍼센트, 등으로 열 여섯 기지 종류로 나누어 실험 병에다 넣었는데 그게 인간의 전부이고 영혼이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그 목사 말하기를“그러면 당신에게는 그런 물질밖에는 없다고 생각합니까?”했더니 그이 대답이“나는 그런 줄로 압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는 말하기를 나는 그 문제에 대하여“당신과 더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 왜? 토론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지요. "당신과 같이 물 얼마, 광물질 얼마, 탄수화물 얼마로 된 사람과 나는 얘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유물론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모순입니다. 인간이 물질뿐이면 유물론을 생각하는 그 자신이 부정됩니다. 없어지고 맙니다. 과연 사람의 속에는 불멸의 영혼이 있습니다. 그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입니다. 이 영혼에는 빛이 있습니다. 이 빛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275.생각하는 갈대
 
파스칼의 말 가운데“인간은 한 갈대라”고 했습니다. 심히 약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신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실입니다. 생각도 보통 생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연구하고 분석하며, 창작을 하는 생각입니다.
  즉 이성이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까치나 까마귀는 천년 전에 지은 집이나  오늘날 지은 집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호랑이는 당군 할아버지 때에도 굴속에 살았고 오늘날도 여전히 굴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원시시대에 굴속에서 살던 혈거시대가 있었습니다. 제주도에 가보면 지금도 삼성혈(三姓穴)이라고 하는 곳이 잇는데 거기에는 조그마한 구멍들이 있습니다.
  아마 옛날 제주도의 삼성 조상들이 살던 굴인가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제주도는 사람은 굴속에서는 살지 않습니다. 또한 몇 해 전에 지은 집과 요사이 짓는 집이 다릅니다. 여러분, 서울 주변을 다녀보세요. 얼마나 새로운 형태의 주택이 세워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속에는 이성이 있어서 간단없이 새로운 것을 창작합니다. 이성의 빛이 과학을 발전케 하였습니다. 작은 현미경도 만들었습니다.
 이 작은 현미경을 통해서 우리는 눈으로 보지 못하던 많은 세균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의학계에 새로운 기원이 되어서 많은 병을 알게되어 고치게 되었고 예방의학이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등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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