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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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4 니고데모 (신중했던 사람)




오늘 만나 볼 하나님의 사람은 밤에 주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에요. 니고데모라는 말은 백성의 정복자라는 뜻인데요, 이 사람 바리새인이면서 또 유대인의 관원이요,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라고 그럽니다. 요즘 우리 시대로 말하면 뭐 국회의원 그 정도 되겠지요. 이스라엘의 지도자이면서 또 교사였고, 부자였다고 전해집니다. 국회의원쯤 되면 국, 내외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에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겁니다.


니고데모는 지금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고 있는 그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겠지요. 그러고는 한 번 만나봐야 되겠다고 하는데 사실 낮 시간에는 예수님께서도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계시기 때문에 조용한 기회를 아마 얻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그래서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 왔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걸 두고 드러나게 예수님 찾아오는 데에서는 사람의 그 이목이 두려워서 그랬다 이런 식으로만 일반적으로 보는데요. 그런 면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낮에 붐비기 때문에 예수님하고 조용하게 어떻게 이야기 하기는 없을 거예요.


다시 말하면 이 사람은 아주 신중하고, 또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고, 또 관심을 가지고 찾아와서 살피기도 하고 대화해보는 그 사람들이 많이 따르고 이리 저리 민중이 밀려다니고 할 때에 어떤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을 선동하는 지도 모르니까, 국회의원으로서 당연히 이렇게 한 번 살펴보는 것은 참 아주 사려 깊은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밤에 예수께 와서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매우 공정한 말이거든요. 뭐 되먹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 권능이 나타나니까 귀신의 왕 바알스바를 지펴 가지고 그런 능력이 역사 한다 이런 식으로 평가했는데 니고데모는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라도 이런 능력을 행할 수 없다. 이래 아주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이 사람이 중심에 무엇을 묻고 싶어 하는가를 예수님이 금방 아시고요, 그냥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니깐 니고데모가 어휴 사람이 늙으면 낳을 수 있습니까, 두번째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새로 나아야합니까? 이렇게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 당신이 말하는 그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새로 나온다 그런 말은 다 육으로 난 것을 말하는 것이고,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을 말하는 것이데,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듣지마는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 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니고데모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대답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이렇게 반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 되어 가지고 이러한 일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 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 하는 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 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유명한 구절이 말이죠 니고데모 때문에 나온 것 거거든요. 그러나 아마 신약성경 중에 가장 많이 우리 성도들 입에서 그 오르내리는 유명한 은혜로운 구절이 있다면 틀림없이 요한복음 316절인데 그것은 니고데모 때문에 이 유명한 구절이 나온 거지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 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 영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임이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느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 참 중요한 말씀인데 지금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평소에 그래도 떳떳하게, 바르게 나름대로 양심껏 살았기 때문에 빛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근데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께 안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악을 행하면서 빛을 미워하고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그 빛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 인제 간접적으로 니고데모를 칭찬하고 있는 거지요.


한편은 영적인 것에 대해서 무지한 니고데모를 책망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찾아온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선을 행하는 사람들, 그리고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게 된다 하면서 그 온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아주 기뻐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무엇을 여쭈어 보기 위하여 찾아왔던 사람들, 대개 무엇을 몰라서 온 사람들보다는 언제나 예수님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온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런 것 같지는 않죠.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마는, 그는 신분이나 연세나 뭐 그 어디를 봐도 당시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예수님보다는 지체가 높은 사람이지요. 예수님이야 뭐 당시에 갈릴리에서 온 목수에 불과했는데, 니고데모는 지체도 높고 나이도 많지만 그런대도 정중하게 찾아 와서 그 묻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자세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말씀에도 반박하지 않고 모르는 것은 계속 모른다고 하면서 솔직하게 묻는 자세는 아주 우리가 배울 만한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날 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방문하여서 몇 가지를 질문했지만 사실 니고데모 자신에게는 뭐 별로 도움이 안 된 것 같아요. 이해가 안됐으니까, 그러나 그날 밤 주님께선 실로 놀라운 말씀을 하셨지요. 요한복음 316절 뿐만 아니라 그 전후에 나오는 이 거듭남의 교리도 역시 니고데모 때문에 나온 말씀이지요.


중생, 즉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 영적으로 난다 하는 이 말은 다른 곳에는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직 이 니고데모 앞에서만 그 말씀을 하셨거든요. 우리가 평소에 듣는 성경 말씀들이 당시에는 알아듣지도 못하고, 소화도 안 되는 수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신앙적인 체험이 넓어지게 될 때 언젠가는 또 이해가 되고 그 깊은 뜻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니고데모와 대화를 마치신 후에 주님은 얼마 안 되어서 다시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셨는데요. 그러면서 그때는 사마리아 수가 성을 지나서 올라가셨던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데, 이번에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삼십 팔년 된 병자를 고쳐 준 일이 있지요.


그 사건이 사람들에게 알려 지니까 사람들이 많이 막 몰려다니기도 하고, 당국자들이 상당이 신경을 쓰면서 하속들을 보내서 아예 당장 예수님을 딱 잡아 오라고 사람을 보냈거든요. 근데 잡으러 갔던 사람들마다 예수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가지고 잡아 오지 못했다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을 하셨는데, 그래서 그 잡으러 갔던 사람들이 우리가 지금까지 여러 사람의 설교를 들어봤지만 그렇게 설교하는 사람을 못 봤습니다. 하고 말하니깐 당시 그 지도자들이 막 잡아 오지 못했다고 호통을 치고 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 그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들아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들어 보기도 전에, 그 행한 것을 알기도 전에 판결해 버리느냐 하면서 그의 일반적인 의회 의원들의 행동에 대해서 옳지 않다고 거기서 한 마디 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봐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 그러면서 옥신각신 할 때, 일 년 쯤 됐거든요. 밤에 찾아왔던 그 날로부터 한 일 년쯤 지났는데도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해서 함부로 취급하고 함부로 막 잡아 오라고 하는 그런 결정에 대해서 옳지 않다고 그런 의사를 표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예루살렘은 참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길로 빈들이 가까운 에브라임 땅에 상당이 지냈었는데요,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믿되 조금 소극적으로 믿은 것은 사실 같아요. 그러나 그는 확실히 신중한 사람이었으며, 신의가 두터운 사람이었습니다. 다수를 따라서 악을 행치 않는 사람이었지요.


사람들은 대개 똑같이 않은 저울을 가지고 있어 가지고 자신의 우유부단한 것은 신중이라는 저울을 달고요, 남의 신중을 그저 우유부단하게 이렇게 달기가 쉽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지마는, 니고데모는 소극적인 사람이 아니라 실지로 신중한 사람이라고 우리가 봐야 될 겁니다.


현대인들은 성미가 이제 급해가지고 뭐 전격적인 무슨 변화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많은 부작용과 충격이 따르기 마련이지요. 아무것이나 함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오히려 위험천만한 것이죠. 아무리 우리가 그 짧게 쓰고 버리는 그런 것도 고르고 가르고 할 때는 신중하게 하는데, 이 종교라는 것은 자기의 영원한 운명이 걸려있기 때문에 종교 지도자를 따라 가는 것은 아무나 따라 가면 안 되겠지요. 오히려 아무것이나 함부로 덤비는 사람들과, 하루아침에 성자가 되려고 하거나, 하루저녁에 무슨 소나무 뿌리를 뽑고 능력의 종이 되겠다는 사람들은 큰 문제지요. 이런 사람들은 정말로 신중을 좀 배워야 할 겁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이 영적인 문제들을 하루아침에 끝장내려고 하는 발상은 상상만 해도 정말 현기증이 나는 일입니다. 니고데모는 전격적인 변화가 아니라 점진적인 변화의 길을 걷는 건실한 학자요, 또 성실한 성도였습니다. 국가의 대사를 맡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의회의 관원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는 아리마데 요셉과 더불어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 중에 아마 가장 고위층 인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쓰신다는 겁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예수님 장례식 할 때도 보면 향류를 가지고 찾아왔던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니까 점진적으로 믿음이 굳어져 가는 사람들, 신중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아리마데 요셉이나 여기 니고데모 같은 사람들은 아주 훌륭한 사람들로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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