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탕자의 비유 중 그 중간 부분으로 탕자를 맞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주님의 의도가 잘 집약되어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탕자의 비유가 자기의 분깃을 받아 아버지를 떠난 허랑 방탕한 탕자, 즉 '인류'를 설명하는데 데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기보다는 그 탕자를 맞으시는 아버지, 즉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관해서도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 탕자를 맞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기다리시는 아버지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에게 상속될 분깃을 미리 받아 다시 돌아올 기약 없이 떠나갔지만 언젠가는 그 아들이 돌이켜 아비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습..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관계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구속사적 기록입니다. 또한 긴 방황을 통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참 위치를 깨닫게 되는 인간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노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그들이 요구하는 것과 그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 속에서 느끼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민들을 볼 수 있으며, 상대적으로 그러한 가운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새롭게 해야 하는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집을 떠나는 아들 이 비유의 배경을 우선 살펴보면 아버지와 두 아들, 그리고 많은 품꾼과 큰 집 등이 나타나 있습니다. 1) 둘째아들의 욕망 집을 나가는 둘째아들에게는 분명히 자기 나름의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을 나서면서 그 아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입맞춤 (눅 15:18-21)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세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한 목자가 양 백마리 중에 한 마리를 잃어 버려 양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들로 산으로 떠나간다는 말씀과 또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 중에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리자 온 방안을 두지고 등불을 켜들고 빗자루로 쓸며 마침내 찾으니까 온 동네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잃어벼렸던 아들이 돌아오는 탕자의 비유 말씀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의 말씀은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축복을 사기당한 자(창세기 25장 27절~34절)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
하나님을 찬양하라! 얼마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이 소리를 외쳤습니까? 마치 우리가 하나님께 취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고귀한 태도가 바로 찬양뿐인 것처럼 그들은 오직 찬양하라고만 했습니다. 더 이상의 구구한 설명은 도리어 그 내용을 축소시킬 뿐인 것처럼 시편 150편은 '찬양'이라는 단어를 무려 열한 번이나 사용하며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찬양을 부르는 장소 또는 방법이나 동원되는 악기들을 통해서 무엇을 찬양해야 하며 어떻게 찬양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찬양에 대한 이러한 시인의 권고를 통해서 찬양의 방법과 그 영역의 깊이와 넓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는 반드시 찬양이 드려져야 합니다. 시인은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
본문에서 저자는 세상의 모든 만물들에게 찬양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온갖 산천초목들과 동물들, 그리고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내용에 대해 본문을 중심으로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산천초목의 찬양 시인은 인격적인 활동과 사고 작용을 하지 않는 산천초목조차도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였습니다. '불과 우박과…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8, 9절). 그는 '우박과 눈과 안개'에 대해 언급하면서 하늘에 덮이는 구름, 이 구름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단 한 방울의 물, 천둥이 무섭게 포효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이 온갖 조화가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함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
이 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환희의 찬양을 드리도록 권면하는 내용으로서 크게 두 가지로 분류가 되고 있습니다. 즉 1절에서 6절까지는 하늘에 있는 것들의 찬양과, 7절에서 14절까지는 땅에 있는 것들이 찬양하라는 권면입니다. 여기서는 하늘에 있는 것들이 하나님께 찬양하는 내용을 토대로 삼아 생각해 봄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하늘의 사자와 군대의 찬양 '그의 모든 사자(使者)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지어다.' 여기서 사자와 군대는 천사들을 의미합니다(참조, 왕상 22:19). 사자와 군대 앞에 쓰인 '모든'이라는 단어는 그들의 수효가 무수히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계시록에 보면 '그 수는 만만이요 천천이라'(계 5:11)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룟 유다에 의해 로마 병..
영광을 구하는 인생들이여! (시 148:1-14, 시 150:1-6, 요 5:49)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사람들은 영광받기를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그래서 서로 영광받기 위해 애쓰며 남보다 더 영광받는 자리에 앉기 위해 경쟁하며 다투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사실 사람들이 구하는 세상의 영광은 궁극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끝없는 탐욕과 허무감만을 더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생들은 그 영광을 구하는 것을 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곤 하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 우리는 그렇듯 영광을 구하는 인생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성경적 교훈들을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스스로 영광을 구하..
포도나무로 자신을 비유한 예수님은 성도를 향하여 '가지'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가지가 나무줄기에 온전히 붙어 있을 때에만 풍성하고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 안에 거한 성도에게는 자연히 좋은 신앙의 열매와 아름다운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궁극적 신앙 목적은 '늘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실 가지 자체로서는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하여도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뿌리로부터 올라온 영양분이 줄기를 중심으로 하여 가지로 전달될 때에는 잎도 피고 열매도 맺을 수 있습니다. 또 가지란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열매를 매달고 있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 이 말은 철저하게도 가지 혼자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뜻합니다..
본문은 포도나무 비유의 계속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서 자신과 제자들이 일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제자들과의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생명적 유대와 결합을 주님은 이 비유 속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포도나무와 가지 1) 포도나무와 가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5절). 예수께서는 조금 전 만찬회 석상에서 포도주 잔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나와 너희는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대속의 보혈로 맺어진 생..
예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로서 자신과 성도와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이 비유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또 비유를 통해서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가 받을 축복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비유의 의미 1)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소용이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가구재로 쓸 수 없고 땔감으로도 사용할 수 없으며, 장식품의 재료로도 이용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단지 열매를 얻기 위해 필요한 나무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성도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가지는 줄기에서 자랍니다. 포도 열매는 항상 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에 맺힙니..
본장은 16장과 함께 참 포도나무 비유를 필두로 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남아 있을 제자들에게 신앙적 삶의 성격과 내용을 교훈하신 내용입니다. 특히 본문의 참 포도나무 비유는 성육신 하신 '말씀'이 이 땅의 사람들에게 하는 마지막 고별사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를 끝내 거부하는 불신자들의 운명과, 이미 연합된 제자들의 영광과 고난이 교차되는 삶의 성격을 비유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봄으로 은혜와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참 포도나무 비유의 의미 1) 예언적 의미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위한 구속 계획안에서 유대 민족을 '극상품 포도나무'(사 5:2)로 인간 세계 속에 심어 놓으셨다고 했습니다(참조, 시 80:8; 렘 2:21; 호 10:1). 그래서 그 민족의 신앙..
열매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요 15:1-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아직까지 꽃망울이 활짝 터뜨려지지는 않았지만 우리들은 이내 망울마다 예쁜 꽃들이 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또한 과실수들도 망울마다 꽃을 피우며 이후엔 거기서 열매도 맺어 주인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도인 우리에게도 열매 맺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 것이 나옵니다. 그러면 오늘은 '열매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나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신자들이 열매 맺는 생활을 기뻐하시고 이 열매를 ..
본 편은 인생의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현장에서 자신의 고난을 물리쳐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이들이 감사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의 사랑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그리스도의 생활의 핵심이며 신앙생활의 근거가 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신 능력으로 성도에게 놀라운 감사의 조건들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대적의 손에서 구속해 주셨습니다.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2절). 이스라엘은 어리석은 범죄의 결과로 나라의 주권을 상실하였고 민족은 갈기갈기 흩어지는 비참한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하..
본문은 구약에서 보기 드문 성령 강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크게 3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① 구속에 대한 성부의 계획과 언약, ② 이 언약의 완성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대속, ③ 이 대속을 개인에게 적용시킬 성령의 사역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 3단계의 마지막인 성령을 통한 구속 사역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성령 강림의 약속 1) 구속사적 필요성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3절). 성령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선지자 요엘을 통해서도 하신 바 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은혜를 사모하는 자가 얻게 되는 복 (사 44:3,4, 시 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시 107:9) 몇 년 전에, 춘천에 가서 연합 성회를 인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서울의 모 침례교회 장로님이 춘천에 있는 아들에게 특별히 권면하는 전화를 옆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모 교회 부흥사가 가서 부흥 성회를 인도하게 되었으니, 시간마다 꼭 참석해서 은혜를 받도록 해라. 새벽기도 한 번도 빠지면 안돼!' 그러니까, 아들이 '아버지 다른 시간은 다 나갈 수 있지만 새벽엔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안돼, 내가 새벽마다 깨워줄테니 일어나 새벽기도에 꼭 가거라'. '아버지가 서울에서 어떻게 깨우십니까?' '내가 새벽4시부터 4시30분 ..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7절). 본문은 바울의 육체에 주어진 가시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가시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본래 '십자가', '가시'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것으로서 가시는 바울의 활동에 막힘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견해에 따라서는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두통, 간질, 안질 등 육체의 질병으로 보기도 하고, 끝없이 뒤따르는 박해, 또는 바울에게 주어지는 일체의 유혹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 내려간 이유와(참조, 갈 4:14, 15) 관련시켜 생각하면 육체적 질병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 중에서도 안질이 유력합니다. 바울의 육체를 괴롭힌 이 가시는 사탄의 사자로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육체를 괴롭힌 주권자는 사탄이 아니라 ..
지금까지 바울은 자신이 겪은 수많은 수난을 이야기했습니다. 11장에서 그는 복음을 위하여 자신이 수고를 넘치도록 했음을 이야기했습니다(참조, 고후 11:23-29). 이제 본문에서 자신의 신비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바울은 자신의 신비 체험을 자랑할 의도는 없습니다. 주의 계시를 자랑하고 교회를 세우며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하나님의 사역을 드러내려는 것뿐입니다. 이 신비 체험을 그는 14년이나 숨겨왔습니다. 14년을 숨겨온 사실을 이제 마지못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왜 그가 자신의 신비 체험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살펴보고 신비 체험 사실의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1. 바울은 신비 체험을 무익하지만 부득불 자랑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유대주의자들로 인..
바울에게 가시를 주신 하나님의 뜻 (고후 12:1-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어느 집회를 인도하려고 갔더니 금방 어느 전도사님 한 분이 들어와서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가만히 얼굴을 보니까 한쪽 눈이 옆으로 돌아가고 잘 보지를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전도사님이 들어와서 하는 말이 '제가 73년도에 이곳에서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할 때에 큰 은혜를 받고 지금 전도사가 되었습니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은혜받게 된 동기를 말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에, 자기 여동생이 홧김에 가위를 집어 던진 것이 눈에 맞아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눈이 한쪽으로 돌아가고 거의 실명되다시피 했..
모세가 죽은 후 즉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부르셨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자를 장사 지내셨으나 그 사역까지 장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엘리야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늘로 올라갈 때에 그의 망토 자락을 엘리사 위에 남겨 두고 갔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목적과 개혁은 여전히 다른 자들을 통하여 길러지고 가르쳐져 다시금 잉태되어 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역의 지속은 하나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그 날까지 영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실패란 있을 수 없고 오직 완성만을 향하여 운동되는 성질의 것입니다. 이 같은 무한한 하나님의 일을 계승하고자 하는 자는 그분의 뜻 앞에서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성품과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고 또 그것이 우리의 내부에서 연합되어 가는 과정을 교훈으로 전해 주고 있습니다. 가나안이란 땅은 더 나은 땅, 또는 하나님께서 친히 '나의 휴식처'라고 지정하신 곳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휴식처는 게으르거나 편하게, 그리고 수고하지 않아도 배부르게 되는 곳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노력과 담대한 투쟁, 그리고 승리했을 때에 주어지는 곳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하나님의 목적과 그의 계획에 참여하는 것을 말하며 그리하였을 때 찾아오는 조용한 휴식은 그분에 의하여서만이 가능하고 그분의 약속에 의해서만이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조용한 휴식 속에서 쉼을 얻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음과 같은 삶입니다. 1..
과부의 호소 - 열왕기하 4장 1절 - 7절 1. 과부의 호소 과부는 약하고 불쌍한 자의 대명사입니다. 하루아침에 사랑의 대상을 잃고 의지할 데조차 없이 막연하게 일생을 홀로 살아가야 한 과부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고아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아나 과부들에게 비상한 관심과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입니다(참조, 출 22:22; 신 24:19; 26:2; 막 12:44). 성경에 기록된 모범적인 과부들을 살펴보면 ① 자기의 모든 소유를 연보함으로 예수님의 칭찬을 들은 가난한 과부(막 12:42-44), ②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선행과 구제에 앞장 선 과부 다비다(행 9:36-39), ③ 예수님께서 죽은 아들을 고쳐 주신 나인 성의 과부(눅 7:12). ④ 과부..
기적을 체험하려면… (왕하 4:1-7)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고한대 저가 가로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왕하 4:7) 현대가 아무리 과학 만능 시대라고 하지만,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만 하는 제한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기적을 바라고 기대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아무런 부족함 없이 사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고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언젠가는 직면하게끔 되어 있고 불치의 병인 문둥병이 정복되니까 이제는 암병이나 AIDS같은 병이 사람을 불안과 공포로 몰아 넣는 것을 보아도 인간은 한계상황의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선지생도 즉 목사후보인 신학생 한 사람이 아내와 자식을 두고 ..
1. 떡을 주심 1) 옛 언약의 마침 유월절의 상징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완전히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만찬은 예수님에게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마지막 유월절 만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시는 유월절 만찬을 지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제자들에게 인식시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만찬이 다 끝날 때쯤 새로운 예식을 거행하심으로써 유월절 만찬이 폐하여지고 이제는 새로운 예식이 시작됨을 알리셨던 것입니다. 2) 새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심 '떡을… 떼어… 주시며…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① 생명의 유지입니다. 육의 사람은 떡을 먹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하나님은 본장에서 두 가지 대조적인 약속을 하십니다. 먼저 이스라엘을 대적하면 이방 민족들을 그들이 거하던 땅, 즉 하드락, 다메섹, 하맛, 두로, 시돈 등에서 추방하실 것이며 동시에 그들의 교만을 꺾으실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4, 6절). 반면에 이스라엘에게는 회복과 승리를 보장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이스라엘의 회복과 승리의 보장의 말씀 중의 하나가 본문 내용입니다.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회복에 대한 약속 1) 바벨론 포로에서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게 놓았나니'(11절). 여기서 '물 없는 구덩이'라는 것은 감옥과 같은 것으로(참조, 렘 38:6)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말합니다. 창 37:22에서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려 가기 전에 갇..
그리스도의 피를 기억합시다 (슥 9:11,12;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여기 저기서 돋아나는 파릇 파릇한 새싹이나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는 우리에게 생명의 신비마저도 느끼게 하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생명의 근원이 피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경 전체가 우리 인간에게 참 생명을 주시려 피흘려 돌아가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피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슥 9:11,..
본문은 주께서 당시 이스라엘의 부도덕한 결혼 생활을 책망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혼을 조장하여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를 비판하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근본적으로 이혼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남편이나 아내가 부정한 일을 범했을 경우는 이혼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들의 지도자였으며, 교법사 가말리엘(참조, 행 5:34)의 조부이기도 했던 힐렐(Hillel) 같은 사람은 아내의 음식 솜씨가 나빠도 이혼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사소한 이유로도 이혼이 성립되는 풍토를 조장시켰습니다. 이처럼 결혼이 신성하다는 관념이 땅에 떨어지고 이혼 풍조가 만연한 이스라엘 사회에 주께서는 본문 말씀으로 그 부당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1. 이혼 금지의 이유 1) 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순과 불평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사람이 죽게 되면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있어 진정 중요한 것은 얼마나 부자로 살았느냐, 얼마나 부귀를 누렸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처한 형편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1. 빈부의 경제적 모순 1) 부자 보문의 부자는 자색 옷을 입고,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하며 인생을 만끽하며 살았습니다. 그가 입은 자색 옷은 왕이나 귀족이 입는 귀한 옷이었으며, 그것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두 배나 비싼 것으로서 그것을 입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부는 나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과 ..
멸망으로 이끄는 무관심 (눅 16:19-31)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눅 16:22-24). 여기 본문에 나오는 한 부자는 사람을 죽였다든가 도둑질을 했다든가 하는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은 없는데 죽은 후에 그 영혼이 불꽃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한편 그 부자의 집 대문간에서 빌어 먹으며 허네를 앓던 거지 나사로는 죽은 후 아브라함의 품(천국을 묘사)에서 행복을 누리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얼핏 보면 부자는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 가고, 거지 ..